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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73)-강제된 양위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2/13 [17:14]

대한정통사(73)-강제된 양위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2/13 [17:14]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 안재세]  일제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아는 광무황제는 밀사사건이 알려진 후 자신을 몰아내려는 일제와 매국노들의 망동이 머지 않았음을 느끼고, 제 멋대로 날뛰는 이등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일제각료들 중에 있으면 그들을 이용해 보려고도 했다.

 

▲ 독일 빌헬름 2세는 고종을 '왕'이 아닌 '황제'로 칭했다     © 편집부

 

그리하여 대한국 궁중에 자주 드나들고 있던 일본인 점장이 반야(飯野:이이노)라는 자를 통해서 이등과 대립하고 있던 일제 군부의 아옥(兒玉:고다마)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약삭빠른 이등은 밀정들을 통해서 그러한 황제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일제정부에 ‘대한국황제의 첩자가 암약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전문을 보내는 등으로 적극 방해하였으므로, 황제의 뜻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생각다 못한 황제는 그동안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박영효에게 밀사를 보내어 귀국을 명했다.

 

   박영효는 비록 서재필과 함께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지만 황제는 그나마 그가 일말의 충성심은 있는 것으로 파악했고, 또한 개혁을 통해 자주독립을 이루려는 애국심이 있으면서도 이등과도 큰 갈등없이 지내고 있는, 외관상 지극히 원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외유내강의 성품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궁내부대신으로 임명하여 앞으로의 대책을 의논하려 한 것이다. 박영효 자신도 일전에 황제에게 어떤 처벌을 받더라도 귀국하려는 의사를 이등에게 토로한 적도 있었으며, 황제의 특명을 받고 박영효가 귀국하려는 것을 알지 못한 이등도 저 나름의 계산으로는 황제의 양위를 권하는데 박영효를 이용하려는 속셈을 은근히 품고 있었다. 그래서 박영효가 단기 4240년(서1907) 6월에 부산에 도착해서 이등에게 먼저 귀국사실을 알리며 ‘나 자신의 의사로 부산에 왔노라’고 전했을 때도 별로 반대의사를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6월 11일에는 황제를 알현하면서,

 

“이번에 박영효가 귀국한 것은 가사정리를 위해서이고, 순전히 자신의 개인의사로 온 것이니 특사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황제는 궁내부대신을 통해서 이등에게 박영효의 귀국은 황제의 명령에 의한 것임을 밝혔고 한 수 더 떠서,

 

“박 영효는 을미사변에 관련된 파렴치한 다른 죄인들과는 질이 다르니, 칙명에 의해서 그를 궁내부대신에 임명하는 방법으로 특사해 줄 것임‥”

 

을 알렸다. 속셈이야 어쨌든 간에 이미 박영효의 귀국을 요청까지 했던 이등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듯한 느낌을 받기는 했으나 묵묵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광무황제와 이등이 각각 상반되는 이유로 박 영효를 이용하려고 작정하고 있는 가운데, 박영효의 귀국은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부산에 도착한 박영효는 즉시 상경하여 황제께서 계신 궁궐문 앞에 엎드려 황제폐하의 단죄를 바란다는 청을 올렸다. 청을 받은 황제는 즉시 ‘처벌이 아닌 특사를 내린다’는 조칙과 함께 '정일품 상보국(上輔國)'에 임명하고 동시에 궁내부대신의 중책까지 내렸다. 박 영효는 새삼스레 무한한 덕망을 지닌 황제에게 감읍하고, 궁궐로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여 무려 4시간 이상이나 군신 간에 마음을 터놓고서 국내외 정세 등에 대하여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그동안 쌓였던 회포를 오랜만에 마음껏 풀고 자주독립을 위하여 군신이 함께 진력할 것을 거듭 다짐했다.

 

   광무황제를 알현할 때 박 영효는 구식의 의관과 망건을 착용하고 취옥(翠玉)으로 꾸미고 있었으므로 황제가 그 내력을 물었다. 이에 박 영효는,

 

“이것은 폐하께서 친히 하사하신 것으로, 신이 외국에 수십년간 있으면서 폐하와 나라를 몹시 사랑하며 그리워하여, 이것을 받들고 기념으로 삼았던 것이옵니다.”

 

하고 답했으니, 왜족의 속성을 이미 샅샅이 알게 된 후로 그가 오히려 자주적인 국정개혁을 위해서 황제와 함께 노력해야만 함을 깨닫고 그 날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황제는 또한 이미 이등의 주구가 되어 버린 친일매국노들을 몹시 꺼려서 박 영효를 끌어 들여 의지하려 했던 것이다.

