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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북한은 리비아식 해법을 거부하는가? 리비아식 해법의 두 가지 본질

문경환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18/05/17 [19:27]

왜 북한은 리비아식 해법을 거부하는가? 리비아식 해법의 두 가지 본질

문경환 객원기자 | 입력 : 2018/05/17 [19:27]

※ 이 글은 <민족과 통일>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2016년 한해 동안 미국이 7개국에 투하한 폭탄 수가 26171개에 달한다고 마이카 젠코 미국외교협회 선임연구원이 외교협회(CFR)사이트에 알렸다. 2만6171개의 폭탄 가운데 1만2192개는 시리아에, 1만2095개는 이라크에, 1227개는 아프가니스탄, 496개는 리비아, 34개는 예멘, 12개는 소말리아, 3개는 파키스탄에 투하했다.     ©이용섭 기자

 

북중 정상회담에 이어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예정된 상황에서 세간의 관심은 한반도 비핵화 해법에 쏠리고 있다. 일단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에 대해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있지만 그 과정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로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북한이 핵을 폐기하는 대가로 주변국이 무엇을 해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명 ‘리비아식 해법’이 주목을 받고 있다. 리비아식 해법이란 경제제재를 풀고 경제지원과 관계정상화를 해주는 대가로 핵폐기를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과연 리비아식 해법이 실효성이 있을까?

 

리비아와 미국은 오랜 기간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 1969년 쿠데타로 왕정을 무너뜨린 카다피는 이듬해 리비아 주둔 미군, 영국군을 철수시켰고 1973년에는 모든 외국인 소유 석유 재산을 국유화하였다. 이후 카다피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추진하였으며 반미, 반이스라엘 혁명세력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카다피의 정치철학인 이슬람 사회주의 제3세계 보편이론은 그의 1977년 저서 ‘그린북’에 잘 나와 있다. 

 

미국은 리비아가 급격히 반미 사회주의 노선으로 기울자 카다피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1979년 테러지원국 지정, 1981년 단교, 1986년 경제제재 추가와 카다피 관저 폭격, 1996년 이란-리비아 제재법안 의결 등으로 리비아를 압박했다. 하지만 리비아 내에서는 물론 아랍권 내에서 카다피의 입지가 워낙 탄탄해 전면전을 감행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리바아는 생화학무기와 핵기술, 미사일 개발에도 손을 대고 있어 전면전이 발발할 때 미국이 예상치 못한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리비아식 해법의 본질1: 무장해제 후 공격하라

 

그러다 2004년 미국이 리비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면서 점진적인 관계 개선에 들어갔다. 2006년 5월 15일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하고 25년 만에 외교관계를 전면 복원한다고 발표하였다. 2008년 9월에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리비아를 방문하여 카다피와 회담을 가졌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리비아에 미국 무역사무소를 세웠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이 이러한 관계 개선을 명목으로 리비아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는 점이다. 2004년 1월 23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관리였던 플라인트 레버렛은 리비아가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면 미국이 확실하고 응당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유혹하였다. 미국은 리비아의 미사일과 생화학무기 전력을 감축하는 것을 관계 개선의 대가로 요구하였다.

 

미국이 무장해제를 요구한 이유는 뻔하다. 리비아군을 무장해제 시켜놔야 리비아를 마음껏 요리할 수 있고 또 말을 안 들으면 전면전도 감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비아는 의외로 순순히 무장해제에 동의했다. 리비아는 무장해제로 인한 손해보다 관계 개선으로 얻는 이익을 더 크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미국의 리비아 제재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리비아는 미국과 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미사일과 핵기술, 생화학무기를 착실히 제거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형식적인 약속 이행에 머물렀다. 2010년 공개된 위키리크스 문서에 따르면 2009년 미국과 리비아 사이에 마지막 남은 고농축우라늄 제거협상을 벌이고 있을 때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가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리비아가 1억 달러 이상의 폭탄제조 기술을 넘겨줬지만 미국은 리비아에 대한 무기판매 금지 조치를 유지하는 등 미국의 보상 이행이 너무 느려 “진절머리가 난다”고 했다는 것이다. 

 

미국이 원한 건 리비아 장악이지 관계 개선이 아니었으므로 보상 이행이 더딘 건 당연한 일이다. 결국 미국은 리비아와 관계 개선에 나선 지 10여 년 만에 리비아 공습을 단행했다. 리비아의 협상이 미국의 제국주의 패권정책을 꺾는 협상이 아니라 관계 개선을 위해 자기 노선을 수정한 협상인 이상 리비아의 시련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뉴욕타임스는 2011년 3월 1일 보도에서 반정부시위로 궁지에 몰린 카다피의 과격한 행보를 감안할 때 2003년 미국과 영국이 리비아와 협상을 벌여 핵과 화학무기 등 대량파괴무기를 제거한 것은 매우 중요한 성공이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협상을 주도한 로버트 조셉 전 미 국무부 차관은 “당시 무기를 제거하지 않았더라면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이 지난 8년간 얼마나 발전했을지는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무장해제 후 침략’이라는 자신들의 작전이 주효했음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대량살상무기가 사라진 이라크와 리비아에서 전쟁이 발발하는 역설적인 현상이야말로 미국이 이야기하는 ‘리비아식 해법’의 본질이다. 

