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어디인가?

현 요녕성 요하 동쪽은 고구려 때의 요동이 아니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9/03/31 [13:19]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어디인가?

현 요녕성 요하 동쪽은 고구려 때의 요동이 아니다.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9/03/31 [13:19]
본 글은 장문이라 아래와 같이 3부작으로 게재됩니다.

(1) 식민사학계의 잘못된 이론과 민족사학자의 이론
(2) 민족사학을 사칭하는 역사동호인들의 엉터리 이론
(3) 요동.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현 산서성 분하

이번에는 우리 고대사의 핵심 중의 하나인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독자들께서는 이번 기회를 통하여 이 기준 하나만이라도 확실히 알게 된다면,  왜 중국과 일제가 우리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그토록 혈안이 되었는지를 쉽게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여 20만권의 사서를 불사르고 <조선사 35권>이라는 새로운 역사 이론을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   일제가 우리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저지른 만행을 폭로하는 신문기사
 
식민사학계의 요동.요서의 구분은 현 요녕성 요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구분하는 기준은 현 요녕성 요하(遼河)로, 요하 서쪽을 요서라 하고 요하 동쪽을 요동으로 한다고 학교에서 배워서 알고 있다.  이 이론은 중국과 일제의 이론을 무조건 추종하는 우리나라 사학계의 정론(正論)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고구려는 현 요하 동쪽 즉 요동(만주)에 있던 나라로, 유리왕 때 도읍인 국내성은 길림성 집안에 있고, 장수왕이 남진정책으로 대동강 평양에 있는 평양성으로 천도한 것으로 교과서로부터 배운 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민족정신을 갉아먹고 있는 식민사학계의 반도사관의 기본 틀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 KBS 역사스페셜에서도 요동과 요서의 구분을 현 요녕성 요하로 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식민사학계의 이론을 충실히 반영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중국과 일제와 이 나라 식민사학계가 비정한 압록수는 현 압록강이며 서안평은 단동, 그 유명한 안시성과 요동성은 요하 근방, 비사성은 요녕성 대련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명 비정은 조작된 것이라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과연 그런지 신당서 동이열전과 한서지리지의 일부 기록을 보기로 하자. 

대요수와 소요수가 있는데 대요수는 말갈의 서쪽 남산에서 시작되고 남으로 안시성으로 흐른다; 소요수는 요산 서쪽에서 시작되는데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량수는 요새 밖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흐르다 합쳐진다. (水有大辽、少辽:大辽出靺鞨西南山,南历安市城;少辽出辽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与之合)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커다란 배로 사람을 건네고 믿음직한 참호 역할을 하고 있다. (有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鸭头,号鸭渌水,历国内城西,与盐难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而平壤在鸭渌东南,以巨舻济人,因恃以为堑)

한서지리지 : 마자수는 서북에서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2개 군을 거쳐 길이는 2,100리이다. (漢書地理誌: 马訾水西北入盐难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天一百里)

위의 기록과 현재의 지명을 비교하면 뭔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 차이점을 간단히 아래와 같이 정리를 해보았다.
1. 위 기록에 따르면, 대요수나 마자수나 거의 같은 지역을 흐르는 강으로 보인다.
2. 마자수(압록수)가 현 압록강이 되면, 압록강 하구인 단동은 서안평이 되며 안시성과 평양성 국내성이 모두 압록수 동쪽에 위치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재의 안시성은 요하 근처로 압록강과 전혀 관련이 없으며, 현재의 국내성은 길림성 집안으로 압록강 북쪽이고, 현재의 평양성은 압록강과 역시 관련이 없는 대동강변에 있다. 결국 이는 무엇을 의미함인가? 한마디로 지명 비정이 잘못되어 있다. 즉 지명조작으로 역사왜곡이 되어있다는 뜻인 것이다.

현 식민사학계의 지리비정이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을 하면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신당서나 한서지리지는 이미 한족 학자들에 의해 상당 부분 왜곡이 되어 있어 그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엉뚱한 소리를 한다. 그 중요한 신당서나 한서지리지가 왜곡이 되었다고 믿을 수 없다면 도대체 어느 사서의 기록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편찬한 <조선사 35권>의 역사만 믿는단 말인가? 모든 사서의 기록은 설사 가필과 왜곡이 되었더라도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왜곡이 된 부분이 있다면 무조건 전부를 부정하려고 하지 말고 무엇이 왜곡된 것인지 찾아내는 것이 학자의 본분이며 도리가 아니겠는가!!!

