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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愚民은 냉대했지만 역사는 그를 중용”

DJ 역경의 반세기 ‘出生에서 當選’까지 총력해부

소정현 기자 | 기사입력 2009/08/21 [18:43]

“愚民은 냉대했지만 역사는 그를 중용”

DJ 역경의 반세기 ‘出生에서 當選’까지 총력해부

소정현 기자 | 입력 : 2009/08/21 [18:43]
김대중 대통령은 1924년 1월 한반도 서남쪽 끝에 위치한 외딴 작은 섬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로 목포에서 34km 떨어져 있다.

일본인 지주 밑에서 소작농을 하던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 김운식씨와 어머니 장수금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역사와 정치, 예능 분야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곳에서 하의 초등학교 4학년 때, 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하여 1939년 졸업했다. 이어 5년제 목포상업학교에 진학하여 1943년 졸업 후 일제의 강제 징집을 피해 해운회사에 취직을 하게 된다.

1945년 해방을 맞은 그는 해운사업에 주력하여 사업에 상당한 성공을 거둔 청년실업가로 성장한다. 20대 초반에 흥국해운이라는 해운회사를 차려 10년동안 경영했고 3년동안은 목포일보사 사장직을 지냈다.

김대중 대통령은 40여년간의 정치생활 동안 10개 야당을 거치면서 국회의원에 6차례 당선하고 3차례 낙선했으며, 3차례에 걸쳐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등 한평생 정치 외길을 걸어왔다.

1961년 그는 두 번의 실패 끝에 세 번째 도전한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DJ는 1956년 장면 박사의 추천으로 민주당에 입당해 4대 때인 59년 강원도 인제에서 도전하지만 실패한다.

DJ는 이어 60년 5대 선거에서 낙선한 후 5.16 군사혁명 직전 인제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첫 당선되었다. 그러나 당선 3일만에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국회가 해산되고 당선은 무효된다. 정치 규제에 묶이는 비운을 맞게 된 것이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용기와 희망의 정치인으로 촉망받게 된다. 1965년 민중당 대변인을 거쳐 이듬해에는 정책위의장을 역임한데 이어 1967년 통합야당인 신민당 대변인이 되면서 정계의 주목을 받는다.

박대통령은 1967년 7대 총선에서 DJ를 낙선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는다. 박대통령은 당시 DJ를 낙선시키기 위해 장관들을 대동하고 목포에 내려와 현지에서 국무회의를 소집하는 등 거의 1개월 동안이나 현장 지휘를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DJ는 이같은 악조건에서도 당당히 승리를 거머줘 거물급 정치인으로 급부상한다. 

특히 국회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해온 DJ는 철저한 준비로 국회의 스타였다. 국회의 각종 위원회와 재무․건설․외교․예산․국방 등의 상임위원회에서 전문성을 키웠다. 그는 전체적인 윤곽에서부터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비판과 동시에 항상 정책의 대안을 제시했다.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꿈꾸면서 그는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을 저지하기 위한 역사적인 장충단공원 집회가 바로 이를 입증한다. 그는 이 날 연설을 통해 패배주의에 젖어 있던 야권의 결속과 민주주의 회복의 희망으로 선명히 각인되었다.

DJ는 여세를 몰아 1970년 9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 당시 선거전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1차 투표 실시 결과 과반수에서 단지 22표 모자란 4백21표를 얻은 김영삼 후보를 2차 투표에서 따돌려 막판 대역전극을 연출했다.

DJ는 김영삼 의원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1971년 4월 7대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박정희씨와 정면 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관권과 금권, 온갖 부정이 난무한 가운데서도 46%의 지지를 얻었다. 비록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지만, 국민 속에 정치인 김대중에 대해 깊은 인상을 심는 계기가 되었다. 

DJ는 그 해 5월에 있었던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지원 유세에 나서며 서울에서만 19지역구에서 18개 지역을 휩쓰는 등 저력을 과시한다.

1971년 박정희의 철권통치에 대한 정면 도전은 그에게 30년에 가까운 고난과 시련의 서곡이 되었다. 부정선거로 가까스로 승리한 박정희씨는 결국 민주 선거를 포기하게 된다. 1972년 10월 소위 종신 대통령을 꿈꾸며 ‘유신헌법’을 날치기 처리하여 현대판 집정관 독재 체제가 태동한다.

