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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역사문화이야기(33) ‘선비와 권력의 유착역사’(상편)

김정룡 | 기사입력 2019/12/02 [22:12]

김정룡 역사문화이야기(33) ‘선비와 권력의 유착역사’(상편)

김정룡 | 입력 : 2019/12/02 [22:12]

 

▲  김정룡 중국동포타운신문 대표

 

 

. 선비의 유래

 

선비는 곧 ()’이다. 조선시대 사회계층을 네 가지로 나누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농공상이며 여기서 사가 곧 선비를 뜻한다. 사의 계층은 사대부와 구분된다. 사람들은 흔히 사와 사대부를 구분 못하고 혼용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사는 공부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고 대부는 권력을 가진 사람을 이르는 말로서 공부하여 권력을 갖게 되면 곧 사대부가 되는 것이다.

 

그럼 사()는 어떻게 생겨나고 대부(大夫)는 또 어떻게 역사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대략 4천 년 전 은나라 때 문자가 생겨났는데 모든 일에 있어서 귀신을 섬기고 길흉화복을 점치고 점의 결과를 거부기 껍데기에 새겨놓는데서 상형문자가 탄생되었고 그것을 역사에서는 갑골문이라 부른다.

 

문자를 만들고 새기고 하였으니 공부한 사람이 있긴 하였으나 극히 드물었을 것이고 전반 사회가 귀신을 섬기는 기풍에 의해 삶을 영위하는 풍토에서 문화를 중시했을 리가 만무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공부한 사람이 사회 하나의 계층을 이룰 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은나라 시기 사()가 어떻게 활동했다는 기록이 없다.

 

중국에서 사()가 역사무대에 등장한 것은 주나라 시기였다. 은나라 때는 청동기를 제작할 만큼 수공업이 굉장히 발달하였고 따라서 상업도 굉장히 발달하였다. 그런데서 은나라를 상나라라고도 부르며 장사업을 상업(商業), 장사치를 상인(商人)이라 부르는 관습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은나라는 말기에 이르러 주왕(紂王)이 타락하고 정사를 바로 돌보지 않아 힘을 잃은 틈을 타 주의 민족이 궐기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3천 년 전 주무왕이 은주(殷紂)를 정복하고 중원에 주나라를 세웠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은()에 대한 주()의 승리는 곧바로 농경문화가 경상(經商)문화에 대한 승리이고 문화의 숭배가 귀신숭배에 대한 승리였다고 평가한다.

 

주무왕은 은을 정복하여 얻은 땅을 친척과 전쟁에 기여한 장군들에게 나눠주어 경영하게 되었는데 땅을 분봉 받은 자를 제후라 부르고 제후가 또 자신의 토지를 친척들에게 분봉하였는데 이들을 대부라고 한다. 즉 주나라 왕은 자신의 통치범위를 천하라 여기고 자신을 하늘에서 내린 아들이란 뜻으로 천자를 자칭하고 나섰다.

 

제후가 분봉 받은 토지의 영역을 국이라 하는데 제후는 국왕에 해당된다. 제후는 왕이고 국과 가의 구체적인 경영은 대부가 맡아 한다. 대부 밑에 사가 있는데 사는 대부를 도와 가를 고르게 한다.

 

사가 공부하여 수양을 쌓는 것이 수신(修身)이고 대부를 도와 가를 고르게 하는 것을 제가(齊家)라 한다. 사는 또 춘추시대까지 전쟁이 일어나면 일선에 나가 싸워야 한다. 전사(戰士), 병사(兵士)란 말이 이렇게 생겨났다.

 

당시 백성은 싸울 자격이 없었고 싸움의 주체는 사의 계층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전쟁은 상대를 멸망시키고 빼앗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패권을 이루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었다. 전국시대에 전쟁이 더는 패권의 목적이 아니라 겸병, 즉 상대를 먹어치우는 싸움이기에 백성들도 전쟁에서 싸우는 주체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주나라는 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농후하여 공부하는 자가 많아 졌고 이들이 사회 하나의 계층으로 등장하였으며 춘추전국 시기에 이르러 이들은 혼란스런 천하를 구제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노자, 공자, 묵자, 맹자, 장자, 한비자 등등의 유명 인물들이 눈부시게 역사무대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제후와 대부는 자신들의 영지가 있었으나 사는 영지가 없이 마치 중국현대사에서 집단화 농업체제에서 가가호호 자류지(自流地)를 조금씩 남겨 채소나 심어먹을 수 있을 만큼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는 그 조그마한 땅을 믿고 생계가 어려워 대부나 제후한테 붙어먹고 살지 않으면 연명이 어려웠다. 쉽게 말하자면 사는 털과 같은 존재로서 가죽이 없으면 생존하지 못한다. 춘추전국시대 각 학파 배운 사의 집단이 이 나라 저 나라 천하를 주유하면서 감투를 얻기 위해 몸부림친 것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그 전형적인 인물이 바로 공자라는 것을 세인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공자를 비롯한 사의 집단이 단순히 감투에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학문으로 이상적인 국가를 건립하고 대대손손 이어 내려가 영광을 빛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 선비가 진나라 천하통일에 기여