 

   이등이 박 영효의 귀국에 찬동한 것은 실상은 일본에 망명을 가 있던 ‘진짜 친일파 역적들’도 대거 대한국에 귀국시킴으로써 친일기반을 더욱 다지려고 했던 속셈도 있었으므로, 박 영효가 궁내부대신에 전격 기용되자 광무황제께 우선 망명객중 하나인 친일파 이준용도 귀국시켜 주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이등의 속셈을 간파한 황제는,

 

“짐이 비록 박 영효는 사면했으나 다른 망명자들까지 풀어 줄 의향은 없소.”

 

하고 한마디로 거절의사를 밝혔다. 박 영효의 귀국을 가장 꺼려한 자는 매국적 총리대신 이완용이었으니, 그는 이등이 박 영효의 귀국을 묵인하자 자신의 지위가 불안해짐을 느꼈고, 따라서 더욱 이등에게 충성해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황제양위를 더욱 앞장 서서 추진하려고 벼르게 되었다.

 

   이등 자신도 그렇지 않아도 대한국인들로부터 큰 원망을 듣고 있는 자기가 나서서 양위시킴으로써 대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완용같은 매국역적배들을 뒤에서 조종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하려고 작정하고 있었으므로, 이완용은 더욱 멋대로 활개치면서 황제를 양위시키려고 온갖 술책을 다 부렸고 그러한 이완용을 이등은 더욱 부추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뭇 의기양양해 진 이완용과 그 일파 송병준은 7월 16일에 이등의 지령에 따라서 입궐하여 황제로부터 양위 승락을 받아 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영민한 황제가 이완용등을 오히려 유도 신문하니, 이완용은 ‘통감 이등이 자꾸만 독촉하니 폐하께서 양위해 주시옵소서’라고 발설하고야 말았다. 이에 황제는 흉계를 드러낸 이등과 매국노들에게 크게 격노하여 양위를 단호히 거절하고 매국노들을 물리쳤다.

 

   친일파를 이용한 황제의 양위문제가 벽에 부딪치자 이등은 결국 마각을 드러내어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리하여 7월 18일에 황제를 알현할 기회를 얻은 이등은 헤이그 밀사사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을러댔다. 황제가 그럴 수는 없다고 강경하게 버티자 이등은,

 

“‥폐하께서 뭐라고 하시던 간에 밀사파견은 조약위반인 것이며, 그 책임의 소재 또한 명백합니다. 가령 그 행동이 그들 개인의 의사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대한국인인 이상 대한국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 청국에서 독일인 선교사가 살해되었을 때 독일은 군함을 파견해서 교주만을 점령하지 않았습니까? 국제문제란 그와 같이 중대한 것입니다. 그들 자신의 개인행동이라고 하는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면서 은근히 협박하였다.

 

   그러나 황제로부터 어떤 긍정적 대답도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등은 다시,

 

“밀사를 파견한 행위는 일본에 대한 공공연한 적의의 발표이며 협약(을사늑약)을 위반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선전포고할 권리가 있습니다.”

 

라고 보다 노골적으로 협박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광무황제께서는 여전히 양위문제에 대해서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며, 박 영효 또한 황제께 끝까지 양위하시지 말도록 신신당부를 드렸다.

 

  황제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 이등이 알현을 마치고 물러간 후 밤이 이슥하여, 이등으로부터 그 날중으로 반드시 황제의 승락을 얻어 내 오라는 비밀지령을 받은 이완용 친일내각의 매국노들은 다시 입궐하여 황제께서 양위하실 것을 지겹도록 종용해 대었다. 매국노들이 입궐하자 궁궐문안에까지 일제병력이 침략해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궁궐주위는 일제병력에 의하여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가 되었다. 광무황제는 그러한 사태진전에 놀라 시종무관인 어담을 보내어 침략부대장에게 물러가도록 교섭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침략부대장은 뻔뻔스럽게,

 

“군사령관의 명령에 의하여 궁중을 경호하기 위해서 입궐한 것이므로 나갈 수가 없다.”

 

고 버텼다. 마치 을사늑약때와도 같은 일제의 상투적인 대규모 무력시위였던 것이다. 통감관저가 있는 왜성대앞에도 이미 포병진지가 구축되어 있었고, 침략군의 대포들은 서울 시내를 향해서 포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황제는 침략군사령관인 장곡천에게 병력을 궁성에서 철수하도록 요구했으나, 장곡촌 또한 ‘황궁경호가 나의 임무이며 조약상의 권리’라고 우기면서 전혀 응하지 않았다.

