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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조선인 7천여명 수장시킨 日군함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보도

임진미 기자 | 기사입력 2019/08/24 [09:36]

북, 조선인 7천여명 수장시킨 日군함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보도

임진미 기자 | 입력 : 2019/08/24 [09:36]

 [플러스코리타임즈=임진미 기자] 24일 북 로동신문은 1945년 8월 24일 수천명의 조선인을 태우고 출항한 일본군함 '우끼시마(浮島)호 폭침사건' 제74주년을 맞아 보도했다.

 

▲ 교또 마이즈루에서 우끼시마마루사건 70주년 추도모임. 사진= 조선신보     © 임진미 기자

 

‘우키시마(浮島)호 사건’은 1945년 8월24일 강제 징용됐던 한국인 7,000여명(일본 공식집계 3,700명)을 태운 4,730톤급 일본 해군함 우키시마호가 일본 교토(京都)시 인근마이즈루(舞鶴)항 근해에서 폭발, 침몰하면서 수천명이 사망한 대형 참사를 말한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이 미군측이 설치한 기뢰가 폭발하면서 일어난 우발적인 것으로 발표했으나 일본 해군이 징용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 등을 은폐하고 선상반란을 막기 위해 폭탄을 설치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아직까지 사건 경위와 침몰 원인 등이 베일에 쌓여있다.

당시 500여명의 생존자들은 “폭발소리가들리기 10분전에 일본 해군 300여명이 소지품을 모두 바다에 버리고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했다”며 고의적 폭파가능성을 제기했다.

또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선체의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구멍이 뚫려야 하는데 1954년 10월 인양 당시 배의 바닥 구멍은 바깥방향으로 뚫려있었던 점도 내부폭발의 명백한 증거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침몰 전 폭발 소리가 3~4회 들렸고, 물기둥이 50~60㎙나 솟아오른 현상은 기뢰에 의한 폭발로 볼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 강제징용 조선인 7000여명 수장학살,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 임진미 기자


다음은 보도 전문.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에 비낀 반인륜적죄악

 

우리 민족을 대상으로 감행한 일본의 반인륜적인 범죄들가운데는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도 있다.

 

일제가 패망한지 열흘도 채 안되던 1945년 8월 24일, 해방의 기쁨 안고 귀향길에 오른 조선사람들을 태운 《우끼시마마루》가 일본의 교또부 마이즈루앞바다에 수장되였다.

 

그때로부터 7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늘도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일본의 야수성과 교활성을 만천하에 고발하고있다.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은 일제의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연장선에서 벌어진 계획적이며 의도적인 대학살만행사건이였다.

 

일제는 20세기 전반기 조선반도를 군사적으로 강점하고 식민지통치를 실시하면서 가장 야수적인 방법으로 우리 민족을 멸살시키려고 하였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전범국으로서 력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할 시기에 조선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수장시키기 위한 극악한 범죄를 꾸몄다. 한명의 조선사람이라도 더 많이 죽이는것으로써 패망의 앙갚음을 할 심산밑에 《우끼시마마루》가 부산으로 가게 된다, 조선으로 가는 배편은 이것밖에 없다고 하면서 회유절반, 강박절반으로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배에 태웠다.

 

《우끼시마마루》는 정원을 훨씬 초과한 상태에서 출항하게 되였다.

 

결국 일본의 계획적인 폭침사건에 의해 해방의 기쁨을 안고 고향에 돌아가기를 그토록 소원했던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생죽음을 당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우끼시마마루》에는 부산까지의 항해에 필요한 해도조차 없었다. 또한 오미나또해군경비부의 디젤유가 바닥이 났기때문에 《우끼시마마루》를 부산으로 보낼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해군은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고향에 보내준다고 하면서 배에 태웠다.

 

제2차 세계대전종결당시 련합군의 명령으로 일본령해에서 100t급이상 되는 선박들의 항행은 중지되였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4 000t급이 훨씬 넘는 《우끼시마마루》가 출항하였다는것은 폭침사건의 범죄적인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보여주고있다.

 

일본방위성 전쟁사자료실에서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1945년 8월 19일 해군성 운수본부가 오미나또해군경비부 참모장앞으로 전보를 띄웠다. 전보는 오미나또해군경비부가 보낸 제181439호 전보에 대한 답전으로서 거기에는 《우끼시마마루》의 운항을 허가한다는 내용이 밝혀져있다. 이것은 《우끼시마마루》출항자체가 일본당국의 흉계에 의한것임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우끼시마마루》는 처음부터 부산이 아니라 폭침장소인 마이즈루항 앞바다로 항로를 정하고 떠났다. 또한 폭발직전에 배에 탔던 일본인들은 부랴부랴 뽀트를 타고 달아났다. 피해자들은 폭발시 물기둥도 일어나지 않았고 여러번의 련속적인 폭발이 일어났다고 증언하였다.

 

조사발굴된 모든 자료는 이 사건이 일제가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감행한 반인륜범죄라는것을 낱낱이 폭로해주고있다.

 

일제가 패망한 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승냥이가 양으로 변할수 없듯이 섬나라특유의 야수성과 교활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70여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록 과거죄악에 대해 사죄도 배상도 하지 않고 오히려 력사를 외곡하며 책임회피에 열을 올리고있는 일본의 행태는 조선민족의 피를 분노로 끓어번지게 하고있다.

 

특대형범죄로 얼룩진 과거사를 정당화하고 묻어버리려고 꾀할수록 조선민족앞에 치르어야 할 대가가 더욱 커진다는것을 일본당국은 명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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