 

중국왕조역사는 하나라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라 시기 제후의 수는 1만이었고 은나라에 이르러 절반 이상으로 줄어 3천이었고 주나라 초기엔 8백의 제후가 있었다. 춘추시기에 서로 패권을 다퉈 제후의 수가 줄어들더니 전국시대 말기엔 7웅이 남았고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다.

 

왜 역사가 흐를수록 제후의 수가 줄었고 이윽고 하나의 국가만 남았을까? 인류역사는 혈연으로 이뤄진 씨족공동체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진 부족부족연맹부족국가부족국가연맹방국제국으로 흐르는 패턴이었다. 중국역사의 경우 하나라 시기는 부족연맹, 은나라 시기는 부족국가, 주나라 시기는 서주 때 부족국가연맹, 동주에 이르러 방국형태에서 최후 제국으로 과도되었다.

 

이 공식에서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인류역사는 원시공동체에서 매우 분산된 분권사회로 이행되었고 그 분권이 점차 하나의 권력으로 집중되는 중앙집권제 제국이 형성되었다.

 

여기서 분권은 봉건을 의미하는데, 봉건이란 봉토건국(땅을 나눠주는 것이 봉토이고 그 땅과 그 땅에서 사는 백성을 다스리는 제후를 세우는 것이 건국임)’이며 주나라 왕은 천자로서 천하의 주인이지만 제후국의 치국에 관여하지 않아 허수아비 같은 존재이다. 각 제후국에 왕이 따로 있고 세금징수, 군대양성, 인사권까지 모두 행사하는 권력과 권리를 갖는다.

 

제국이란 권력집중과 관원대리제도를 실행하는 중앙통일집권체제를 갖춘 국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중국역사는 분권사회로부터 어떻게 통일집권(統一集權)사회인 제국으로 이행되었을까? 전국시기인 기원전 4세기까지 진나라는 7국 중 별로 볼꼴이 없는 촌놈의 나라였다.

 

문화적으로도 낙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재도 없어 그저 그런 후진국이었다. 그러던 데로부터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사이 진나라는 강대국으로 부상하였고 종국적으로 천하통일을 이루어냈다. 진이 천하통일 할 수 있었던 내막에는 진영정 썩 전에 상앙이란 선비가 이미 국력을 부강 시키고 군사를 가강하여 토대를 잘 닦아놓은 덕분이었다.

 

진효공 때 성은 공손이고 이름이 앙()이란 선비가 위나라에서 왔다. 그래서 처음엔 그를 위앙(衛鞅)’라 불렀는데 효공이 그에게 상() 지역에 봉하여 그때부터 상앙이라 부르게 되었다.

상앙은 법가계열의 인물이다. 당시 법가는 이른바 진보파로서 기존의 체제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초, , , 제 등 나라들에선 획기적인 개혁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앙은 후진적인 진나라를 선택하여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로 맘먹었다. 상앙의 변법에는 정치, 경제, 군사 등 제반 분야의 개혁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정치개혁의 핵심내용으로서 아래와 같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영주제를 폐지하고 지주제를 실시한다. 먼저 귀족 영주의 지위와 특권을 몰수하여 일반 백성가운데 지주나 부자 정도로 강등시킨다. 군공이 있는 종실의 경우라도 후()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한다. 후는 조세만 징수할 뿐 백성의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 기존의 영주에 부속된 신민은 재편하여 지방관이 관리토록 한다.

 

둘째 세습제를 폐지하고 임명제를 실시한다. 모든 관원은 국군이 임명하는데 능력에 따라 직책을 부여하고 더 이상 작위가 세습되지 않도록 한다. 능력과 재능이 있는 자는 진나라 사람인지 여부를 떠나 정책을 결정하는 영도자가 될 수 있다.