후속 조치로 민주 인사에 무자비한 탄압과 혹독한 억압이 가해진다. 가장 강력한 도전 세력이었던 DJ는 당연히 그 탄압의 핵심적이자 최종적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DJ는 1973년 8월 일본 도쿄호텔에서 중앙정보부의 공작원에 의해 납치를 당한다. 그를 제거하여 한국 정계에서 완전히 아웃시키기 위한 음모였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의 강력한 경고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결국 1주일만에 서울의 자택에 돌아왔지만 모든 활동이 전면 중단되면서 가택 연금을 당하게 된다.

그럼에도 DJ는 굴하지 않고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을 이끌어내 꺼져 가던 민주화의 불씨를 다시 지핀다. 이로 5년형을 받고 수감되어 1978년 12월 석방되었으나 또다시 연금의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1979년 10월 26일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한다. 이어 두 달 뒤 가택연금이 해제되고 사면 및 복권조치가 취해진다. 

그러나 애석히도 민주화를 향한 ‘서울의 봄’도 잠시뿐이었다. 1980년 5월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날조된 내란음모혐의로 체포된다. 동년 11월 계엄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그 후 무기에서 20년으로 감형되고 1982년 12월 석방되어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군사정권의 모진 고문과 탄압, 온갖 유혹에도 굽히지 않았으며, 미국 망명 중에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그치지 않았다. 1985년 귀국한 후에도 그를 둘러싼 가택연금과 해제는 반복되었다.  

결론적으로 DJ는 60년대 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모두 5년반동안 옥살이를 했고 6년반의 가택연금, 16년동안 정치규제에 묶여 있는 신세였다.

DJ는 미국에서 망명 중인 1984년 5월 김영삼씨 등 야당 인사들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결성한다. 한국 민주화의 돌파구는 1987년 6월 항쟁에서 만개했다.

민추협의 민주화운동은 1987년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29선언을 이끌어내 16년만에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시키고 정권 교체의 절호의 기회를 맞는다.

이에 따라 그는 실형 면제와 복권조치를 받았다. 그러나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와 김영삼 민주당 총재와의 후보단일화는 실패한다. 그 후 김 후보는 평민당을 창당하여 두 번째 대권에 도전하지만 야권 분열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DJ는 1992년 대선에 통합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나서지만 3당 합당으로 집권당 후보가 된 김영삼 대통령에게 또다시 고배를 마신다.

세 번째 대권도전에 실패한 김 후보는 1992년 대선 직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7개월만에 귀국한 뒤 ‘아태평화재단’을 창립, 사실상 정치활동을 재개한다.

DJ는 민주당이 압승을 거둔 6.27일 지방선거 직후인 95년 9월 정계 복귀와 함께 국민회의를 창당하여 총재로 취임하고 96년 4.11 총선을 통해 제1야당 총재로 부상하면서 네 번째 대권에 도전한다.

DJ는 우여곡절 끝에 제2야당 자민련과의 후보단일화에 성공, 그가 네 번째로 도전한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40.3%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그리고 1998년 2월 25일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한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 간 정권 교체가 성취된 순간이었다. 진정한 민주화의 새 날이 열리는 날이었다. 온갖 고난의 역정을 넘어온 한 정치인의 승리일 뿐 아니라 한국인 모두가 함께 승리한 민주주의의 큰 성취의 날이었다.

참조로 김 대통령의 본관은 金海이며, 호는 후광(後廣)이다. 혈액형은 A형으로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이다.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탁월한 그의 개인적 자질 외에도 다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97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데에는 경제 불황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국가 경제파탄'이라는 초유의 국내 상황이 그 주요인이다. 경제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민심이 극도로 이반된 것이다.

서양 속담에 ‘아비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나 아비 노릇 하는 것’은 어렵다는 말이 있다. 선거에서 승리하면 대통령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아무나 제대로 대통령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YS 시대가 저물어가면서 많은 국민들 특히 YS에게 몰표를 몰아준 사람들은 국제통화기금(IMF) 한파 속에서 이 평범한 진리를 사무치게 깨달았을 것이다.

여권 후보의 분열도 DJ의 대선 승리에 한몫을 했다. ‘병역 기피' 문제나 '경선 불복' 등 당시 여당의 자중지란은 상대적으로 DJ의 주가를 높였다. 여당의 분열과는 달리 정권 야합이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DJP 연합‘은 결과적으로 DJ의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요인만으로 정권 교체를 달성한 것은 아니다. 국민의 힘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 등 해외 언론은 DJ를 '한국 최초로 국민에 의해 정당성을 획득한 대통령'이라고 칭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정권교체를 이룬 한국 국민의 수준을 다시 보게 되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소정현기자는 ‘굿바이 DJ’의 著者이기도 하다.>
 
[제휴사=전북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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