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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104)- 공화제로의 파행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9/11/22 [10:15]

대한정통사(104)- 공화제로의 파행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9/11/22 [10:15]

[+코리아타임즈=안재세 역사전문위원]   대한국인 사회에 공화제도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필립제선이 주도했던 독립협회 운동이 활성화되면서부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역사조작을 위해 일본이 이땅 한반도에 내세운 허수아비 고종과 신하들     © 자료사진

 

일본의 명치유신을 크게 동경하고 일본정객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미국의 민주주의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던 갑신왜란의 주역 중 한 명인 서재필은, 이름마저 필립제선으로 스스로 창씨개명한 후 미국인 필립제선으로 대한국에 돌아 왔다. 독립협회는 결국 그 친일적 노선에 대한 광무황제의 혐오와 함께, 전통적인 군주제 대신 갑자기 공화제 수립을 기도했다는 혐의를 받은데다가, 갑신왜란의 또 하나의 주역이었던 박영효를 추밀원의장으로 추대하려 했던 실책에 의하여 자멸해 버렸으나, 주로 계몽주의자들간에 한 번 퍼지기 시작한 서양 근대사조와 공화제에 대한 관심은 커져갔다. 그것은 부국강병을 서두르던 나머지 선택하게 된, 일종의 서양 열강에 대한 모방심리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공식적으로 거론되지 못했던 공화제에 대한 논의는,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공화제의 모국이나 마찬가지인 미국의 교포사회에서는 왕성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당시에 왕성하게 일기 시작하던 러시아의 혁명적 분위기에 자극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미국과 제정러시아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음도 상기할 필요가 있음). 그리하여 미국에서 설립된 공립협회에서는 가장 먼저,

  “전제시대의 제왕과 귀족이 평민에 대하여 의무는 조금도 없고 권리만 탐절하는 민적(民賊)이며, 평민은 제왕과 귀족에 대항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노예이다. 전제정치로 인한 폐습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나라를 되찾으려면 근본적으로 전제정치를 변혁해야만 가능하다

고 주장하였다.

 

조선의 사회주의적 군주제를 러시아나 유럽지방의 봉건적 전제군주제와 완전히 혼동해버린 뒤범벅의 역사인식에다가, 러시아혁명가들이 추구해마지 않던 사회주의의 선배가 조선이었음을 전혀 알지 못했던 무지의 소산이라고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의 광복투쟁을 주도한 이상설도 주권재민론(主權在民論)’을 주장한 바 있으나,그는 일찍이 율곡을 이어받을 학자라는 평판을 받았던 것처럼 어디까지나 대성인 맹자의,

  “백성이 중하며, 사직이 버금이요, 임금이 경하다.”

는 가르침에 충실했던 것이며,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후에는 루쏘의 주장인,

  “나라는 백성의 계약으로 좇아 된다.”

는 설을 첨가했을 뿐이다. 그가 전적으로 황실을 무시하고 공화제를 추구한 적이 없고, 오히려 서거하는 그 날까지 광무황제를 광복운동의 구심점으로 삼으려 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립신보와 신한민보의 논조는 계속해서 공화제만을 주장했으니,

  “임금이나 정부가 잘못할 때 극력 항거하여 바로 하는 것이 국민의 의무라, 미국인의 8년 전쟁과 프랑스인의 경천동지한 혁명과 영국인의 대헌장 성립한 것과 일본인의 막부를 전복한 것이 모두 국민의 의무라 할지라.”

 

  “저 영국 국민이 국왕을 시살한 것은 무도불법한 사적을 후세에 유전코함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를 세우고저 하여 부득불 행한 일이오, 영토를 세계에 편만케 한 것은 신출귀몰한 별법이 있음이 아니라 국민의 의무를 지키는 가운데서 자연히 된 것이요, 미국의 8년 혈전과 일본의 금일 강병이 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로 좇아 나왔으니, 금일 우리 한인이 저 만겁지옥을 벗어나서 남과 같이 한 번 살아보고하는 관념이 있거든 국민을 연구하여 권리와 의무를 실행할지로다. 국민의 권리를 실행할 때에 영국 국민의 부월(斧鉞)을 모방함도 가하고, 미국 국민의 공화정부를 모방함도 가하고, 일본 국민의 막부전복을 모방함도 가할 것이라

 

  “국가 일에 몸을 바쳐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고, 백성이 국가의 주인이 되어 헌법을 정하고, 대의정체를 실행한 연후에야 참 국민이 될 터이니, 오늘 우리의 목적할 바는 국민주의이다(공립신보 1908.4.22 ‘嘔血通告國內同胞’)”

와 같은 주장을 계속하였다.