 

   이처럼 일제가 무력시위를 연출하는 가운데 우선 이완용이 양위가 불가피함을 설명하고 나자 송병준은 한 술 더 떠서,

 

“이러한 국난에 처해서 폐하 한 몸으로 헤이그 밀사사건의 전 책임을 지는 것 이외에는 나라를 구할 길이 없사오니,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꼭 양위해 주시옵소서.”

 

하고 강박했다. 그러자 황제는,

 

“헤이그 밀사사건에 짐이 책임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째서 내각관료들에게는 책임이 없고 오직 짐에게만 책임이 있다는 말인가? 이 대역무도한 놈들아, 책임을 지려면 내각에 있는 너희들이나 책임을 지고 총사직해라!”

 

하고 그 온순한 성품에도 크게 역정을 내었다. 그러나 매국노들은 계속하여,

 

“만일 양위하시지 않으시면 내각대신들을 일본사람으로 갈아버리고 폐하를 일본으로 모셔간다고 하오니 진정하시고 양위하시옵소서.”

 

하고 졸라대었다. 이에 황제는,

 

“너희들은 신하라는 것들이 일본의 힘만 믿고서 짐의 양위를 강요하는 데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리고 동궁(황태자)은 병약해서 이러한 국난에 도저히 견디어 낼 수가 없음을 너희들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러니 짐은 절대로 양위할 수 없노라!”

 

하고 강변했으나 이등의 사주를 받은 악착같은 매국노들은 번갈아가면서 황제의 양위를 졸라대었다. 능지처참을 해도 시원치 않을 그러한 매국노들을 더이상 꼴도 보기 싫어진 황제는,

 

“이놈들아, 내가 죽으면 그만 아니냐? 한 번 죽으면 다시 또 죽지 않는다!”

하고 역정내고 어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당황한 친일매국노들이 이등에게 연락하여 방도를 물으니 이등은 ‘어쨌든 오늘 중으로 양위허락을 받아 내라’고 강경하게 지령을 내렸다. 그러자 매국노들은 다시 어전회의를 황제와 대신들에게 강요하여 또 양위를 졸라대었다. 마침내 분통한 마음과 피로에 지친 황제는,

 

“너희들은 언제까지 나를 강박할 것인가? 너희들 멋대로 일을 꾸밀 진대 짐에게 물어서 무엇하려는 것이냐?”

 

하고 돌아섰다. 그러자 그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철면피 친일매국노들은,

 

“그러하오시면 윤허하신 줄로 알겠사옵니다.”

 

하고는 곧 ‘황태자로 하여금 황제를 대리케 한다’는 윤허의 조칙을 내리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심신이 피로할 대로 피로했으나 황제는 조칙에 어디까지나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한다는 문구를 사용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니, 거기에는 곧 ‘지금은 부득이 황제의 자리를 잠시 황태자에게 맡기지만 언제건 기회닿는 대로 다시 황제로서의 위치를 되찾을 것이다’라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황제의 조칙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아! 내가 역대 임금들의 크나큰 위업을 이어받아 지켜온 지 지금 44년이다. 여러 차례 많은 난리를 겪으면서 다스림이 뜻대로 되지 않아‥백성들의 운명의 고달픔과 나라가 걷는 길의 위태로움이 지금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다. 위구심은 마치 엷은 얼음장을 건너는 듯하다.

 

   다행히 황태자의 덕스런 기량을 하늘이 주어 훌륭한 명성이 일찍부터 드러났다‥내가 가만히 생각하니 고달프고 괴로워 황위를 물려주는 것은 원래 역대에 이미 행한 예가 있고, 우리 선대 임금들의 훌륭한 예는 마땅히 바르게 이어받아 행해야 한다. 내가 지금 군국대사(軍國大事)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하려 하노니, 의식절차는 궁내부 장례원에서 마련하여 거행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 광무황제를 아예 퇴위시키려고 작심하고 있던 악착같은 매국역적들은 황제가 강조한 ‘대리’ 조항을 저들 멋대로 고쳐서, 궁내부대신 박 영효도 모르게 일왕 및 외국사신들 모두에게 ‘황제폐하께서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인하여 인책 퇴위하셨다’고 왜곡하여 전달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뜻밖의 희소식을 들은 일왕은 물론이고, 각 나라의 사신들도 모두 다 광무황제께서 양위하고 새 황제가 등극한 것으로 알고 새 황제에게 축전을 보내고 축하올리러 찾아가는 등으로 황당한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박 영효는 이완용내각에 대한 문책안을 제출했으나 매국친일파들은 오히려 이등과 짜고 박 영효를 몰아내는 한편, 광무황제를 더욱 강박해서 헤이그밀사들에 대한 엄벌을 내리는 조칙까지도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광무황제는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가는 듯한 절망감에 단지 홀로 통탄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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