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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7만년 -198] 단군조선 군후국(君侯國)의 역사 21

소위 서언왕의 나라 서국(徐國)의 흥망 3 - 2. 서국(徐國)의 전성시대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3/15 [11:36]

[홍익인간 7만년 -198] 단군조선 군후국(君侯國)의 역사 21

소위 서언왕의 나라 서국(徐國)의 흥망 3 - 2. 서국(徐國)의 전성시대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3/15 [11:36]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 천산태백] 주(周)나라는 원래 은나라의 서쪽에 있던 제후국으로서 서이(西夷)이고, 견이(畎夷), 서융(西戎), 여(黎) 등의 근처에 있었다. 서융은 서이 중에서 나중에 주(周)나라에 복속하지 아니한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견이를 견융(畎戎)이라고도 한다.

 

중국기록에서 서이(西夷)에는 지용(之踊), 촉(蜀), 강(羌), 미(微), 노(盧), 팽(彭) 등을 들고 있는데<竹書紀年 참조>, 이들 나라는 중원(中原)의 서편에 있었고 주(周)나라를 도운 서이의 주축세력이 된다.

 

견이(畎夷)는 황이(黃夷) 중의 일파로서 주로 삼위산(三危山)에서 서안(西安)에 걸쳐 살던 한배달조선의 백성으로서, 배달나라 때인 서기전3897년경에 반고(盤固)가 가한(可汗)이 되어 다스렸다. 견이의 후예가 돌궐이며 지금의 터키가 된다.

 

서융(西戎)은 주(周)나라가 스스로 중화(中華)라고 자칭할 때 서이(西夷)를 격하시킨 말이며, 역사적으로는 한배달조선의 구족(九族)의 하나에 속하는 백족(白族) 즉 백이(白夷)를 다르게 부르는 명칭이 된다.

 

여(黎)라는 나라는 서기전1266년에 여파달(黎巴達)이 서이(西夷)의 땅인 빈기(邠岐)의 땅에 봉해진 나라이다.

 

중국기록에서는, 서기전1116년 "무왕(武王)이 붕하니 삼감(三監)과 회이(淮夷)가 배반하였고 주공(周公)이 정벌하였다<尙書, 후한서 동이열전 참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서기전1116년은 주나라 무왕(서기전1134년 서백~서기전1122년 무왕~서기전1116년)의 7년이 되는 해인데, 무왕이 죽자 주무왕의 아우이던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의 삼감(三監)이 회이(淮夷)와 모의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며, 이를 주공이 진압하였다는 것이다.

 

삼감(三監)은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무왕(周武王)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아들인 왕자 무경(武庚)을 녹보(綠父)로 봉하고 은(殷)이라는 땅에 봉하여 은나라 유민을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이때 은나라 수도지역의 땅을 세 지역으로 나누어 아우인 관숙, 채숙, 곽숙을 봉하여 통치하면서 은의 왕 무경을 감시하도록 하였는 바, 이들 삼인을 삼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된다.

 

여기서 삼감과 함께 난을 일으킨 회이(淮夷)는 당시 서이(徐夷), 엄이(奄夷), 회이(淮夷) 등의 동이세력의 대표적인 예로 기록한 것이 된다.

 

주무왕이 죽고 성왕(成王)이 서기전1116년에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주공(周公)이 섭정을 하게 되었고 이에 주공의 형제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는데, 여기 반란을 일으킨 형제들이 곧 관숙, 채숙, 곽숙인 삼감(三監)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틈에 은(殷)나라의 무경(武庚)이 동이(東夷) 세력인 서(徐), 엄(奄), 영(盈), 웅(熊), 박고(薄姑) 등과 연합하여 대규모 무장반란을 일으켜 신생국가인 주(周)나라를 전복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회이(淮夷)는 곧 서기전1236년에 회대지역의 남쪽이 되는 회수지역에 봉해진 단군조선의 회국(淮國)을 가리키는 것이며, 서(徐)는 회국과 함께 서기전1236년에 회대지역의 중간지역에 봉해진 서국(徐國)으로서 서이(徐夷)인 것이고, 엄(奄)도 회국과 서국과 함께 서기전1236년에 회대지역의 북쪽이 되는 태산지역에 봉해진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엄국(淹國)으로서 엄이(奄夷)인 것이다.

 

그 외 영(盈), 웅(熊), 박고(薄姑) 등의 나라는 엄, 서, 회 외의 동이족의 나라로 은나라의 무경(武庚)에게 동조한 세력이 된다.