 

당시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 총궐기한 의병들이 대한국의 산야에서 뜨거운 피를 흘려 가며 치열한 항일투쟁을 힘겹게 전개하고 있는 것을 강 건너 불 보듯 하며, 태평양 건너 이역만리에서 펜대나 굴리고 있던 공화주의적 몽상가들은 오히려 일제가 강성함과 그 일제를 돕고 있던 영국과 미국을 칭송하고 있었으니, 하나로 결집되어도 모자랄 판에 완전히 적전분열의 양상을 만방에 과시하고 있었던 거나 다름없었다.

 

   미주의 공립협회와 비슷한 노선을 가지고 국내에서 결성되었던 신민회의 공화주의도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신민회를 주도한 안창호 자신도,

  “비밀결사조직은 구상되었으나 공화제를 주장한 바는 없었다.”

고 회고한 바가 있다.

 

안창호는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고려회를 조직한 바 있으나 같은 목적으로 국내에서는 신민회를 결성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미국의 기관을 본국에 와서 그대로 만들면 자기 세력을 심으려는 오해를 받으며, 둘째, 신고려회라 하면 당시의 왕조를 전복하고 공화국을 세우련다는 오해를 받아 탄로가 날 경우에는 화가 클까 우려되었다.”

는 것이었다. 안창호의 주도면밀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신민회 내부에서는 안창호 이외의 일부세력에 의해 공화제가 추진되어 갔다.

 

그 중에서도 신채호는,

  “인류는 인격이 평등이요, 인권이 평등이니, 오호라 저 불평등주의는 인류계의 악마요, 생물계의 죄인이로다. 고로 평등주의가 행해지는 나라는 반드시 흥하였나니, 구미 문명 각국이 그것이요, 불평등주의가 행해지는 나라는 반드시 망하였나니, 폴란드인도 등이 그것이라. ‘불평등세 자()는 대한국의 최대 원수라

  (서양문명이 진보하여) 국가의 이익이 날로 많아지고, 인민의 복이 날로 커져서, 전제봉건의 오랜 더러움이 가고 입헌공화의 복음이 두루 퍼져, 국가는 인민의 낙원이 되며, 인민은 국가의 주인이 되어, 공맹의 보세장민주의(輔世長民主義)가 이에 실행되며, 루쏘의 평등자유정신이 이에 성공되었도다

라고 절규하기도 했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신채호의 열렬한 애국심과 확고한 역사인식은 잘 알려져 있으나, 그도 이 시기에 있어서는 서양근대계몽사상과 서양제국주의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 매우 빈약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도 결국은 조선의 사군자들이 오백 년 역사를 통하여 시종일관 추구했던 공자와 맹자의 이상세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같은 의도를 숨길 수 없었으니, 그에게서는 오히려 전통사상과 서양사상의 접목가능성이 엿보이며 시대를 초월한 대사상가로서의 면모가 돋보이기조차 한다.

 

다만 망국전야의 울분이 열혈적인 그로 하여금 모든 기존 체제에 대한 극심한 반발을 야기했을 것으로 이해될 수는 있을 것이다. 신민회에서 공화주의를 추구했던 많은 열렬한 애국자들도 같은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왕에 세계역사를 예로 들어 살펴보려면, 여전히 대한국체제로의 복귀를 열망하고 있던 대다수 민중의 의사에 비추어 볼 때, 당대 세계 제일의 융성을 자랑하고 있던 영국의 입헌군주제에 더 관심을 기울였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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