필자의 견해로는 분명 위 신당서 동이열전과 한서지리지의 기록은 절대 왜곡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압록수를 현 압록강으로 놓고 보면 위 기록이 잘못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이나, 압록수를 산서성 분하로 가져다 놓고 비정하면 희한하게도 위 기록은 100%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결론을 내리자면, 고대의 압록수는 현 산서성 분하이며, 바다는 현 황하이고, 서안평은 황하와 분하가 만나는 산서성 하진시, 안시성은 분하(압록수) 북쪽에 있는 화염산 남단, 평양성은 산서성 임분, 국내성은 산서성 평요나 태원으로 비정하면 위 기록은 100% 정확하게 들어맞게 된다.

▲ 고구려의 핵심강역은 요녕성과 한반도가 아닌 산서성이었다.
▲  고구려의 압록수는 현 산서성 분하, 바다는 현 황하, 서안평은 산서성 하진시, 안시성은 분하하류 북쪽, 평양성은 산서성 임분, 국내성은 산서성 평요로 비정하면 신당서의 기록과 100% 일치한다.
 
고 임승국교수가 본 요수는 현 하북성 난하

우리나라 사학계의 역사이론이 일제 때 만들어진 엉터리 식민사학을 기본 이론으로 하는 반도사관의 이론이다 보니, 나라를 사랑하는 많은 우국지사들이 우리의 자존심이며 민족정신을 쭈그러뜨린  식민사학을 성토하며 제각기 여러 이론을 발표했고 발표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발표될 것이다.

그 중에 우리는 가장 유명한 민족사학자로 <한단고기> 주해서를 낸 고 임승국교수를 기억하고 있다. 애국심과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임교수는 국회에서 국사청문회를 하는 등 식민사학을 규탄하는데 앞장을 선 민족사학의 기둥이었다. 그러나 임교수에게 불행했던 것은 시대를 조금 일찍 태어나 인터넷이란 정보의 바다를 접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고 임승국교수는 요동.요서를 구분하는 요수(遼水)를 현 요녕성 요하가 아닌 북경 동쪽 하북성 진황도시 근처의 난하(灤河)로 보았다. 그리고 근처 창려에 있는 갈석산을 고대 갈석산으로 인정해 <한단고기>의 주해를 달게 된다. 그 근본 이유는 <한단고기>에 언급된 태조대왕의 요서 10성의 위치비정 때문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  민족사학자 고 임승국교수는 고대의 요수를 하북성 현 난하로 보아 요서 10성을 설명했다.
 
<한단고기>에 언급된 태조대왕의 요서 10성을 현 지명으로 보면 대부분이 북경과 동쪽 진황도시 사이에 있다. 그 중에 요동성(遼東城)이 있는데 창려에 있다고 했으므로, 그곳이 요동(遼東)이 되려면 요수를 현 난하로 비정해야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비정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당시로서는 요동.요서의 기준이 되는 요수를 요녕성 요하에서 빼내 서쪽 하북성으로 가져온 것만 해도 대단한 발상이었다. 

▲  한단고기에 기록된 요서 10성을 현재의 지명으로 그린 지도. 모두 북경 동쪽에 있는 하북성 난하 부근이고 요택과 택성을 황하구로 그렸다.  임승국교수의 요수=난하 이론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이 비정도 중국의 지명조작을 전혀 모르고 현재의 지명으로 그린 것이다.
 
당시 인터넷이란 문명의 이기가 발달되지 않았다보니 임교수는 단지 사서의 기록에만 의거해 식민사학의 잘못을 지적하고 규탄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지금의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는 것보다 수십 배의 노력이 필요한 엄청난 분량의 작업이었다. 분명 현 사학계의 이론이 잘못된 것이라는 그의 지적은 옳았으나, 본인의 그러한 엄청난 노력과 불타는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도 역사의 진실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 이유는 현재의 지명으로 역사를 해석하다보니 뭔가 역사 흐름의 톱니바퀴가 잘 안 맞았기 때문이다. 그건 도저히 맞힐 수가 없는 퍼즐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지명이란 중국에서 명나라 때부터 지명 이동을 통해 이미 조작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동이족인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할 때는 왜곡이 많지 않았으나, 다시 한족의 민국(民國)이 결성되면서 지명조작을 통한 역사조작은 그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져 동북공정이란 역사왜곡 프로젝트까지 나온 것이다.

