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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7만년-197] 단군조선 군후국(君侯國)의 역사 20

소위 서언왕의 나라 서국(徐國)의 흥망 2 -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3/13 [04:54]

[홍익인간 7만년-197] 단군조선 군후국(君侯國)의 역사 20

소위 서언왕의 나라 서국(徐國)의 흥망 2 -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3/13 [04:54]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 천산태백]

 

1. 서국(徐國)의 출현

 

단군조선 23대 아홀(阿忽) 천왕 때인 서기전1236년 을유년(乙酉年)에 남국군(藍國君) 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殷)나라를 정벌하며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고, 포고씨(蒲古氏)를 엄(淹), 영고씨(盈古氏)를 서(徐), 방고씨(邦古氏)를 회(淮) 땅에 각각 봉하였다.<檀君世紀 참조>

 

서기전1236년은 단군조선 23대 아홀 천왕(서기전1237년~서기전1162년)의 2년이 되는 해이며, 은(殷)나라의 제24대왕 조갑(祖甲:서기전1259년~서기전1226년))의 24년이 되는 해가 된다.

 

남국(藍國)은 산동지역의 남중부지역에, 청구(靑邱)는 산동반도를 포함한 산동지역의 중북부지역에 위치하였고, 구려(句麗)는 번조선(番朝鮮)의 북쪽 지역에 소재하였으며, 구려의 서남쪽에는 고죽국(孤竹國)이 위치하고 구려의 서북쪽에는 몽고리(蒙古里)가 있었다. 구려의 서쪽, 몽고리의 남쪽, 고죽국의 북서쪽에는 선비(鮮卑)가 있었다. 선비의 남쪽에는 흉노(匈奴)가 있었다.

 

단군왕검은 서기전2333년경 남국(藍國)에 치우천왕의 후손이 되는 치두남(蚩頭男)을 봉하였고, 청구(靑邱)에 고시씨(高矢氏)의 후손을 봉하였으며, 구려(句麗)에는 둘째 아들인 부소(扶蘇)를 봉하였다. 이들 모두 천군국(天君國)에 해당하며, 천후국(天侯國)의 하나인 천자국(天子國)보다 훨씬 윗 단계의 봉작(封爵)이 된다. 즉 일반제후의 순으로 보면 군(君),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순서가 되고 여기에 각 천(天)자를 붙이면,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순서가 되는 것이다.

 

몽고리(蒙古里)는 단군조선 제4대 오사구(烏斯丘) 천왕이 서기전2137년 아우 오사달(烏斯達)을 한(汗)으로 봉한 나라이다. 천군국(天君國)이 된다.

 

서국(徐國)의 시조는 영고씨(盈古氏)가 된다. 서국(徐國)의 위치는 대체적으로 지금의 산동반도 내륙의 남쪽에 있는 서주(徐州) 지역이 될 것인데, 회대(淮岱)지역의 남북으로 보아 중간에 해당하는 땅, 즉 중토(中土)가 된다.

 

회대(淮岱)의 땅은 동이(東夷)의 근거지로서 동이(東夷)에 속하는 남이(藍夷. 엄이, 서이, 회이를 포함)가 주로 차지하였다. 회대지역은 산동지역의 대산(岱山=泰山=岱宗)에서 회수(淮水)까지 이르는 지역이다. 회수의 남쪽에는 양자강이 있고 양자강 유역에서 남해안에 이르기까지 적이(赤夷=南蠻)의 땅이 된다. 물론 청구(靑邱) 지역은 황이(黃夷)지역이 된다. 그리하여 회대(淮岱) 지역에는 통틀어 동이(東夷)라고 불리는 남이(藍夷)와 황이(黃夷)가 있었고, 여기에 양자강 유역의 적이(赤夷)도 일부 혼합되어 있었다고 보인다.

 

엄국, 서국, 회국은 고대중국의 역사기록에서 엄이(淹夷), 서이(徐夷), 회이(淮夷)로 불리기도 하였다. 모두 천후국(天侯國)에 해당하는 나라로서 족속으로는 주로 남이(藍夷)의 무리가 된다.

