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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천리장성과 연개소문의 쿠데타

북경북 ~ 산해관 장성은 고구려 영류왕 때 쌓은 것인가?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10/24 [13:34]

고구려 천리장성과 연개소문의 쿠데타

북경북 ~ 산해관 장성은 고구려 영류왕 때 쌓은 것인가?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10/24 [13:34]
본 글은 아래 우리 민족사의 쿠데타 3부작의 (3부) “고구려의 쿠데타로 본 삼국사기의 기록은?”의  제3부-2장입니다.

명립답부의 쿠데타에 의해 차대제가 시해 당하고, 8세 신대제가 즉위하였으나 조정의 실권은 모후인 상태후와 명립답부가 쥐게 되었다. 한나라 대군이 침입했을 때 말 한필도 살려보내지 않은 좌원대첩의 명재상 명립답부와 신대제는 같은 해에 죽는다. 두 사람은 참으로 인연이 많기도 한 것 같다.

신대제의 뒤를 이어 둘째 아들인 9대 고국천제가 즉위한다. 6년(A.D184년) 한나라 요동태수가 쳐들어오자, 임금이 직접 전투에 참전하여 역시 좌원에서 크게 이겨 목 벤 시체가 산같이 쌓였다. 이를 좌동친전(坐東親戰)이라 한다고 <삼국사기>와 <고구려사초.략>은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국천제는 을파소라는 명재상을 국상(國相)으로 등용하여 국정을 바로잡는다. 죽려지인을 주어서 부도한 이들을 즉석에서 주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빈민을 구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훌륭한 군주였으나 주색에 빠져 끝을 좋게 맺지 못하고 춘추 43세에 승하했다 한다. 

▲  국가를 위해 헌신한 공무원에게 주는 을파소상 시상식

 
10대 산상제의 등극과 발기의 실패한 역쿠데타

고국천제가 승하하자 황위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고국천제의 부인인 우후(于后)가 국상이 났음을 숨기고, 예전부터 통정하던 연우(신대제의 서자)를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가짜 조서로써 제위에 세우고 국상이 났음을 알리게 된다. 여기에 반발하는 측이 있었으니 바로 고국천제의 동복아우인 발기(發岐)였다. 즉 황위가 서자 출신의 배다른 동생 산상제에게 돌아가자 적출(嫡出)인 형 발기가 반발을 하고 나섰다.

이에 국상 을파소가 산상제를 받들고 발기를 치자, 발기는 두눌 지방으로 도망하여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요동태수 공손탁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에 공손찬은 발기를 돕는 척 하며 고구려의 서쪽인 서안평(西安平) 등을 쳐서 빼앗는다. 나중에 요동태수에게 속은 것을 안 발기는 울분으로 등창이 날 지경이었다.

발기는 사병(私兵) 300인을 거느리고 범궐(犯闕)하나 붙잡히게 되고, 산상제는 어리석고 무모하였던 것이라며 발기의 죄를 면하여 주었으나, 발기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 못하고 다시 두눌의 땅으로 들어가 칭제하고는 공손탁과 상통하게 된다. 그러자 산상제가 군대를  보내 두눌을 쳐서 빼앗으니 마침내 발기는 패하고 자결하고 만다고 <고구려사초.략>은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위의 기록과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고국천왕이 죽자 왕후 우씨가 이를 비밀에 부치고 밤에 아우인 발기의 집을 찾아가서 “왕이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계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발기는 왕이 죽은 것을 모르고 대답하기를 “하늘의 운수는 정해져 있으니 함부로 논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부인으로서 밤에 나돌아 다니는 것을 어찌 예라 할 수 있으리까?”하니 황후가 무안해하며 나와 연우의 집으로 찾아간다.

연우가 의관을 정제하며 문에 나와 맞으며 술을 대접하니 “대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니 발기가 집안 중 어른이라 당연히 뒤를 이어야 할 터인데, 나더러 딴 마음이 있다고 포만무례(暴慢無禮)하므로 시숙을 보러 온 것이오.”말한다. 연우는 밤에 불상사가 있을 지도 모르니 궁중까지 데려다 달라는 우후의 청을 응락하고 따라가니 왕후가 손을 잡고 들어가고, 이튿날 거짓으로 선왕의 유명이라 꾸미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연우를 왕으로 세우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발기가 이를 듣고 노해 군사를 내어 왕궁을 3일간이나 포위했음에도 백성들이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으니 일이 글렀음을 알고 처자를 버리고 요동으로 도망친다.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3만의 군사를 빌려 고구려로 쳐들어오나 아우 계수에게 패해 배천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다.