인터넷 없이 사서의 기록만으로 지명조작까지 추적해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100%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민족사학의 기둥이었던 고 임승국교수도 결국은 생전에 우리 역사의 진실을 못 밝히게 된 것이다. 사실 임승국교수 사후에 그 분 버금가는 민족사학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민족사학을 사칭하는 역사애호가들은 아직도 우후죽순처럼 많이 생겨나고 있는 현실이다.

심제 09/04/01 [15:18] 수정 삭제  
 
『 구이저우(貴州省) 안순지역의 가면극에 등장하는 연개소문탈이다. 가면극에서는 당태종을 위대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지만, 용맹스러운 연개소문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중국 당대의 화가 염립본(廉立本:?~673)이 그린 왕희도(王會圖)에 나타난 백제, 고구려, 신라 사신들의 모습. 길이 393cm의 비단 두루마리도 된 이 그림에는 삼국의 사신은 물론 당시 당나라를 방문한 일본, 서역국 등 각국 사신 22명이 그려져 있다.


바지, 치마, 두루마기를 입은 백제의 사신은 3변째 깃털을 꽂은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신은 145번째,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길게 늘어뜨린 신라의 사신은 16번째 순으로 배치됐다.

① 중국 경극에 등장하는 연개소문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은 여러 종류이다. , , , 등 확인된 종류만해도 네 종류나 된다. 어니하와 분하만은 독목관과 대강의 줄거리가 비슷하다. 당 태종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위기에 처하자 설인귀(薛仁貴)가 구해준다는 이야기로 연개소문과 설인귀가 주연이고, 당 태종이 조연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봉황산(鳳凰山)에서 연개소문에게 쫓겨 도망간다.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백포(白袍)를 입은 설인귀가 등장한다. 연개소문은 특유의 비도(飛刀)를 사용해 대항하지만, 설인귀에게 패해 죽는다. 당태종은 위지공(尉遲公)에게 설인귀를 찾게 하는데, 설인귀를 시기하는 상관 장사귀(張士貴)는 그를 만나는 것을 방해한다.

설인귀는 산신묘(山神廟)에서 달을 보며 신세 한탄을 하다가 위지공이 몰래와 끌어안자 놀라서 도망가다가 병을 얻고 만다. 당(唐)나라 군사들이 고구려 군사들로부터 독목관을 빼앗으려 공격했으나, 오히려 고구려 장군 안전보(安殿寶)에게 장사귀의 아들과 사위가 포로로 잡힌다. 장사귀는 할 수없이 설인귀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는데, 먼저 설인귀의 부하 주청(周靑) 등이 안전보와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자, 설인귀가 병든 몸을 이끌고 출전해 안전보를 죽이고 독목관을 탈환한다."

경극에 비춰진 연개소문은 용맹한 장군으로 묘사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나는 칼'이라는 비도(飛刀)를 차고, 등에 깃발 모양의 고기를 하였는데, 이는 이민족임을 상징한다고 한다. 푸른 빛의 얼굴 화장은 위엄이 있는 그의 모습과 아울러, 동방 즉 고구려의 장군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경극을 보면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에 대해 두려워 하며, 무술이 뛰어난 인물로 보면서 잔인하고, 사납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했다. 이는 일본의 전통극 가부끼에 등장하는 김시민 장군을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묘사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일본군에게 있어 진주성 대첩은 치욕스러운 전투이고, 그런 진주성 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을 좋게 볼리 없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나, 설인귀가 죽이지도 않은 연개소문을 죽였다는 것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한 중국인들의 심리를 잘 다룬다 하겠다. 연개소문을 두려워 한 그들의 심리가 연개소문으로 하여금 전설의 영웅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경극에 등장하는 연개소문이 사용했다는 날아다니는 칼 ‘비도(飛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② 연개소문의 비도(飛刀)와 설인귀의 신전(神箭)

앞에서 연개소문의 상징 다섯자루의 칼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연개소문의 다섯자루 칼은 고구려 남자들의 일상생활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다섯자루 칼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으니 바로 ‘비도(飛刀)’이다. 송원 때의 『사략』에는 연개소문이 “등에 다섯 자루의 비도를 둘러맸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생전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자, 중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전장에서의 실제 모습을 그린 것이다.

