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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탈북자 “ 딸 꼭 만나는 게 소원!!”

탈출하다 잡혔을 때 “절대 잡히지 말라요. (잡히면)죽어야 합네다...”

리복재 기자 | 기사입력 2008/11/11 [15:52]

[단독]탈북자 “ 딸 꼭 만나는 게 소원!!”

탈출하다 잡혔을 때 “절대 잡히지 말라요. (잡히면)죽어야 합네다...”

리복재 기자 | 입력 : 2008/11/11 [15:52]

▲ 북한을 탈출한 신씨가 당시를  증언하며 자신이 살았다는 주소를 적고 있다.     © 이병철 기자

 
▲ 신씨가 가지고 있는 소지품. 화장지, 수건, 속 옷, 침과 쑥뜸, 중국 지도, 가방 하나.     © 이병철 기자


 
11월 8일 북한에서 탈북했다는 신성남(가명, 63세)씨를 중국 길림에서 어렵게 만났다. 만나자 마자 그는 믿지 못해서인지 우리의 신분을 보여달라고 요구해 소지하고 있던 기자증을 보여 주자, 자신을 북한에서의 의사라고 소개한 신씨는 두만강을 건너 탈북한지 40일이나 되었다고 증언했다.

70대로 보이는 병색이 깃든 그는 영하의 쌀쌀한 날씨때문인지 남루한 나일론 점퍼에 털실로 짠 조끼 등 윗옷만 7가지를 껴입고 있었다. 오랫동안 먹는 것이 변변치 못했는지 하얗게 변해버린 까칠까칠한 수염에 그동안 씻지도 못한 검게 그을린 얼굴이었다.

북한에서는 공산당원이자 의학연구소에 근무했다라고 말한 신씨는 “아내도 죽고 아들도 죽고 살아남은 사람은 오로지 딸 뿐”이라며 “내가 죽기 전 꼭 한 번 만나고 싶다”고 말하며 “기자 선생이 좀 도와주면 안돼?”라고 공산당원 답지 않게 애원하다 시피 했다.

한국에 가고 싶으냐는 물음에 “한국에 가고 싶지만 인민을 위한다고 충성 맹세를 했는데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 누가 충성을 맹세한 공산당원을 받아 주겠는가? 나는 팔뚝에 ‘200만 노동적위대’라는 칼로 글를 써 현재도 남아 있다. 조국에서 날 받아 준다면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신씨는 조국이 싫어 탈출한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죽기 전에 마지막 남은 혈육인 사랑하는 자신의 딸을 만나고 싶어 북한을 빠져 나왔다고 판단했다. 딸은 3년 전에 북한을 탈북했다고 증언했다.

신씨는 북한내 식량사정에 대해서도 증언 했는데, 일반 주민들에게는 정기적인 배급이 끊기고 3일에 한 번 정도 지급되는 상태이고, 국가 기간산업과 군대 군수물품을 제조 조달하는 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에겐 배급이 끊기지 않았다며, 최근 러시아 중국 한국에서 쌀이 지원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인터뷰를 끝내고 밥이나 같이 먹자는 권유에 그는 한사코 “냄새 나는 데, 도와준 기자 선생께 폐를 끼칠 뿐” 이라며 뒤돌아서 눈물을 흘리며 사라져 갔다.

이명박 정권 들어 남북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어 가고 있다. 이는 이념적 선정적인 방식으로 국보법을 들이대며 북한에 대한 반감을 키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10년 간의 관계에서의 다져놓은 상태만이라도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이렇게 되면 그 동안 같은 동포로서 경제적인 지원과 통일에 대한 염원으로 쌓아놓은 민족적 개념까지도 무너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남 과 북. 이념과 사상을 떠나 같은 민족이요 같은 동포이다. 가다가 쓰러져 죽을 것 같은 노인, 눈동자가 튕겨 나올 것 같은 돋보기안경을 쓴 공산당원 신씨의 말과 행동에서 느끼는 것은 민족적인 연민의 정을 나누며, 주고받는 대화에서 모든 아픔과 쓰라린 상처를 확인하곤 돌아서서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현실을 원망했다.
 
아직도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는 남북한의 극렬분자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마냥 당하고만 사는 우리 민족의 한은 이렇듯 춥디추운 중국 북방지역에서 만나 민족의 자존심(?)과 혈육의 애뜻함이 동전의 양면처럼 펼쳐져 있는 게 못내 아쉬웠다.

다행히 탈북자 신씨의 증언이 남한에서 암암리에 식량이 지원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정치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려는 저의로 호들갑을 떨어서는 안 된다. 이명박 정권의 폭넓은 시야와 실질적인 대북교류와 지원 정책이 북쪽의 혹독한 겨울을 맞아 살아 있는 우리 민족에게는 절실하다. '사람은 살려 놓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 소지품 중 침술에 대해 적어 놓은 수첩     © 이병철 기자
▲ 공산당원이라며 팔뚝을 보이며 과거  '200만 노동적위대'라고 쓴 흔적을 보여 주는 모습.     © 이병철 기자
▲ 약간의 경비를 주는 모습.     © 리복재 기자


다음은 탈북자 신성남씨와의 인터뷰한 전문이다.

- 가족 관계와 북한 어디에서 살다가 탈출했나?

=나는 평양시에 사는 의사(의학연구소 근무)였다. 주소는 평양시 외성구역 ... 아내(고향은 양강)는 죽었고 아들은 아오지 국토연구소에서 죽었으며 딸은 3년 전에 탈북해 현재 중국내에 거주하고 있다.

-딸이 중국 어디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가?

