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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장군'이란 호칭을 왜 안 붙이나

조선일보 테러리스트 ‘의사’란 호칭으로 마라톤 기획 중.동상 12개는?

리복재 기자 | 기사입력 2008/08/23 [09:09]

안중근 '장군'이란 호칭을 왜 안 붙이나

조선일보 테러리스트 ‘의사’란 호칭으로 마라톤 기획 중.동상 12개는?

리복재 기자 | 입력 : 2008/08/23 [09:09]
안중근 장군이 적국인 일제의 침략 괴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는 이러하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러하다. 

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4.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 적도(敵盜)들이 쓰러지는 것을 지켜 본 안중근은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대한만세'를 세 번 불렀다     © 자료사진


 
국제 테러리스트로 오인 받을 ‘의사’란 호칭으로 국제적 마라톤대회를 기획하고 있는 조선일보

안중근 청년아카데미(대표 정광일 www.danji12.com )를 중심으로 안중근 동상 건립을 위한 추진위가 구성돼 안중근 장군 하얼빈 의거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안중근 장군 동상 건립 사업'이 8.15광복절인 지난 15일 '안중근장군동상건립위원회(위원장 김경재 전 국회의원)' 중국 추진회(회장 이창렬)가 발기인 대회를 가진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8·15가 이명박 정권에 의해 건국절로 행사를 추진하자 국내의 뜻있는 인사들과 단체는 주권과 역사왜곡이라며 정부가 주관하는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별도로 광복의 의미와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시기와 맞물려 진행됐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에서 이 단체 정광일 대표는 봉천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장군의 동상을 건립 추진하는데 있어서 이곳 심양이 과거 만주 봉천의 지역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역사적인 곳에서 발기인 대회를 갖는다는 의미를 강하게 강조했다.

정 대표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은 장군의 의거 96주년에 뜻을 같이하는 정치인과 종교인, 기업가와 언론인을 중심으로 ‘안중근 의사’가 아닌 ‘장군’으로서 예우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단체의 필요성이 제기돼 2006년 5월 15일 ‘안중근청년아카데미’를 창립시켰다.

이러한 민족정기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실에 중요한 것은 보수언론을 자처하는 조선일보가 ‘안중근마라톤대회’를 기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릴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조선일보가 이 단체의 자금력이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거금을 들여 국제적인 대회로 만들려는 의도에 대해서 이 단체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조선일보는 안중근을 이용 국제적인 마라톤대회를 준비하고 있는데 ‘의사’란 호칭을 쓸 것이 자명하다. ‘의사’는 당시 장군의 신분이 ‘대한의군참모중장’과 ‘독립특파대장’이었으나 일제의 의도인 ‘장군’이 아닌 ‘의사’로 호칭, 국제 테러리스트로 오인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단체가 설립되고 본격적으로 ‘안중근 장군’이란 호칭을 사용하는 시점에서 불거져 나왔고 '안중근장군마라톤대회'를 기획하고 있으나 자금력이 없는 단체로서는 행사와 홍보에 주력할 수 없는 약점이 결국은 타다가 마는 불꽃놀이와 비견되는 예다. 이러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보수언론을 자처하는 조선일보사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국내외의 뜻있는 인사들의 성원으로 '안중근마라톤대회'는 '장군'이란 호칭을 걸고 성황리에 행사를 치를 수 있을것으로 전망된다. 참가비는 1만원이다.

장군의 동상 12개를 건립하려는 이유

▲ 체포된 안중근 장군과 군국주의자인 이토 히로부미 사진     © 자료사진
안중근은 1907년 교육만으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 300명의 의병을 조직해 일제와 싸우다 패해 병력이 뿔뿔이 흩어져 굶어 죽을 상황과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다른 대원들을 격려했다.

“男兒有志出洋外 事不入謀 難處身 望順同胞警流血 莫作世間無義神“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밖에 나왔다가 큰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자!)


이러한 상황을 살펴보면, 을사늑약(친일주구들은 을사보호조약.을사조약이라고 칭하고 있음)이 체결되자 안중근은 교육으로서 일제의 침략과 야욕을 알려 나라를 지키고자 백년대계를 위해  1906년 3월, 안중근은 진남포(鎭南浦)로 이사하여, 삼흥학교(三興學敎)를 세웠다.