경극 에 등장하는 ‘날아다니는 칼’을 사용하는 연개소문과 맞붙는 설인귀의 무기는 신통력 있는 화살, 신전(神箭)으로 이는 무기를 통해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대립구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연개소문의 ‘비도’는 권위용이 아닌 실전용이었다. 사략은 연개소문에 대해 “키는 열 척인데, 진홍색 사복(獅服)을 입고 적규마(赤虯馬)를 타고, 허리에는 두 개의 활집을 매고, 등에 다섯 자루의 비도를 둘러맸으니, 바로 고려장군 갈소문(曷蘇文)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③ 공포의 고구려 비도술


『신간전상당 설인귀 과해정료 고사』(新刊全相唐薛仁貴跨海征遼故事:이하 『고사』로 약칭)는 명(明) 성화(成化) 7~14년(1471~1478) 사이에 북경에서 간행된 사회이다. 『고사』에 실려있는 이란 그림은 연개소문이 사용했던 비도술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측 위쪽에 ‘천자’라고 쓴 당 태종이 있고, 아래측 좌측에 신전을 든 설인귀, 우측에 비도를 든 막리지 연개소문이 잇다. 연개소문은 설인귀의 화살에 맞서 칼을 던지고 있다.


명·청의 전기인 에서 연개소문은 당 태종을 `소진왕'으로 낮춰 부른 뒤 “너의 강산이 아무리 넓다 해도 400개 주에 불과하다. 내가 단지 일개 부대로도 너의 땅을 피바다로 만들 수 있다”고 호령하고 있다.

이 책에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 쫓겨 진흙구덩이에 빠져 곤경에 처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상님이여, 나 이세민을 가엾게 봐주소서. 말을 아무리 때려도 진흙구덩이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내가 황제인 것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너무나 상심하여 두 눈에 눈물이 흐르니, 누가 나를 구해준다면 당나라 땅의 절반을 주겠다. 만약 나를 믿지 못한다면 내가 너의 신하가 되겠노라.”


신간전상당 설인귀 과해정료 고사』(新刊全相唐薛仁貴跨海征遼故事)』에 묘사된 연개소문의 비도술(飛刀術)

비도가 일어나 공중에서 춤을 추네
화살과 비도가 먼지를 일으키며 대적하네
비도가 화살을 대적하니 노을빛이 찬란하네
화살이 비도를 대적하니 화염이 일어나네
공중에서 두 보배가 대적하니
두 장수 모두 신통력으로 겨루네 -



④ 청룡의 화신 연개소문

경극을 보면 연개소문의 복장을 홍포(紅袍)로 묘사한다. 『사략』에서 연개소문의 복장을 ‘진홍색 사복(獅服)’으로 묘사한 것이나, 『설인귀과해정동백포기(薛仁貴跨海征東白袍記)』에서 연개소문을 ‘문무에 능한 홍포장군’이라고 묘사한 것이 그 예이다. 경극에서도 붉은 색은 긍정적인 인물을 가리키고, 검은색은 지혜로운 인물, 푸른색과 녹색은 민간의 영웅호걸, 금색과 은색은 신이나 귀신을 나타내는데, 연개소문이 홍포로 묘사되었다는 것은 설인귀가 백포를 입고 있기 때문이라 해도 예사롭지 않다.