 

고대중국의 기록에서는, 서기전1199년부터 서기전1195년 사이에 "무을(武乙) 이 쇠하고 동이(東夷)가 번성하였는데, 드디어 회대(淮岱)의 땅으로 나누어 옮겨가서 중토(中土. 가운데 땅)를 점거하였다"라고 적고 있다.<後漢書 東夷列傳 참조>

 

역사기록으로 보면, 서기전1199년경에 해당하는 시기에 동이(東夷)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이 된다. 즉, 이때는 서이(西夷) 세력이 서서히 등장하는 시기로서 주(周)나라를 염두에 두고 은(殷)나라의 동쪽을 동이(東夷)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된다. 서이(西夷)의 나라인 주(周)나라가 중화(中華), 중국(中國)으로 스스로 부르면서 단군조선의 본국을 동이(東夷)로 부르게 되는 것이다. 즉, 서기전1199년경부터 단군조선을 동이(東夷)라고 기록하면서 서이(西夷)의 나라인 주(周)나라는 중화(中華), 중국(中國)으로 기록된다.

 

춘추전국시대 중화주의(中華主義) 학자들이 주(周)나라를 찬양하면서, 서이(西夷) 세력을 주축으로 한 사이(四夷)의 나라인 중화(中華)와, 구이(九夷)의 나라인 단군조선을 사방으로 나누어 그 본국이 되는 삼한(三韓) 즉 진한(眞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을 동이(東夷)라 부르게 된 것이다. 동이(東夷) 외 구이(九夷)에 속하는 이족(夷族)으로서 주(周)나라 서쪽은 서융(西戎), 남쪽은 남만(南蠻), 북쪽은 북적(北狄)으로 나누어 불렀다. 서융은 주(周)나라에 복속하지 아니한 서이(西夷=白夷)의 무리이고, 남만은 적이(赤夷), 북적은 황이(黃夷)이다.

 

무을(武乙)은 은(殷)나라 제27대 왕으로서 무도(無道)한 자였으며 서기전1199년부터 서기전1195년 사이에 재위하였는데, 이때 동이에 속하는 엄(淹), 서(徐), 회(淮) 등이 회대(淮岱) 사이의 땅을 차지하였다는 것이다. 즉, 서기전1236년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봉해졌던 엄국(淹國), 서국(徐國), 회국(淮國)이 은나라 말기가 되는 서기전1197년경에 에 산동의 태산지역에서 남쪽으로 회수지역에 걸쳐 땅을 확고히 차지하였다는 것이 된다.

 

또, 고대중국 기록에, “무을(武乙) 3년(서기전1197)경에 무을이 쇠하게 되자, 동이(東夷)의 침범이 잦아지고, 드디어 회대(淮岱)의 땅으로 나누어 옮겨가서 중토(中土. 가운데 땅)에 머무니 소위 서이(徐夷)가 이들이다."<博物志>

 

여기서는 서이(徐夷)가 회대(淮岱)의 땅 중에서 중간에 해당하는 곳을 차지하였다고 기록한 것이 된다. 서국 즉 서이의 땅은 태산과 회수 사이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이 되는데, 이를 두고 중토(中土)라고 적은 것이 된다. 또, 서이(徐夷)가 곧 동이(東夷)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동이(東夷) 중에서 특히 서이(徐夷)가 회대지역에서 번성하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고대중국의 기록에서 구이(九夷)의 일부 명칭으로 풍이(風夷), 황이(黃夷), 우이(于夷), 견이(畎夷), 방이(方夷), 남이(藍夷), 서이(徐夷) 등이 나타나는데, 모두 단군조선의 백성들로서, 황이, 우이, 견이, 방이는 황이(黃夷)에 속하는 동이(東夷)이며, 풍이, 남이, 서이(徐夷)는 황이(黃夷) 또는 남이(藍夷)에 속하는 동이(東夷)가 된다.