이후 1907년 고종황제의(高宗皇帝)의 명을 받은 이준 등의 밀사가 "네덜란드 헤이그" 에서 열리는 민국 평화 회의에 참석하여 일제가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맺은 일본측 용어인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압에 의한 것임을 세계에 널리 알리려던 '헤이그 밀사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물러나게 한 뒤, 우리나라에 관한 모든 일은 일본의 감독, 승인 아래 행할 것을 내용으로하는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을 맺어, 군대를 해산하는 등 식민지배의 야욕이 드러나자 안중근은 교육만을 통해서는 망해 가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해외로 건너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할 것을 결심한다. 

 1907년, 안중근은 진남포를 떠나 간도(젠다오 間島)지방을 거쳐 러시아 땅인 연해주(沿海州)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1908년 봄, 안중근은 그 곳에서 김두성(金斗星)을 총독으로 하고, 이범윤(李範允)을 대장으로 하여 의병 부대를 조직하고 자신은 참모 중장이 되어 일제에 대항하는 투쟁을 시작했다.

그 해 7월,안중근은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함경도(咸鏡道) 경흥(慶興)으로 쳐 들어가 일본 군인과 경찰 50여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곧바로 회령(會寧)으로 쳐들어가 일본군 수비대 5천여 명을 물리치는 등 13일 동안 30여 차례의 싸움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 안중근은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들을 국제법에 따라 모두 풀어 주었는데, 이로 인해 의병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뒤, 안중근이 이끄는 의병 부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지고, 안중근도 굶주림에 시달리며 산길을 헤매다 간신히 살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때 장군이 지은 시이다.

안중근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흑룡강성(黑龍江省)등을 돌아다니며 교포들을 모아 강연도 하고 단체를 조직하는 등, 교포들에게 독립사상을 북돋워 주는 일을 계속했다. 이 무렵, 안중근 그곳의 교포 사이에까지 퍼져 있던 일본에 협력하는 단체인 일진회(日進會)의 무리들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넘기기도 했지만, 한순간도 민족의 자주 독립을 향한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09년 2월, 안중근은 엔치아부근의 카리 마을에서 믿을 수 있는 동지들을 모아 동의단지회(同議斷指會)를 결성했다. 안중근은 그 곳 교포 사회에도 일본에 협력하는 무리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김기룡(金基龍), 강기순(姜起順), 정원주(鄭元柱), 박봉석(朴鳳錫) 등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왼쪽 약손가락을 잘라 피로써 태극기에 '대한 독립'이라고 쓴 뒤, 만세를 불렀다.

이들 12명의 애국 지사들의 몸과 마음을 바쳐 온 국민의 소망인 독립을 이루기로 맹세한 것을 기리기 위해 ‘안중근청년아카데미’가 안중근 장군 의거 100주년을 계기로 해년마다 국내 각 지역에 1개씩 12개의 동상 건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간도의 중심 봉천(지금의 심양)에서 발기인 대회가 갖는 의미

▲ 장군께서 순국하실때 입으셨던 수의. 당시 31세    © 자료사진
만주(滿洲) 봉천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자 애국인사들은 국내보다는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간도는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정착해서 삶의 터전으로 삼은 땅이다. 우리나라 영토인 간도지역을 일제가 만주 철도 부설권을 차지하기 위해 간도지역을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어 넘겨버리자 망국의 한을 품고 나라를 되찾고자 애국지사들은 간도지역을 대한독립의 전초기지로 활용했다. 특히 지금의 중국 심양(沈陽)/선양(瀋陽)의 옛이름은 봉천(奉天)이다.

1919년 국내에서 3ㆍ1독립운동이 전개되자, 국외에 망명하고 있던 독립운동 지사들은 이에 적극 동참하여 국외의 교포들과 독립투사들과 합쳐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여 만주, 노령, 미주 등 한국인이 살고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독립운동은 전개되었다. 그러나 민족의 비분과 주권회복의 열망이 총집결된 평화적인 3ㆍ1운동이 일제의 가혹한 무력탄압으로 좌절되어 버리자, 만주 특히 봉천을 중심으로 한 결 같이 평화적인 만세운동이 민족의 희생만 더할 뿐 효과가 없다고 판단하여 보다 조직적이며 무력적 성격의 운동만이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만주에 건너와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던 많은 지도자들은 무기와 병력을 보충하여 훈련하면서 독립전쟁의 태세를 강화하였다. 3ㆍ1운동 후 많은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오기 시작하자 만주의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이들을 영합하여 독립군을 확대 편성하여 나갔다.