 

당시 관직은 대부와 사 출신들이 맡았으며 대대로 세습되어 가는 귀족들이었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관리세습제를 타파하고 임명제를 실행한 것은 큰 혁명이었다.

 

셋째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한다. 전국에 31개 현을 설치하고 현령과 현승(縣丞:부현장)이 다스리도록 한다. 이후 새롭게 얻은 땅에도 군현을 설치하고 더 이상의 봉국은 개설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정전제를 폐지하였다. ‘정전제는 일정한 토지를 아홉 등분한 것인데 분할된 농지가 우물 정()자 모양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농가 8호가 각기 한 곳씩 맡아 경작하고 가운데 있는 토지는 공동으로 경작한다.

 

하지만 농부들은 자신의 몫으로 할당된 농토는 열심히 경작하지만 공전을 가꾸는 데는 신경을 별로 쓰지 않는다. 또 정전제는 가로 세로 길이 너무 많아 개간농토를 점하고 있는 면적이 많아 생산이 비효율적이다.

 

정전제를 폐지한 이후에는 새로 생긴 땅을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게끔 허락하고 관은 세금을 징수하면 그만이기에 관과 개인 모두 좋아하는 개혁이었으며 생산량이 현저히 제고되고 생산력이 크게 증가되었다.

 

군사적으로는 전공에 따라 상벌제도를 실시하여 귀족계층도 전공이 없으면 기존의 권력을 내놓아야 했다. 전투에 나서는 모든 장군과 병사들은 전공을 세우기 위해 죽기 내기로 싸우니 전투력이 크게 증가하였다.

 

종합하여 말하자면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에 의해 임금의 권력이 확대되고 군사력이 가강되고 생산력이 크게 증장하여 부국강병을 이뤄 천하통일을 이루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고 서서히 제국의 틀을 갖춰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성과는 진영정에 이르러 천하통일을 이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앙이란 한 선비가 변법을 통해 진나라를 부국강병 시켜 천하통일을 이뤄내는데 토대가 되었고 중국역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제국의 출현에 막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 진시황은 법가에 의해 성공하고 법가 때문에 망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게 된 것은 법가의 덕분이었다. 이미 상앙과 같은 법가 선비가 있어 부국강병의 기틀을 마련한 역사도 있거니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 인재를 긁어모으기 시작하였는데 역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법가계열의 인재를 모시기 위해 아무리 큰 대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인재모시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한비자를 데려오기 위해 한나라와 전쟁도 불사하고 한을 정복하고 나서 한비자를 얻을 수 있었다. 한비자는 대표적인 법가인물이며 제왕통치술을 집필한 인물이다. 진시황은 한비자의 법가사상을 많이 섭취하였고 또 한비자와 동문이었던 역시 법가계열의 인재인 이사(李斯)도 신변에 두었다.

 

이사는 본래 초나라 출신이었다. 말단관리직이 성차지 않아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구학(求學)의 길에 나섰고 순자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가장 앞날이 창창한 진나라에 갔다. 그는 객경(客卿) 출신이라 본토 배기 관료들과 마찰이 심해 아슬아슬하게 쫓겨날 위기에도 처했으나 기민한 술수로 남아 진시황의 통일대업에 오른팔 역할을 하였다. 통일 후에는 진시황에게 분서갱유를 권장하여 황제의 권력 강화에 큰 힘이 되었다.

 

이사는 또 진시황이 천하통일 집권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화폐를 개혁하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심지어 거동륜(車同輪)에까지 신경을 써 모든 분야에서 통일된 하나의 기준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중국역사에서 첫 제국인 진나라가 강대하고 천년만년 이어갈 것처럼 보였으나 이사와 같은 법가의 강력한 밀어붙이기 조치에 의해 사회 여러 분야에서 모순이 격화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즉 분서갱유를 통해 지식인 선비들을 부들부들 뜰게 만들고 강력한 법제도는 백성들을 숨을 못 쉬게 만들어 도처에서 곪고 있었다.