왕이 본시 우씨로 인해 말미암아 위를 얻었기 때문에 다시 장가를 들지 아니하고 우씨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전후사정으로 보아 이 내용은 <고구려사초.략>이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로는 우씨가 후계 서열 0순위인 발기에게는 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연우에게는 왕이 죽었음을 알렸다는 것과 둘이 밤에 손을 잡고 궁중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이다. 서로 연인 사이가 아니면 하기 힘든 행동인 것이다. 중차대한 황위를 전함에 있어 이렇듯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기록이다.

따라서 필자는 고국천제가 특별한 사유도 없이 4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승하한 것은 필시 연인 관계인 우후와 연우가 짜고 뭔가 독살 음모를 완벽하게 꾸민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지 않고서는 멀쩡하던 고국천제의 죽음과 산상제의 등극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게다가 고국천왕의 등극에서도 두 사서의 기록이 약간 다르다. 고국천제는 신대제의 둘째 아들인 것은 서로 기록이 같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발기를 고국천왕의 친형’으로 기록하였고, <고구려사초.략>에서는 “현(玄)태자가 장자이나 선하기는 해도 용감하지 못하여 부황이 고국천제를 후사로 삼으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삼국사기>는 고국천왕이 죽자 우씨가 왕의 아우 발기의 집을 찾아갔고, 발기가 궁궐을 포위하고는 “형이 죽으면 아우가 이어받는 것이 예이거늘 너는 차서를 무시하고 마구 빼앗는 큰 죄를 범하였다.”고 적었다. 이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인 것이다. 고국천왕의 등극 과정에서는 발기가 형으로 기록되었다가, 고국천왕이 죽은 다음에는 발기가 동생이 되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신뢰하기가 어렵다고 봐야 한다.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 의하면, 결국 발기가 일으킨 내란(반란)으로 인해 고구려는 서쪽 땅인 서안평 등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잃어버린 서안평을 산상제 9년(205년)에 다시 되찾게 된다. 서안평은 우리 사서에 많이 등장하는 지명으로 이 서안평 일대를 한나라와 고구려의 경계로 보면 될 것이다.

당시 위나라와 고구려는 이 서안평을 놓고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다. 고구려가 서진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거점이요, 위나라가 고구려로 북동진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식민사학계는 이 서안평을 현 압록강변의 단동 일대로 비정하고 있으나,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서안평은 석문(현 석가장) 부근인 것이다. 

▲ 일제는 반도사관을 고착시키기 위해 고구려와 중국의 국경이나 다름없는 서안평을 단동으로 비정하고 있다.

산상제는 형수인 우후와 혼인하여 부부가 된다. 예로부터 고구려에는 증모처수(烝母妻嫂)라는 제도가 있어 형수인 우후와 시동생인 산상제의 혼인은 평범한 일이었다. 증모처수란 제도는 아버지나 형제가 죽으면 친모 이외의 서모나 형수/계수를 처로 거두는 것으로 북방유목민족의 고유한 풍습이었다.

단군의 후손인 선비족에도 이러한 풍습이 있었다. 선비는 조선비왕(朝鮮卑王)의 준말이다. 선비족으로 천하를 통일한 수나라 문제가 아들인 양제에게 죽임을 당하고, 양제는 아버지의 후궁인 한국부인을 취한다. 역사기록에서는 이를 증(烝)이라 한다. 증이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인 당태종 이세민의 궁녀였던 무미랑(후에 측천무후)을 좋아했던 당고종은 태종이 죽자 출궁하여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된 무미랑을 불러들여 후궁으로 삼는다. 무미랑은 나중에 황후가 되어서는 간질병이 있었던 당고종을 대신하여 정무를 처결한다. 황제 아닌 황제로 군림하던 무측천은 황제인 자신의 두 아들(중종과 예종)을 끌어내리고 나중에는 직접 중국역사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주(周)나라의 일대 여황제가 된다.  
 
▲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 측천무후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다.  


참고로 산상제의 아들인 11대 동천대왕이 승하하자 장자인 중천대제가 즉위한다. 그러자 동생 예물이 “선제가 독살 당했다.”는 주장을 퍼뜨리면서 병사를 일으켜 범궐하였으나 결국은 화살에 맞아 죽고 만다. 실패한 쿠데타였다.

