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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보안사 수사관 최초증언] '5·18 집단 발포는 전두환 등 보안사가 계엄군시켜 자행'

이성민 기자 | 기사입력 2018/05/14 [20:25]

[전 보안사 수사관 최초증언] '5·18 집단 발포는 전두환 등 보안사가 계엄군시켜 자행'

이성민 기자 | 입력 : 2018/05/14 [20:25]

 [플러스코리아타임즈-이성민 기자]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보안사령관 전두환 등 보안사(현 기무사령부)가 계엄군을 통해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주도했다는 증언이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

 

▲ 전두환의 발포명령을 기다리는 계언군들. 자료사진     © 이성민 기자

 

특히 광주 5·18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학봉 대공처장-광주 505보안부대 ㅅ과장으로 이어지는 지휘-보고 체계가 군의 움직임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한겨레신문은, [단독] 보안사 전 수사관 “집단 발포, ‘전두환이 책임진다’고 들었다”는 제목으로 ◊ 광주 505보안부대 전 수사관 허장환씨 증언 ◊ “집단 발포 하루 전 보안사 상관이 사전 설명” ◊ “‘시민군이 먼저 쐈다’고 말하라”는 지시 받아 ◊ “전두환-이학봉 보안사 라인이 주요 결정 내려” 등 주요골자로 보도했다. 다음은 한겨레기사 전문

▲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시민과 학생들이 도망치다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있다. 사진=영화 한장면     © 이성민 기자



지난 3일 강원도 춘천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광주 505보안부대 전 수사관 허장환(70)씨는 “보안사가 공수특전여단에 작전 조언을 했고,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전날인) 5월20일 발포 결정이 났다”고 말했다. 대구 출신인 허씨는 5·18시민군 박남선 전 상황실장이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핵심 세력과 함께 살인 혐의로 고소했던 9명 가운데 한명이다. 5·18 때 악명 높았던 광주 505보안부대의 핵심 수사관이었다.


그의 상사였던 ㅅ과장은 1980년 5월20일 오후 5~6시 무렵 발포와 관련한 계획을 부대원들에게 설명했다. 허씨는 “당시 ㅅ과장이 수사관들을 모아놓고 ‘곧 발포 명령이 있을 것이다. 아군 쪽에서 먼저 발포했다고 이야기하지 말라. 폭도가 탈취한 총기로 먼저 쐈다고 이야기하라’며 사전 입단속을 했다”고 말했다. 계엄군은 이튿날인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했고, 금남로에서만 시민 34명이 사망했다.


그는 발포 결정의 책임자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전했다. 허씨는 “ㅅ과장한테 ‘자유당 때 최인규처럼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물었더니, ㅅ과장이 ‘야, 이 사람아, 그때하고 지금은 세태가 달라. 지금은 사령관님(전두환)이 책임을 져’라고 답하더라”고 전했다. 최인규는 이승만 정부 말기의 내무장관으로 시위 시민들에게 발포하도록 경찰에 명령해 4·19혁명 뒤 1961년 사형당했다. 한편, ㅅ과장은 1981년 서울 보안사 본부로 자리를 옮겨 학생 운동가들을 강제 징집하는 이른바 ‘녹화 사업’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광주 505보안부대 수사관이었던 허장환씨가 지난 3일 강원도 춘천의 한 커피숍에서 1980년 5·18 당시 보안대 내부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사진=한겨레     © 이성민 기자



ㅅ과장의 설명 직후인 5월20일 밤 10시30분 3공수여단은 장병들에게 실탄을 지급했고, 광주역에서 시민을 향해 처음으로 총을 쐈다. 허씨는 “군은 명령에 의해서만 실탄을 지급한다. 실탄 지급은 발포를 위한 예비 동작이다. 발포할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5월20일 실탄 지급과 다음날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 이후 내려진 자위권 발동에 대해서도 그는 “평화시에 민간인을 향해 자위권 발동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불법 발포를 뒤늦게 합리화하기 위한 조처였다. 당시 현지 지휘관 교전 지침에 ‘자위권 발동’이라는 것은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허씨는 지휘권이 이원화됐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이른바 ‘작전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현지 보안부대에서 현미경처럼 보고하면 보안사령부에서 광주와 관련된 주요 결정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505보안부대에서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에게 보고한 것을 바탕으로 보안사령관이 주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당시 공식 지휘 체계와 달리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정점으로 하는 비공식 지휘 체계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언이다.

 

▲ 5.18청문회에서 '전두환은 살인마'라고 소리치는 이철용 전 의원. 자료사진     © 이성민 기자



허씨는 광주민주화운동의 거목이었던 고 홍남순(1912~2006) 변호사와의 인연도 털어놓았다. 5·18 당시 홍 변호사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서 재야 수괴로 꾸며져 검찰에 넘겨졌으나, 진술을 번복해 재조사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허씨는 홍 변호사를 재수사해 행적을 조작하라는 지시를 거부했다가 항명행위라는 이유로 1981년 표적 감찰을 받고 강제 전역당했다.


그 뒤 허씨는 ‘친정’인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까지 당했다. 그가 틈틈이 ‘광주 사태’의 전말을 기록한 A4 용지 더미가 중앙정보부에 흘러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 보안사 수사분실(일명 서빙고 호텔)에 끌려가 18일 동안 전기고문 등 곤욕을 치렀다. 이런 이유로 한때 악명 높았던 보안사 수사관은 지난해 정부로부터 ‘민주유공자’로 인정받았다. 홍 변호사가 1998년 4월16일 공증한 문서를 통해 허씨가 합동수사본부의 조작 수사에 항명했다는 사실을 확인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허씨는 5·18 광주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서는 유엔 인권위원회 등 국제사회에 광주항쟁을 제소해 신군부의 학살 범죄를 역사에 명확히 ‘낙인’찍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어떻게 아무 무장도 하지 않는 아녀자, 어린애까지 살상할 수 있느냐? 천만명 유엔 인권위 제소 촉구 서명운동을 펼치는 시민운동을 하고 싶다”며 “한 때는 죄인이었지만 유엔에 제소하는 것을 잘 추진해 조금이라도 공을 인정받게 되면 5·18민주유공자로 인정받아 망월동 묘지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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