 

주공(周公)은 무왕의 아우인 주공 단(旦)을 가리키며, 은(殷)의 무경(武庚)과 삼감(三監)과 동이세력의 반란을 진압하여, 무경(武庚)과 관숙(管叔)을 죽이고, 채숙(蔡叔)은 귀양 보낸 뒤, 무경이 다스리던 땅은 주무왕의 아우인 강숙(康叔)에게 주어 위(衛)나라 제후로 봉하여 은나라 유민을 통치하게 하였던 것이다.

 

주나라 무왕이 사망하니 동이세력이 들고 일어났다는 것에서 고대중국의 하은주(夏殷周) 나라의 주변에 있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구이의 무리들이 항상 하은주를 견제하고 간섭하고 정벌하곤 하였던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특히 폭군이나 정치를 잘 못하거나 왕도에 어긋나는 경우에 동이세력은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간섭하였다. 이를 중국입장에서는 배반이니 반란이니 도적질을 하였느니 하면서 와전하여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주공이 성왕을 대리하는 섭정을 하게 도(道)에 어긋나는 것이라 여기고 동이세력이 삼감과 은의 무경에게 힘을 실어 준 것이 된다.

 

중국의 기록은 "중국이 예의를 잃으면 사이(四夷)에서 예의를 구했다 하거나, 천자(天子)가 자리를 잃으면 사이(四夷)에서 배웠다" 하는 등 하면서 사이(四夷)를 칭송하다가, 돌변하여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등으로 격하시키거나, 배반이니 반란이니 도적질이니 하는 등 하면서 도덕군자를 하루아침에 도둑으로 모는 이율배반적인 기록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또 중국기록에서, 주나라 제2대 성왕(成王, 서기전1115년~서기전1079년) 시대에, "관(管)과 채(蔡)가 주나라를 배반하여 이적(夷狄)을 불러들이니 주공(周公)이 정벌하고 드디어 동이(東夷)를 평정하였다<후한서 동이열전 참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이적(夷狄)은 동이(東夷)와 북적(北狄)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 동이는 중국내륙의 동이로서, 회이(淮夷), 서이(徐夷), 엄이(奄夷), 영(盈), 웅(熊), 박고(薄姑) 등의 단군조선 자치제후국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주(周)나라 북쪽의 고죽국 넘어 동북에 있는 동이는 단군조선 본국(진한, 마한, 번한)이다. 또 여기서 북적(北狄)은 주(周)나라의 북쪽에 위치한 동이세력으로서 대표적으로 은나라 무경(武庚) 등의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또 중국기록에서 “성왕(成王)이 관숙과 채숙을 정벌하고 회이(淮夷)를 멸하였다<상서, 후한서 동이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관숙과 채숙을 정벌하고 회이를 멸하였다는 것은 사실적 역사에는 어긋나는 부정확한 기록이 되는데, 성왕의 명을 받은 주공(周公) 단(旦)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반란을 진압하였던 것이며, 무경과 관숙은 죽이고 채숙은 귀양을 보냈으며, 회이는 멸(滅)한 것이 아니라 패퇴시킨 것이 된다.

 

회이(淮夷)는 이후에도 서기전221년까지 존속한 나라이다. 중국기록에서 서기전878년과 서기전828년 사이에 여왕(厲王)이 무도(無道)하여 회이(淮夷)가 들어와 도적질을 하였고 소공(召公)이 이를 정벌하였다고 하고, 서기전221년 진(秦)나라가 육국을 멸하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라고 기록되는 바, 주나라 성왕 시대에 회이(淮夷)가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라 이후 계속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또 중국기록에서, "강왕(康王:서기전1078년~1053년) 때에 숙신(肅愼)이 다시 왔고, 뒤에 서이(徐夷)가 왕을 참칭하고 구이(九夷)를 이끌고 종주(宗周)를 정벌하여 서쪽으로 하상(河上)에 이르렀다<후한서 동이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강왕의 뒤에 서이(徐夷)가 왕을 참칭하고 구이(九夷)를 이끌고서 종주(宗周)를 정벌하여 서쪽으로 하상(河上)에 이르렀다라고 하는 기록이, 곧 서이(徐夷) 즉 서국(徐國)의 전성기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강왕은 주나라 제3대왕이며, 강왕의 뒤는 제4대 소왕(昭王:서기전1053년~서기전1002년)과 제5대 목왕(穆王:서기전1002년~서기전947년) 등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이 기록은 특히 목왕 때 서국의 언왕(偃王)이, 종주(宗周) 즉 주(周)나라 천자국(天子國)을 쳐서 36국(國)을 거느린 동방(東方)의 맹주가 되어 대국(大國)이 되었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서이(徐夷)는 서기전1236년에 세워진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 천후국(天侯國)이 되는데, 왕(王)이라 칭하였다는 것은 군사를 일으켜 정벌활동을 하였다는 것을 가리키며, 주(周)나라의 제후가 아니라 천자국 주(周)나라와 대등한 왕국(王國)임을 나타낸 것이 된다.