14대 봉상제의 등극과 창조리의 쿠데타

서천제가 53세에 갑자기 죽자 맏아들인 치갈태자가 봉상제로 즉위한다. 태자 시절부터 성품이 교만하고 색을 밝혔으며 시기하는 것도 많았고 매우 잔인하여, 선제(서천제)는 자질이 모자라는 태자에게 나라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는데 서천제가 갑자기 죽자 어머니 우후가 거짓 조서로 봉상제를 세웠다.

또한 안국군에게 병권을 빼앗아 우후의 형제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탄식하며 한숨지었다고 <고구려사초.략>은 기록하고 있다. 안국군은 봉상제가 자신을 죽이려 하자 자결하고 만다. <삼국사기>에는 자결이 아니라 왕이 안국군이 숙부의 항렬에 있고 큰 공이 있어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까닭으로 계획적으로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에는 황태제인 아우 돌고를 죽인다. 백성들은 돌고가 죄 없이 죽었다 하여 애통해 했다. 돌고의 태자인 을불(乙弗 후에 미천제)은 탈출하여 도망간다. 봉상제는 을불을 사로잡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고 현상금을 걸었다. 결국 을불이 붙잡혀 함거에 실려 보내지자 백성들이 습격하여 풀어주는 일이 발생한다.

나라 안은 서리와 우박으로 곡물이 죽어 많은 백성들이 굶주리고 궁궐 노역에 시달려 원성이 자자하였다. 백성들은 서로 뭉쳐서 도둑이 되는 세상이 되었고, 하늘에서는 뇌성이 울리고 지진이 일어났다.

 
 
9년(300년) 8월 나라 안의 남녀 15살 이상이 궁궐을 짓는 부역에 끌려갔다가 먹을 것이 없어서 정처 없이 떠돌았다. 국상 창조리(倉助利)와 신하들이 이를 간해도 황제는 듣지 않았다. 창조리가 충심으로 간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국상이 백성을 위하여 죽으려 하는가? 다시 말이 없기를 바란다.”했다.

창조리는 임금이 마음을 고치지 못할 것을 알고 또 해가 미칠까 염려되어 군신들과 더불어 을불을 맞아들여 황제로 세우고 봉상제를 행궁에 가두었더니 스스로 목메어 죽었다. 모본제와 차대제에 이은 세 번째 폐위였던 것이다.
 
▲   강화도 교동도에 있는 폐주 연산군 유배지 안내판과 안내비석

미천제(을불)는 일찍부터 머슴살이와 소금장수를 하는 등 세상을 유랑하며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깨달았기에 황제로 등극해서 선정을 베풀어 태평성대를 열고, 30만 수륙군을 양성해 고구려를 군사강국으로 키운다.

당시 중원은 한조, 선비, 흉노가 엉켜 5호 16국으로 나뉘어 서로 전쟁하기에 바빴기에 대륙의 진정한 강자는 고구려와 백제뿐이었다. 이후 고구려는 별다른 쿠데타(정변) 없이 한동안 왕위 계승이 순조롭게 이어진다.


만고의 영웅 연개소문에 의한 쿠데타

수양제의 100만 대군을 물리친 26대 영양제가 죽고 27대 황제로 이복동생인 건무(建武 영류제)가 즉위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당고조 이연은 영류제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는, 고.수 전쟁 후 고구려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인들을 돌려 보내달라고 하여 찾아보았더니 수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양국 사이에 화해 무드가 조성된 것이다. 

▲  수양제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영양대제와 을지문덕장군. SBS 드라마 연개소문의 한 장면

 
영류제는 형인 전 황제의 모든 정책을 폐기한다. 그리고는 당나라로부터 천존(天尊)의 상과 도교(道敎)의 법을 가지고 온 도사(道士)에게 노자(老子)와 도덕경을 강의하게 하고 백성들과 함께 들었다. 또한 당나라는 사람을 보내 수나라 병사들의 해골을 묻고 위령제를 지냈으며 당시에 세웠던 경관(京觀 살수대첩 승전기념비)을 헐어 버렸다.