대한 독립단(大韓獨立團)/ 네이버신지식에서 인용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이 해 4월 봉천성유하현삼원보(奉天省柳河縣三源堡)에서 조직되었다. 1919년 3ㆍ1운동으로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많은 동포가 만주로 이주하는 기회를 이용, 박장호(朴長浩)ㆍ조맹선(趙孟善)ㆍ백삼규(白三圭)ㆍ조병준(趙秉準)ㆍ전덕원(全德元)ㆍ박양섭(朴陽燮) 등 각 단체대표 560여 명이 모여 각기 분립된 단체를 해체하고 독립쟁취를 위한 단일기관으로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대한 독립단은 국내외 모두 100여 개소의 지단ㆍ지부를 설치하고, 만주지역에는 거류 동포 100호 이상을 구(區)로 하여 구관(區管)을 두고 10구에 단장을 두어 자치행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국내의 지단조직은 국내 총지단장에 홍제업(洪濟業), 평안북도 정우범(鄭禹範), 평안남도 안창일(安昌一), 경기도 한덕리(韓悳履), 용천군 이후관(李厚觀), 철산군 안병철(安秉哲), 영변군 신태익(申泰翼), 정주군 조석균(趙錫均), 태천군 백낙기(白樂基), 영유 이항로(李恒老), 가산 오봉희(吳鳳熙), 수안 최일호(催一浩) 등이었다. 만주지방 조직으로는 장백현 총지단장에 유일우, 집안현 유수림자(楡樹林子) 최남표(催南表), 집안현 외차구(外疎區) 홍승국(洪丞國) 등이었다. 이들은 3, 4명씩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남북도의 조선총독부 예하 경찰을 습격하고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금하면서, 전국적인 조직망을 확대시켜갔다.


그렇다면 간도지역을 살펴보면 우리나라를 건국한 단군국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지역에 최초로 환국(桓國)이 존재하였음이 나타난다(삼국유사 정덕본의 檀君古記에는 昔有桓國이라 하였다)  

동이(東夷)사상의 단군문화는 흑룡강·송화강 유역 북쪽의 본거지에서 잉태되어 요하·압록강 중간 대륙에서 발전한 후 동방으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민족 이동을 하였으며, 서방으로는 만리장성 동쪽 대능하 유역의 양평(襄平)에 2차적 중심지를 건설하였다.  

우리 민족은 백두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음이 나타난다. 단군고기의 “백산흑수(白山黑水)” 지역은 백두산과 흑룡강이다(환단고기)  

B.C. 3천년에 숙신(肅愼), 이(夷)이라 불렸으며, 산해경에는 ‘불함산이 있는 나라가 숙신국이며 동북지역의 국가원수들이 모두 숙신 출신이라 하였다. 주(周) 시기에는 이적(夷狄), 험윤이라 하였고, 춘추(春秋), 한 (漢) 시기에는 호(胡), 맥맥, 흉노(匈奴)라 하였으며, 이후의 위진(魏晋) 시대에는 예맥(濊貊), 한(韓), 오환(烏桓), 선비(鮮卑)라 하였다.  

동이(東夷)에는 아홉 겨레(九夷)가 있는데, 황하 이북과 몽골 사막 이동의 만주지역과 흑룡강 일대 및 연해주 지역에, 황, 백, 현, 적, 남, 양, 우, 방, 견이라는 종족이 살았다.  

B.C.2333년에 고조선이라 부르는 단군조선을 건립하였으며 북만주지역의 송화강 유역에 위치하였다. 이후 남하하여 대능하, 요하지역인 발해 연안으로 도읍을 옮겼다.  

고조선은 하-은-주시대에 하르빈-농안-장춘-봉천지역과 요하 및 압록강 부근의 진(眞)조선과 대능하와 요하 사이 지방에 존재했던 번(番)조선으로 발전하였다.  

고조선시기의 발전된 문화는 창힐(蒼?)의 문자(漢字) 발명과 더불어 홍범(洪範)의 창제 및 홍익인간이라는 건국이념으로 발전하였다.  

고조선 문화의 우수성은 1970년대부터 발견되어진 대·소능하 유역의 흥륭와문화와 홍산문화 등의 유적 발견으로 입증되었으며, 중국의 황화문화 보다도 2천년 내지 천오백년 앞선 문화임이 밝혀졌다.  