=내 딸(민애 가명)은 똑똑하고 매우 예쁘다. (딸이)10년 전에 자유로운 곳에서 살고 싶다는 의견을 내 놓았는데 아비로서 달래지 못했다. 탈북 후 중국 남쪽에 정착한 후 연락을 보내 왔다.

-그래서 탈북을 결심한 것인가?

=나는 당원이다. 충성을 다하는 게 나의 직분인데 가족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이 흔들리게 되었다. 더구나 아내가 작년에 죽고 난 후 하나밖에 남지 않는 딸의 안부와 한 번만 보고 죽자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자다가도 꿈에 보이면 일어나 울게 되었다.

- 그렇다면 북한 당국에 정식 신청하면 될 게 아닌가?

=기자 선생이 모르고 하는 말이다. 탈출한 딸을 만나고 싶다고 하면 당에 항명을 하는 셈이다. 강력한 비판을 받고 숙청을 당할 게 뻔한 데 딸을 만나도록 당국에 신청한다는 말이 되는가?

-북한 주민의 전반적인 생활상을 말해 달라.

=평균 임금은 1000원정도 받는다. 이 돈으로는 쌀 한말 구할 수 없는 돈이다. 달걀 1개에 350원 정도 한다. 식당에서 무엇을 사먹거나 식품은 임금을 받은 돈으로는 살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도 평양에 사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굶지 않고 산다. 최근 러시아 중국 한국에서 쌀이 들어오고 있다고 들었다. 미국과의 개선으로 앞으로 경제적으로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게 대부분 인민들의 생각이다.

-북한은 사전에 허락을 받지 않으면 다른 지역에 갈수 없는 걸로 안다. 어떻게 평양서 탈출할 수 있었나?

= 아내의 고향이 함경도이다. 아내는 죽었지만 처남은 함경도에 살고 있다. 처남을 만나겠다고 신청해 통행증을 발급 받은 것이다. 그리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 훈춘으로 탈출했다.

-탈북 당시의 상황을 말해 달라.

=처남을 만났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당으로부터 처남도 무사치 못하게 된다. 그래서 만나지 않고 나진쪽으로 가서 두만강을 건너다 감시자인 국경수비대에 발각되고 말았다. 사정을 해서 간신히 두만강을 건넜고 당시 물이 차가워 지금도 콧병(감기로 추정)과 온몸이 좋지 않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없는가?

=감시자에게 들켰을 때 마지막으로 빌 수밖에 없었다. '네 아비를 생각해다오. 내 소원이 무엇이겠나. 딸만 만나고 오겠다. 죽기 전 소원이다. 나는 당을 버리지 않았다. 네가 나를 쏘면 무엇을 얻겠나?‘라고 사정을 하고 한 참을 은밀히 말하자 ’아바지, 절대 잡히지 말라요. 죽어야 합네다‘라며 말해 나는 자식 같은 초병을 끌어안고 울었다.

-두만강을 건너서는 어떻게 행동했는가?

=거기가 훈춘이라는 곳인데 거기서 20리 길을 걸어서 조선동포가 거주하고 있는 곳을 찾았다. 몸져 누웠더니 그 집에서 먹을 것과 약을 주었고 지금 입고 있는 옷과 50위안을 주어 도로를 따라 걷고 때로는 트럭을 얻어 타고 이동하여 여기까지 왔다.

-중국 공안에게는 들키지 않았는가?

=한 번은 몸이 좋지 않아 옥수수 대만 남아 있는 밭에 들어가 누워 있었는데 자전거를 끌고 온 공안이 어디 사냐고 해서 벙어리 흉내를 내며 돈을 달라는 시늉을 했다. 한참을 그러니까 공안이 빨리 집으로 가라며 돈 10위안을 주었다.

-여기서 딸이 있는 곳까지 꽤 먼 거리다. 어떤 방법으로 가나?

=기자 선생이 도와 달라. 먼저 돈을 좀 달라. 나는 침도 잘 놓기 때문에 가다가 아픈 사람들이 있으면 침도 놓아줘서 먹을 걸 요구하면 된다. 그러나 걸어서는 불가능하다. 늙고 병들어 조금 걸으면 더 이상은 못 간다. 가끔 기차도 탈 계획이다.

-한국에 가고 싶지 않은가?

=남조선에 가고 싶다. 남조선 인민들이 세계 각지에서 우리 민족의 기상을 떨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인민들 대부분이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갈 수 없다. 누가 나 같은 충성을 맹세한 공산당원을 받아 주겠는가? 나는 팔뚝에 ‘200만 노동적위대’라는 칼로 글씨를 써 현재도 남아 있다. 조국에서 날 받아 준다면 다시 돌아갈 것이다.

-당원이면 어떻나? 한국으로 간다면 과거를 묻지 않는 것으로 안다.

=남조선이 아직도 일제 때 일본놈에게 충성하고 조국을 되찾겠다는 독립군과 죄 없는 우리 민족을 핍박하고 죽였던 자들을 처단하지 못했고, 또 조국을 되찾자 그네들은 반성은 커녕 미국에 충성하는 개가 되었지 않았나? 나는 인민을 위한다고 당원이 되어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무슨 얼굴로 인민을 버리겠는가? 


엔트라 08/11/12 [10:27] 수정 삭제  
  잘 봤습소
북한동포들의 소식이 궁금했는데...
같은 동포를 이념과 사상으로 매도하는 정권이 되어선 안되겠죠.
북한도 모든 정책을 개발해 동포들을 굶어죽는 일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요.
기사 잘보고 갑니다.
민족의엔트리 08/11/12 [16:07] 수정 삭제  
  새삼 이념 이나 사상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알수있는 대목 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삶인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인데,
같은 한민족으로써 이리도 가슴 저린 사건이 없어졌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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