<삼국사기>와 <한단고기>의 기록에 따르면, 영류제 14년(631년) 백성 수십만을 동원해 장성을 쌓았는데, 동북으로 부여성에서 동남으로 남해부(南海府) 바다에 이르기까지 1,000여리를 잇대니 무려 16년 만에 공사를 끝냈다 하는데(王動衆築長城 東北自扶餘城 東南之海 千有餘里 凡十六年畢功: 구당서에는 동과 서를 바꿔 기록함으로서 우리 역사를 왜곡한다),

이 장성은 동단(東端)인 산해관 노룡두 (山海關 老龍頭)에서 시작해 북경 북쪽으로 이어지는 장성의 원본(오리지날)은 고구려 영류왕 때 쌓은 이 천리장성이 아닌가 한다. 후에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막기 위해 산해관부터 북경 북방으로 이어지는 장성을 개.보수를 하는데, 중국 사학자들은 연나라 장성을 개축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과연 그럴까? (다음에 상세히 소개됩니다.)  

▲  산해관에서 각산으로 이어지는 장성은 북경 북쪽을 지나 만리를 이어간다. 사진의 왼쪽은 서쪽 북경 방향이고 오른쪽은 동쪽인 만주방향이다. 그런데 산해관의 편액인 '천하제일관'은 북경 쪽에서 볼 수 있다.  (중앙 우측  하단에 하얗게 보이는 것이 편액이다) 게다가 치양식과 봉화대의 위치로 보면 이 장성은 서쪽의 적을 막기위해 축조한 장성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명나라가 만주의 후금을 막기 위해서는 장성을 이렇게 반대로 쌓을 리가 없다. 따라서 이 장성의 원본은 고구려나 대진국/고려가 중원(서토)의 적을 막기 위해 쌓은 장성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때에 서부대인 연개소문은 도교를 강의하는 것과 장성 쌓는 일을 중지하자고 왕께 청하였으나, 영류제는 오히려 연개소문의 병사를 빼앗고는 장성 쌓는 일의 감독을 시키고는 은밀하게 다른 대인들과 더불어 의논하여 연개소문을 주살코자 하였다. 연개소문은 이 소문을 듣고 탄식하며 “어찌 몸이 죽고 나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랴? 일은 급하다. 때를 잃지 말지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모든 부장을 모아 마치 열병하는 것처럼 하고는 성대하게 술상을 벌여 대신들을 초청하여 함께 이를 시찰하고자 하였다. 모두들 참석하자 연개소문이 소리를 크게 내며 격려하기를 “대문에 호랑이 여우가 다가오는데 백성들 구할 생각은 않고 오히려 나를 죽이려 한다. 빨리 이를 제거하라”하니 측근들이 오는 대로 모두 잡아 죽이니 1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영류제는 변고를 듣고 평복으로 몰래 송양으로 도망쳐 조서를 내려 나라의 대신들을 모으려 했으나 한사람도 오는 사람이 없다보니 스스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숨이 떨어져 붕어하였다고 <한단고기>는 적고 있다.

<삼국사기 연개소문열전>에는 영류왕의 죽임에 대해 달리 적고 있다. “그 길로 궁중으로 달려가 왕을 시해하여 여러 동강을 내어 구렁텅이에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대막리지가 된 연개소문은 영류제의 조카인 장(藏)을 임금으로 세우니 이가 고구려의 마지막 대왕(황제)인 보장제인 것이다. 

▲  연개소문이 영류제를 찾아가 진언을 올리고 있다. SBS 드라마 연개소문의 한 장면

이렇듯 고구려에서는 몇 차례의 쿠데타가 있었으나 역성혁명은 일어나지 않고 즉 황제는 바뀌었으나 나라가 바뀌지 않고 주몽의 후손인 고씨(高氏)가 제위(帝位)를 계속 이어간다. 그리고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은 비록 황제는 되지 않았지만, 전권(全權)을 한 손에 틀어쥐고는 마치 황제와 같은 권한을 행세하면서도 개인의 영달보다는 민생을 안정시키고 고구려를 강국으로 만드는데 전념한다.

그래서 고구려의 쿠데타 뒤에는 오히려 정치가 안정되고 민심이 수습되며 더욱 강성한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덕한 황제가 바뀌는 큰 정변 뒤에는 명림답부, 을파소, 연개소문과 같은 명재상이 있었던 것은 900년 고구려 사직의 크나큰 행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정치인들에게 귀감이 될 역사적 교훈인 것이다.

▲  조선 선조 때의 명재상 유성룡. 고구려는 정변(쿠데타) 이후 이런 명재상들로 인해 정치가 안정되고 민심이 수습되고 더욱 강력한 나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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