 

이리하여 중국기록에서 주(周)나라 시대에 종주(宗周)의 천자(天子) 외에 천자(天子) 즉 왕(王)이라고 칭한 나라로서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되는 나라가 서기전990년경에 전성기를 누렸던 나라로서, 곧 산동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서이(徐夷) 즉 서국(徐國)인 것이다. 이후 약100년이 지난 서기전890년경에 초나라가 왕을 칭한 것으로 기록되기도 하며 서기전741년에 초나라 웅거(熊渠)가 왕을 칭하였다고 기록된다. 

 

여기서 하상(河上)은 황하를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서이(徐夷)는 산동지역의 중남부에 있던 나라로서 북쪽 또는 북서쪽으로 진격하여 황하에 이르렀다는 것이 되고, 그 영토가 500리에 달하였다라고 적히는 것이 되는데, 반경500리에 해당되고 직경으로는 1,000리에 달하는 나라로서 군국(君國) 이상의 일반 왕국(王國)에 버금가는나라로서 주(周)나라와 종주(宗主)를 다투었던 것이 된다.

 

종주(宗周)는 주나라의 제후국이 아닌 주나라 본국(本國)을 가리킨다. 종주(宗周)라고 적은 이유가 단순히 주(周)나라가 천자국(天子國)으로서 제후국을 거느린 나라임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으나, 서이(徐夷)의 상국(上國)임을 은연 중에 과장하여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서국(徐國) 즉 서이(徐夷)는 단군조선이 봉한 제후국이다. 서이의 나라와 주나라는 대등한 천하 왕국으로서 천후국(天侯國) 또는 천자국(天子國)이므로, 종주(宗周)라는 말은 주(周)나라가 봉한 제후국의 주(主)인 주나라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여기서 구이(九夷)는 단군조선의 구족(九族)이 되는 구이(九夷)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서국(徐國)의 주변에 있던 구이(九夷)로서 내륙의 동이(東夷)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원래 단군조선의 구이(九夷)는 황이(黃夷), 백이(白夷), 남이(藍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양이(陽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견이(畎夷) 등의 단군조선의 구족(九族)을 가리킨다. 서이(徐夷)가 구이의 군사를 이끌고서 주나라를 쳤다는 그 구이(九夷)는 내륙의 동이(東夷)로서 회대지역에 산재한 수많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을 가리키는 것이며, 여기에는 엄이(淹夷), 남이(藍夷), 서이(徐夷), 회이(淮夷), 래이(萊夷), 개이(介夷), 양이(陽夷), 우이(隅夷), 사이(沙夷) 등의 동이세력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또, 중국기록에서, "목왕(穆王:서기전1001년~서기전947년)이 두려워하여 동방의 제후를 나누어 서언왕(徐偃王)을 주인으로 섬기도록 명하였으며, 서언왕은 인의를 행하니 육지의 나라로서 알현한 곳이 36국이다<후한서 동이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주나라 목왕은 제5대왕이며,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방세력의 맹주(孟主)로 인정하여 주나라 제후국들까지 서국에 속하도록 하였던 것이 되며, 이때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국이나 되었던 것이 된다. 즉 목왕이 동방의 제후국들을 빼앗기는 등으로 36국이 서언왕에게 복속한 것을, 마치 주나라가 종주(宗主)로서 서국(徐國)에게 허락한 것처럼 윤색하여 기록한 것이 된다.

 

이 36국 안에는 동이세력도 있었지만,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되는 산동지역의 제(齊), 산동지역의 태산 서쪽의 노(魯), 하남성의 송(宋), 하남성의 채(蔡), 상동지역의 조(曹), 하남성의 정(鄭), 하남성의 위(衛), 하남성의 진(陳) 등 주나라 서울의 동쪽에 있던 동방(東方)의 나라들을 포함한 36국(國)이 서국(徐國)에 조공을 바친 것이 된다.

 

주나라 목왕(穆王) 시절은 서국(徐國)이 봉해진 지 약 230년 이상 지난 때로서 1대를 약 30년으로 계산하면, 시조 영고씨(寧古氏)로부터 약 8대를 지나 서언왕(徐偃王)이 출현한 것이 된다. 이후 약 10대가 지나는 시기로 약 300년이 흐른 서기전680년경 서언왕의 약10대 후의 왕이 초(楚)나라 문왕(文王)에게 패하여 수도를 함락당하면서 서산(徐山)으로 수도를 옮기고 축소되었던 것이 된다.