 

리비아식 해법의 본질2 : 관계 개선 후 반군을 육성하라

 

그렇다면 미국은 리비아와 관계 개선에 나선 10여 년 동안 무엇을 했을까?

 

2011년 상반기에 발발한 리비아 사태는 리비아 동부에 위치한 인구 100만 규모의 와르팔라 부족이 주도적으로 일으켰다고 한다. 수도 트리폴리 인근의 서부 리비아에 거주하는 부족은 친 카다피 입장을 보이는데 반해 벵가지 등 동부지역 부족이 반 카다피로 돌아선 것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부 부족과 동부 부족이 대립하는 것은 리비아 사태가 경제적 원인보다 정권을 둘러싼 권력다툼이 주원인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미국이 관계 개선 이후 집요하게 정치공작을 벌였을 가능성은 도처에서 드러났다. 

 

2011년 2월 15일에 벵가지 시위가 일어나자 일주일도 채 못 된 2월 21일에 아브라힘 다비시 유엔 리비아 부대사가 “카다피를 전쟁범죄자로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압둘 모넴 알후니 아랍연맹 주재 리비아 대표도 카다피를 비난하며 사임하였고 무스타파 압둘 잘릴 법무장관도 사퇴, 무하마드 쿠사 외무장관이 망명하는 등 카다피 정권이 급속하게 이완되었다. 대중투쟁의 영향력이 아무리 막강하다해도 시위 한번에 1주일도 못되어 주요 정치인들이 줄줄이 사퇴하는 경우는 없다.

 

이들의 ‘변절’이 과연 이들 주장처럼 카다피의 독재, 테러지원, 전쟁범죄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동안은 왜 카다피 치하에서 고위직을 맡고 있었을까? 실제로 영국에 망명한 쿠사 외무장관의 경우 1988년 팬암기를 폭파시킨 로커비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알려져 있으며 리비아 사태 초기 민간인 학살 혐의도 받고 있어 영국 입장에서는 처벌을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 되기도 했다. 쿠사는 결국 카타르로 망명했다. 

 

한편 이들 중 일부는 곧바로 2월 27일에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라는 자기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즉시 산하에 리비아 인민군을 조직하고 자유리비아 공군을 두는 등 군대를 모집하고 내전에 나선다. 그리고 미국에 망명 중이던 전 리비아 육군 대령 하프타가 급히 리비아로 돌아가 반란군 지휘관이 되었다. 

 

시위 발발 12일 만에 과도정부를 수립하고 군대까지 창설하는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의 속전속결은 이들이 2월 15일 벵가지에서 시위가 일어나기 전부터 정권탈취를 위한 사전모의를 해왔다는 것을 강력히 피력한다. 누군가의 일사불란한 조직지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리비아 내에서는 그러한 작전 지휘부를 찾을 수 없다. 지휘부는 리비아 내부보다 서방에서 찾는 게 빠를 것이다.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의 의장을 맡은 압둘 잘릴은 스스로 “유럽, 아랍국가들과 공식 접촉이 있었으며 이들이 대표성을 인정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수니파인 모하메드 알 타예브는 2월 26일, 서방은 리비아를 지원하라고 공개요구를 하였다. 또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가 수립된 지 이틀만인 3월 1일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반정부군을 무한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영국 외교팀도 벵가지에서 반정부 시위대와 접촉하였다.

 

리비아 정치세력 상당수가 일시에 카다피로부터 떨어져 나와 서방진영에 도움을 요청하고 미국이 과도정부 수립 이틀 만에 무한지원을 약속하는 것은 서방진영이 사전에 다년간 이들과 접촉하면서 저변을 넓혀놓았음을 보여준다.

 

한쪽에서는 관계 개선을 하면서 뒤에서는 반란세력을 키우는 미국의 교활한 모습이야말로 ‘리비아식 해법’의 숨겨진 면이다. 

 

리비아식 해법이 정답일까?

 

리비아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정책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관계정상화 10여 년 만에 각종 제재가 부활하고 공중폭격도 재현되었다. 리비아 전쟁의 전후 과정을 보면 카다피 정권이 미국에게 속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제국주의 탐욕에 대비하는 안전장치는 미국의 관계 개선 서명이 아니다. 해당국들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는 미국 관리들이 그 나라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해당국에게 미국과 맞붙을 힘이 있기 때문이다. 반미자주 노선을 걷는 국가들이 미국과 맞붙을 힘이 떨어질 때, 미국은 침공을 단행한다.

 

미국이 승인하는 연락사무소, 대사관 하나만 바라보고 총을 내린 리비아는 결국 침략을 당하고 말았다. 50년이 넘게 관계정상화를 주장하면서도 미국의 무장해제 요구를 거부하고 있는 북한은 리비아전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오스트리아 빈 대학 북한 전문가인 루디거 프랭크 교수는 북한전문 웹사이트 ‘38 North’에 기고한 ‘북한의 리비아 교훈’이라는 글에서 “북한은 이번 리비아 사태에 경계심을 가지면서도 그들의 노선에 대해 틀림없이 만족하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마도 리비아식 해법의 본질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걸 북한에 적용하는 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그리고 북한이 과연 수용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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