중국이 부르는 청구국(靑邱國)은 황제시대 이전에 산해관 북방지역인 번조선지역에 존재한 국가였으며, 동이문화를 심화 발전시킨 국가였다. 청구국 서쪽인 난하 맟 산해관 서방에 위치하여 동이민족의 서방 진출의 전초 기지였던 고죽국(孤竹國)이 천년 가량 존속하였다.  

위만조선이 B.C. 108년에 망하니 漢은 진조선과 대능하 유역의 번조선 지역에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의 4군을 설치하였다.  

고조선 말기에 송화강 유역의 하르빈 지역에서 부여가 건국되었으며, 여기에서 동부여가 파생되었으며, 고구려의 지배층인 주몽이 동부여에서 이주하여 졸본부여를 압록강 유역에 세우게 되니 고구려의 시작이었다.  

고구려의 역사는 왜곡된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7백년 설을 통설로 알려져 있지만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 김부식 자신이 저술한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서도 “고구려비기왈 불급 구백년(高句麗秘記曰不及九百年)”이라 하였으며, 당회요(唐會要)에도 동일한 기록이 보이며 이를 근거로 북한은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B.C.277년으로 간주하여 고구려의 존속기간을 945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고구려는 고조선의 찬란한 문화를 이어 동북아의 패자(覇者) 역할을 하였으며, 그 뒤를 이은 대진국(발해) 역시 “해동성국”의 칭호를 얻은 만큼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277년간 존속하였다. 
  
대진국 멸망 후 동이족의 후예인 거란과 여진이 199년, 109년을 통치하였다, 그 후 몽골이 134년을 지배하였다.

간도지역이 위치한 만주지역은 만리장성 이북 및 산해관 이동지역으로 명 이후로는 관외지역으로 불렸다. 만주(滿洲)의 명칭은 원래 만주(滿珠)라고 불렀다. 만주에 속한 지역을 주신(珠申)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후에 개칭되어 만주(滿珠)가 되고 한자의 모양이 와전되어 만주(滿洲)가 되었다. 만주족은 숙신족의 한 일파이며 근세에 와서 형성된 종족의 통칭이다. 여러 문헌을 고찰한 결과 만주는 대추장의 명칭이 종족의 총칭으로 와전되 었다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현재의 만주지역은 청의 초기에는 길림지역을 오라(烏喇), 흑룡강일대를 영고탑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청 말기에 동삼성이라 부르는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명칭으로 개칭되었으며, 1932년 만주국 성립 으로 이 지역은 더욱 세분화시켰다. 즉 안동성, 봉천성, 금주성, 통화성, 간도성, 길림성, 빈강성, 목단강성, 동안성, 삼강성, 북안성, 흑하성, 흥안 동·서·남·북성, 사평성, 신경특별시로 구분하였다. 이 중 간도성은 두만강 북쪽의 북간도 지역에 한정하였다.  
 
▲ 8월 15일 중국 심양에서 안중근 장군 동상 건립 발기인대회에 북한 여성이 축하 공연을 해주고 있다.     © 플러스코리아


만주지역에 공한(空閑)지대가 설치된 것은 명의 1469년 경 요동과 압록강 사이에 몽고와 여진을 방어하기 위해 변책을 세웠는데 청이 이 요동 변책의 기초위에 유조변책을 1643년부터 1661년 사이에 수축하였다. 이 변책은 봉황성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지역으로 노변 또는 성경변장으로 불렀다. 1670년에서 1681년 사이에 청이 개원 위원보에서 길림에 이르는 유조변을 신축하였는데 이를 신변이라 불렀다. 이러한 봉금지역이 무주지로서 19세기 초까지 존재하였다.  

간도 명칭의 유래는 두만강 중간의 종성과 온성 사이에 있는 삼각주가 매우 비옥하였는데 1870년경부터 부근의 주민이 이곳을 개간하기 시작하여 간도(間島)라 불렀다. 그 후 무산, 온성 사이의 주민이 도강하여 백두산 동쪽 기슭의 비옥한 토지를 개간하여 이곳을 모두 일컬어 간도라 부르게 되었는데 모두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개간하였다 하여 간도(墾島)라 부르기도 하였다.  

간도지역은 두만강 대안지역을 동간도라 부르고, 압록강 대안지역을 서간도라 부른다. 특히 동간도는 노령산맥 이동을 동간도 동부 즉 세칭 북간도이며 노령산맥 이서를 동간도 서부로 구분한다. 간도협약시 한·중 양국 민이 잡거구역으로 규정한 곳은 동간도 동부지역이다.  