경극 서두를 보면 연개소문이 영혼으로 등장해 "나는 본래 청룡으로서 세상에 내려온 것이다"라며 자신을 청룡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 설인귀는 백호(白虎)로 등장한다. 청룡과 백호는 풍수나 고대 천문학의 사상(四象)에서 동쪽과 서쪽을 의미한다. 고구려가 중국의 동쪽에 있다는 점에서 이는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을 동쪽을 지키는 사방신으로 승화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당시 중원의 서쪽과 동쪽이 당과 고구려에 의해 분할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고사』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온 군영에서 두 장군(연개소문과 설인귀)을 환호하니, 온 세상이 두 사람을 강하게 하네/ 당조(唐朝)가 이 두 장군을 얻는다면 천하가 태평지 않은들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이는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의 신과 같은 무예에 경탄한 나머지, 그를 중국의 장수로 회유하고 싶었던 것이고, 이런 마음이 동쪽을 지키는 청룡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하고, 경멸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연개소문에 대한 경외심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를 청룡의 화신이라 평한 것이다.
성훈 컬럼리스트 09/04/01 [17:36] 수정 삭제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도망가다 빠진 요택과 어니하는 하남성에 있습니다.
요택은 하남성 제원시 동쪽 황하변에 있는 현 지명 황하습지이며, 어니하는 그 근처에 있는 강으로 아직도 그 이름이 그대로 어니하(淤泥河)로 남아 있습니다.
나중에 당태종의 퇴각로를 설명할 때 그 지도를 올려 드리겠습니다.
dsfadf 09/04/03 [00:20] 수정 삭제  
  경극의 인물들이 색갈로 구분하는것은 맞지만 얼굴색으로 구분을 하지 옷색으로 구분을
하지 않습니다.
모르면 좀 공부를 하시든지 허튼소리 치지 말고.
1 09/04/03 [13:24] 수정 삭제  
  임승국의 '제 5 조국론'을 들먹입니다. 전두환을 찬양하고, 군사독재정권과 결탁했다나??
1 09/04/03 [13:28] 수정 삭제  
  고구려 중심지를 근거없이 주관적인 해석으로 하북성에다가 비정하면 고구려를 중국에다 갖다바치는 중국의 동북공정논리다. 중국을 공략하고 한반도.일본을 공략하기 좋은 지역은 만주지역이다. 고구려(대진국) 유적유물은 주로 중국북부지역과 만주.연해주.몽골.한반도지역에서 집중 출토되고 있다. 소위, 재야사학자들은 문헌비교해석자체가 극히 주관적이고 고고학적 근거자료도 희박해서 설득력이 약하다. 그리고 단군3조선하고 한반도3한도 구분못해서 멋대로 비정해서 고구려.신라.백제의 위치가 뒤죽박죽이다.

고구려 영역은 만주.중국북부.몽골.연해주.한반도북부로 설정하다 무난하고, 백제영역은 한반도 서남부.중국동해안.일본.동남아지역으로 설정하면 무난하고 신라영역은 한반도 동남부(초기).한반도남부(나당동맹이후 후기)로 설정하면 무난하다. 왜는 백제세력의 남하로 대마도.일본열도로 이주한 한반도남부지역의 마한세력으로 설정하면 무난하고, 지금의 일본은 한반도.만주에서 밀려난 마한.가야.백제.고구려세력의 혼합세력이며,백제멸망이후 일본열도에 백제왕족들이 거주하며 본국 백제의 정치경제문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미친 백제세력의 이주로 일본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보면 무난하다.
단군조선지도 09/04/04 [12:43] 수정 삭제  
 

[한단고기]가 증언하는 단군3조선 영역도-[한단고기]에 보면 산동반도아래 양자강지역까지를 회.대라 했으며, 번조선 단군의 관리감독을 받는 지역


단군조선연구의 권위자이자 고대 갑골문.문헌연구의 전문가인 단국대 윤내현 교수가 설정한 단군조선의 최저 마지노선 영역(난하 위쪽의 중국 하북성지역까지는 단군조선의 영역이다)-국제법을 위반한 일제에 의해 100년 전 대한민국의 영토인 간도를 양도받은중국은 우리민족의 터전이자 단군조선의 영역이였던 하북성.만주.연해주 지역까지는 대한민국에 양도해야한다는 논리가 나온다.


한사군 관련 문제를 보면, 낙랑, 대방, 진번, 현도의 4군을 언급하는데, 이들 땅은 한나라 침입 당시 모두 번조선(번한)에 속하였던 땅으로서, 요동반도 서쪽의 땅이다.

요동반도 바로 서쪽에 있는 강이 요하인데, 서압록이라고도 불렀다.

요하의 서쪽 상류를 원래 요하라 한 것이 되는데, 발해만 북쪽에 있으며, 이곳이 요하(홍산)문명의 중심지가 된다. 지금은 내몽골 지역에 해당한다.

요서와 요동은 원래 요하상류에서 발해만 유역의 남쪽으로 흐르는 강으로 요하가 있어 동쪽을 요동이라 하고 서쪽을 요서라 한 것이 된다. 요동반도를 기준으로 요동, 요서라 한 것은 요동반도 바로 서쪽에 있는 서압록을 요하라고 하면서 생긴 것이 되고, 요하 동쪽의 반도로서 요동반도라는 말이 나온 것은 곧 후대의 일인 것이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미식 여행지 고흥, ‘녹동항 포차’에서 추억을 쌓아요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