 

그리고 법가 문화는 너무 삭막하여 인간사회 정을 메마르게 하여 사람 살기 굉장히 피곤한 사회를 조성하였다. 형벌이 지나치게 가혹하여 쩍하면 죽임을 당하는 사회, 게다가 연좌죄를 실시하여 한 사람이 죄를 범하면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시름 놓고 숨조차 쉴 수 없는 각박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전반 사회에서 모두 반기를 들지 않으면 이상하리만치 폭정이 삭막하여 재빨리 망하는 길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역사에서는 진승, 오광 농민봉기에 의해 진나라가 망했다고 서술한다. 허나 필자는 그 강대했던 첫 제국인 진나라가 15년이란 극히 단명한 수명을 맞게 된 것은 농민봉기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법가문화가 유가와 도가를 비롯한 기타 문화에 대한 패배라고 결론내리고 싶다. 물론 진승, 오광 농민봉기가 이미 붕괴의 조짐이 보이는 상황에 도화선의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 한무제 덕분에 유생들이 2천년 동안 천하를 지배

 

중국역사에서 첫 제국이었던 진나라는 비록 15년이란 단명으로 끝났으나 그 후 모든 왕조들이 진제국의 정치제도를 2천년 동안이나 지속하여 실행하여 왔다.

 

진제국의 정치제도는 군현제와 관원임명제 실시를 통해 지방 귀족들이 관리하던 토지와 백성을 모두 황제의 소유로 귀속시켜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유방이 항우와의 초한전에서 승리하고 천하의 주인이 되자 어떤 정치제도로 천하를 다스릴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진제국이 재빨리 망한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몸부림 때문이었다.

 

일부 신하들은 진제국이 빨리 망한 것은 잘못된 정치제도 때문이라면서 아예 군현제를 포기하고 본래 주나라 후기 방국제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고, 다른 일부 신하들은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야 마땅한 것인지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릴 수 있느냐고 하면서 군현제가 선진적인 정치제도이므로 이를 도입해야함이 마땅하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유방은 두 부류의 주장을 절충하여 장안과 그 주변 즉 경기지역은 군현제를 실시하고 지방은 방국제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일국양제(一國兩制)’이다.

 

이렇게 정치제도문제는 해결되었으나 무슨 이념으로 천하를 다스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또 풀어야 하고 통치이념과 사상을 수립해야했다.

 

진제국처럼 법가의 이념과 사상을 받아들인다면 또 급속히 망할 것 같아 아예 포기해버렸다. 진제국 시기 백성들이 지친데다 후기 농민봉기와 또 초한전을 겪고 나서 더구나 백성들이 지쳐 있기 때문에 충분히 맘 놓고 편하게 삶을 영위하도록 만들자는데 입을 모았다. 그렇게 하려면 도가의 청정무위이념을 도입해야 했다. 이렇게 되어 한나라 초기 제국통치이념으로서 도가가 선발되었다.

 

백성을 닦달하지 않고 들볶지 않으니 천하가 태평해져 문제와 경제 때 성세를 이루어 그 후 세대들이 본받을 만한 문경지치를 남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제국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한 힘이 없어 흉노를 비롯한 주변 오랑캐들이 집적거리고 제국 내에서도 여기저기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무제 때 오국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군사재정의 뒷돈을 조사해보니 염전(鹽田)과 제철(製鐵)이 제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무제가 염전과 제철의 사유권을 몰수하고 국가소유로 귀속시켜 그때부터 중국역사에 국영기업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한무제는 장건(張騫)을 파견하여 흉노를 제압함으로써 내유외란(內揉外亂)을 제거할 수 있었다.

 

한무제가 풀어야 할 과제로서 남은 것은 한나라 초기엔 도가의 이념이 나름대로 효과를 보았으나 이젠 강력한 제국의 통치이념과는 거리가 멀다고 인식하고 새로운 통치이념을 수립하기로 맘먹었다. 바로 이때 유생그룹의 대표이사 격인 인물이라 말할 수 있는 동중서가 나타나 한무제와 흥정을 붙였다.

 

결과 한무제는 유가를 통치이념으로 삼을 것을 동의하였다. 이렇게 동중서는 황제와의 흥정에서 얻을 것을 모두 얻어 승자가 되었고 그 후 2천 년 동안 유생들이 천하의 권력중심에 자리하게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김정룡 프로필

-)중국동포타운신문 대표

 -장춘대학교 일본어학부 전공

 -연변제1교 일본어 교사 역임

 -著書)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멋 맛 판> 2015

 -著書)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

 <천국의 그늘> 2015년 

 


원본 기사 보기:모닝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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