1909년 간도협약 이후 간도지역은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수많은 우리 동포들이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청산리,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간도지역은 만주국 시기의 행정구분을 없애고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으로 나누어서 통치하고 있다. 특히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 간도“라는 지명을 사용하지 않고 ”동북지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 간도지역을 동부지역으로 불러서는 안 되며 "고토회복지역” 또는 “북방지역”이라 불러야 타당하다.

안중근 장군의 유해발굴과 중국 현지에서 제작 서울에 세워질 장군의 동상은?

이러한 역사적인 실체 앞에서 우리는 지금이라도 안중근 장군의 시신은 물론 애국지사들의 유해발굴에 중점을 두어 국내로 모셔와 봉안해 드려야 한다. 망국의 한을 가슴에 남기고 숨을 거둔 애국지사들의 숨결이 100년 정도의 역사로 간도 그리고 봉천에 묻혀있다. 우리 후손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절감케 하는 시점이다.
 
▲ 국내에 건립할 안중근 장군 동상 모형     © 플러스코리아


환경변화와 개발로 인해 유해발굴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지만 우리는 거룩한 애국지사들의 숨결을 모셔와 봉안해 드려야 하는 것은 지상최대의 숙명이자 과제이다.

이러한 과제를 안고 ‘안중근청년아카데미’는 안 장군의 동상을 간도지역인 봉천에서 제작해 동양평화를 위해 적국의 괴수를 육혈포로 저격 사살시킨 하얼빈과 포로로서 대우해주기는 커녕 국제테러범으로 조작해 사형시킨 뤼순 형무소를 거쳐 서울로 운송해 장군의 의거 100주년이자 서거 99주년이 되는 2009년 3월 26일(안중근 장군 순국일) 동상을 건립하게 된다.

유감인 것은 중국 당국이 안중근 장군의 동상을 세우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외국인을 자국에 세울수 없다는 방침이라고 한다. 2006년 이 단체 지도위원이 3억원을 들여 장군의 동상을 제작해 하얼빈 번화가에 건립하자 중국 당국은 11일만에 철거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나 장군이 하얼빈에서 대한독립의군참모중장과 독립특파대장이란 신분을 가지고 적국인 일제의 괴수를 육혈포로 저격 사살시키자 중국은 10억명이 하지 못한 일을 안중근이 해냈다면서 ‘안중근은 조선의 영웅, 아시아의 영웅이 아니라 세계의 영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정치적인 이유로 장군의 동상을 세우지 못하게 한 것은 서운함을 넘어 서글프다.

그러나 뜻있는 인사들은 중국당국이 장군의 동상을 세울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유감을 안고 장군의 100년 넋을 안중근 장군의 동상 제작이 완료되면 역사의 현장인 하얼빈 역으로 이동해 하얼빈 역 광장에서 '안중근 평화노제'를 지내는 등 역사적 행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안중근 장군의 거사 장소인  하얼빈 역 광장 노제로 시작된 포퍼먼스는 이후 이 동상을 기차에 싣고 안중근 장군이 5개월 동안 수감생활과 재판을 받았던 중국 뤼순형무소와 대련시로 이동, 100일 동안 현지에 봉안한 뒤 3.1독립만세운동 90주년 기념일인 2009년 3월 1일 인천항에 도착시킨다는 것이다.

이 단체 정광일 대표는 "현재까지도 안중근 장군의 묘는 물론 유골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므로  하얼빈 투쟁과 대련감옥, 그리고 배편을 통한 귀국까지를 안중근 장군 동상으로 재현하려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정 대표가 부여하는 그 의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민족정기의 표상이자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민족의 염원을 담아 군국주의자이자 침략자인 적 괴수를 저격시킴으로서 우리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렸던 안중근 장군의 넋과 원혼을 100년만에 국내로 모신다는 것은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들의 의무이자 산자들의 몫이다.
실제역사 08/08/30 [11:15] 수정 삭제  
  프리메이슨의 하수인 안중근으로 하여금 일제를 극도로 자극하게 하여 만주와 간도와 연해주와 사할린을 잃고 한반도로 쪼그라들게 되었던 것이죠.
고순계 09/03/09 [14:33] 수정 삭제  
  가난의 한을 넘기위하여 일했던 박정희에게 많은 사람들은 그가 독립군을 잡던 나쁜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던 절제를 주목합니다. 남과 북이 통일되는 현실에서 안중근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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