 

단군조선은 서기전2333년 10월 3일 단군왕검이 구이(九夷)의 추대로 임금이 되어 건국되었고, 특히 고대중국 내륙의 동쪽에 있던 남이(藍夷. 일명 風夷), 서이(徐夷)는 주(周)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동이(東夷)이며, 서쪽에 있던 이족(夷族)들은 서이(西夷)이고, 황이(黃夷)의 일파인 견이(畎夷)가 서이(西夷) 근처에 분포되어 있었다.

 

단군조선의 중앙조정의 나라인 진한(眞韓, 眞朝鮮)은 특히 현이(玄夷. 玄은 북쪽을 의미)라고 오월춘추(吳越春秋)에 적고 있기도 한데, 이때의 현이는 단군조선 9족에 해당하는, 흑수(黑水) 즉 흑룡강 유역에 거주하던 현족(玄族)이 아니라, 단군조선 본국조정(本國朝廷)의 진한(眞韓)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구이(九夷)는 곧 구한(九桓)으로 구족(九族)이며, 옛 한국(桓國) 및 배달나라(檀國)의 구성 부족으로서, 실질적인 중국의 시조가 되는 황제헌원(黃帝軒轅) 때인 서기전2698년경부터 요(堯), 순(舜), 하(夏), 은(殷)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고대중국의 주위는 물론 파미르고원의 동쪽으로 동해(東海)까지 퍼져 살고 있던 단군조선의 아홉 부족인 것이다.

 

다만, 단군왕검이 구려분정(九黎分政)을 실시하였다라고 할 때의 구려(九黎)는 산동지역에서 회수지역에 걸치는 회대(淮岱)지역의 내륙동이(內陸東夷)인 내륙8이(夷) 또는 내륙9이(夷)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단군조선 전체의 9족(族), 구이(九夷)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회대(淮岱)지역의 구려분정(九黎分政) 실시는 순(舜)임금 때인 서기전2267년경이 되는데, 이때 순(舜)임금의 나라인 우(虞)의 동쪽에 있던 회대(淮岱) 지역의 단군조선 제후국들을 천자(天子) 순(舜)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던 것이며, 서기전2247년 이후인 순임금의 말기에 이르러 순임금 스스로 이들 제후국들을 침범하여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남국(藍國)의 인근에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함부로 설치함으로써 단군조선을 반역하였다가, 결국 단군조선의 군사와 순(舜)의 직속 신하인 우(禹)의 군사의 합공(合攻)으로 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단군조선의 가르침으로 치수(治水)에 성공하고 순(舜)임금을 제거하는 데 공(功)을 세운, 하(夏)나라 시조가 된 우(禹)는 처음에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명령을 따랐으나, 권력욕에 눈이 멀어 순을 죽인 후 천자자리가 탐이나 결국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스스로 하왕이라 칭하고 독단을 차렸던 것이며, 단군조선의 봉국(封國)제도를 흉내내어 마음대로 제후를 봉하여 조공을 받는 등 폭돌한 정치를 펼쳤던 것이다.

 

서기전1236년에 세워진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서국(徐國, 徐夷)의 땅은 요순시대와 하나라 및 은나라 시대에는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이던 남국(藍國)의 땅에 속하였다가, 중도에 남국(藍國)의 세력이 쇠퇴하여 그 영역이 축소되었던 것이 되는데, 서기전1236년에 다시 남국(藍國)이 부흥(復興)하여 은(殷)나라를 정벌하고 회대지역을 평정하였던 것이며, 이에 단군조선이 그 땅에 회대지역의 북쪽인 태산(泰山)지역으로부터 회수(淮水)지역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엄국(淹國), 서국(徐國), 회국(淮國)을 봉했던 것이 된다. 서국(徐國)은 회대(淮岱)지역의 남북으로 나누어 보면 중부(中部)에 해당되어 그 중간 지역으로서 중토(中土)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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