 

또, 중국기록에서, “여왕(厲王:서기전878년~서기전828년)이 무도(無道)하여 회이(淮夷)가 들어와 도적질을 하였으며, 소공(召公)이 이를 정벌하였다<후한서 동이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이 기록은 회이(淮夷)가 주(周)나라 성왕(成王) 때 멸망한 것이 아니라, 존속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체적으로 고대중국의 구이(九夷)나 동이(東夷)에 관한 기록은 곧이 곧대로 믿을 바가 못되며, 구체적으로 살펴 분석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 된다.

 

주나라 제10대왕인 여왕(厲王)이 도(道)에 어긋나는 짓을 하므로 회이(淮夷)가 군사력으로 간섭한 것이 된다. 즉 기록을 보면 하(夏)나라 이후 계속적으로 주변의 이족(夷族,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 하은주(夏殷周) 나라를 견제(牽制)하고 통제(統制)하거나, 정치에 간섭하거나 정벌(征伐)하기도 하였던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중국기록에, 유왕(幽王:서기전781년~서기전771넌)이 음란하자 사이(四夷)가 번갈아 가며 침범하였으며, 제환공(薺桓公)에 이르러 패업을 이루어 이를 물리쳤고,  초나라 영왕(靈王)이 신(申)에서 회합하니 역시 회맹에 동참하였으니 초영왕(楚靈王), 채후(蔡侯), 진후(陳侯), 정백(鄭伯), 허남(許男), 회이(淮夷)이다<후한서 동이열전, 좌전 참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주(西周)시대의 마지막 제12대왕인 유왕(幽王)이 음란하여 도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등 정치를 잘못 하자, 주나라 주변에 있던 사이(四夷)가 정치에 간섭한 것이 되며, 단순히 땅을 욕심낸 침범이 아니라고 보인다.

 

여기서 사이(四夷)는 주나라 주변의 동서남북에 둘러싼 사이가 아니라, 주나라 동쪽 중국내륙의 회대(淮岱)지역에 있던 4이(夷)로 보인다. 기록으로 보아 회이(淮夷), 사이(泗夷), 서이(徐夷), 사이(沙夷)로 추정된다. 사이(沙夷)는 사수(沙水) 지역의 나라가 되고, 사수(沙水)는 회수(淮水)의 지류로서 하류쪽에 있으며 북에서 남으로 회수에 합류하는 강이다.

 

한편, 양자강 유역의 섬지역에 살던 이족을 도이(島夷)라고 하는데, 도이는 남이(藍夷)나 적이(赤夷)의 무리가 된다. 남이(藍夷)는 대체적으로 동이(東夷)로 불리며, 적이(赤夷)는 양자강 남쪽에 사는 족속으로서 주나라 춘추전국 시대 이후로 남만(南蠻)이라 불린다.

 

서기전690년에 제(齊)나라 양공(襄公)이 기(紀)국을 멸망시켰는데, 이 기국(紀國)은 산동지역의 동이족 국가로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것이다.

 

제환공(薺桓公:서기전685년~서기전643년)이 서기전679년부터 패업을 이루어 주(周)나라를 대신하여 종주(宗周)를 침공하였던 사이(四夷)를 물리쳤던 것이라 적은 것이며, 초나라 영왕(靈王:서기전541년~서기전530년)은 제환공보다 약130년 후의 인물인 바, 초영왕이 개최한 신(申) 땅의 회합(會合)에 초영왕(楚靈王), 채후(蔡侯), 진후(陳侯), 정백(鄭伯), 허남(許男), 회이(淮夷)가 참석하였다라고 하여, 특히 사이(四夷) 중의 회이(淮夷)가 주나라의 제후국인 초(楚)나라에 복종한 것으로 강조한 것이 된다.

 

여기서, 채후(蔡侯)와 진후(陳侯)는 후작(侯爵)인 제후이며, 정백(鄭伯)은 백작(伯爵)인 제후이고, 허남(許男)은 남작(男爵)인 제후로서 모두 천자국(天子國)인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되며, 회이(淮夷)는 동이(東夷)의 나라로서 단군조선 천왕국(天王國)의 제후국인 천후국(天侯國)이 된다.

 

한편, 서기전632년에 거(莒)나라와 주(邾)나라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산동지역에 있던 동이족 국가가 된다. 거나라는 서기전551년까지도 존속한 것으로 기록된다.

 

또, 서기전567년에 제(齊)나라가 래이(萊夷)를 멸망시켰다 하는 바, 래이(萊夷)는 산동지역에 존재하던 동이족 국가이며, 고죽국(孤竹國)의 후신(後身)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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