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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우리역사와 ‘단군신화’(2)

한-중 역사서에 기록된 단군조선과 말살시키려는 중국과 일본

리복재 역사칼럼 | 기사입력 2011/08/30 [13:58]

사라져 가는 우리역사와 ‘단군신화’(2)

한-중 역사서에 기록된 단군조선과 말살시키려는 중국과 일본

리복재 역사칼럼 | 입력 : 2011/08/30 [13:58]

[제2편] 정통사서들이 왜 연구되지 못하고 알려지지 않을까?

▲ 단군조선 영역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    


<위의 동영상은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쓴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에서 밝힌 오성취루에 대한 것을 조사하여 밝힌 동영상>


1만년 전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기록을 하는 일이 쉬울 수가 없다. 더욱이 고증과 문헌 등을 종합해서 정확한 기록을 하기는 참으로 어렵고 또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우리 역사의 기록에 대해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파악된 한나라시대 사마천이란 자가 <산해경>이란 지리지에 4천년 전의 시대를 기록해 놓은 것도 100%정확할 수가 없고, 또한 한나라 무제때부터 역사왜곡을 했던터라 29세의 약관의 나이로 더구나 적국이나 다름없는 동이족 역사에 대해 정확성을 떠나 객관적 서술로서 기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  단군의 어린시절과 어머니 웅녀황비(韓人聖母 雄女皇妃) 초상화  

사마천의 기록을 토대로 여러 관점에서 서술된 사서를 중심으로 비교 분석이 가능한데, 우리의 역사서는 중국과 일본에 의해 불타 없어지고 일본이나 중국이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으리란 추론과 함께 그 사실이 조금은 밝혀지고 있기는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역사에 대해 중공에는 <사기>가 있고 일본에는 <일본서기>가 있고, 우리 역사서 중에 <단군고기>를 비롯해 <규원사화> <한단고기> <부도지> 등이 있다. 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믿을 수 없다며 위서로 단정짓고 있다. 민족진영에서 수없이 반론하고 연구하고 족적을 찾았지만 여러 측면에서 정부의 지원이 없이는 고증이나 발굴 등 충분한 연구를 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절감하였으나, 강단사학이라 일컫는 부류들은 무조건 위서로 몰아붙이고 충분한 고증이나 발굴 등 연구도 하지 않고 있는 것같다.

지금이라도 중고, 일본 고대기록 등과 우리 사서들은 비교하며 활발한 비교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차차 열거해 객관적인 판단을 구하고자 한다.

인터넷판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Tree=0&id=kda)를 살펴보면,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단군(檀君)이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단군(왕검)이 비서갑 하백(非西岬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곧 동부여 왕(東扶餘王)이라고 이른다. 단군이 당요(唐堯 - 요임금)와 더불어 같은 날에 임금이 되고, 우(禹)임금의 도산(塗山) 모임에, 태자(太子) 부루(夫婁)를 보내어 참가하게 하였다.

나라를 누린 지 1천 38년 만인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에 들어가 신(神)이 되니, 지금의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이다.

(원문) 《檀君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 名雄,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降太白山神檀樹下, 是爲檀雄天王。 令孫女飮藥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立國號曰朝鮮。 朝鮮、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濊與貊, 皆檀君之理。 檀君聘娶非西岬河伯之女生子, 曰夫婁, 是謂東扶餘王。 檀君與唐堯同日而立, 至禹會塗山, 遣太子夫婁朝焉。 享國一千三十八年, 至殷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爲神, 今文化縣九月山。


위에서처럼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에 《단군고기(檀君古記)》를 인용하여 한인임금, 한웅임금, 단군임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조선 세종 때 《단군고기(檀君古記)》라는 책이 있었다는 얘기고 조선왕조실록에 공식적으로 인용될 정도로 공인을 받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삼국유사는 위서(魏書)와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단군임금에 대한 기록을 전했는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기(古記)의 내용과 조선왕조실록이 인용한 《단군고기(檀君古記)》의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즉 그 두 책은 서로 다른 책이라 하겠고 단군임금에 대한 기록은 여러 책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실록에 인용한 《단군고기(檀君古記)》는 지금은 왜 전해지지 않고 있고, 도대체 왜 우리 선조가 쓴 고대기록은 후대에 전해지기가 어려웠을까?

[조대기(朝代記)]-> [진역유기(震域游記)]-> [규원사화(揆園史話)]로 이어지는 즉, 조대기는 발해때 단군조선시대를 기록한 책이고 진역유기는 단군조선시대 진한에 대해 쓴 책이라고 전해지며 규원사화는 이 두 책을 바탕으로 쓰여진 현존하는 책이다.

[규원사화(揆園史話)]는 광복 직후 국립중앙도서관 직원이 서울의 한 책방에서 구입하여 1946년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 629번, 고서 2105-1번으로 등록되었다. 조선 숙종 2년(1675년) 때 쓰여진 진본이라는 감정결과가 이미 나와 있다.

[한단고기]는 [규원사화(揆園史話)]등을 모본으로 하여 집필하였고 또 그 내용이 거의 비슷하니 [한단고기] 또한 무조건 위서로 몰아붙일 일이 아님에도 근대적인 술어로 기록했다고 무작정 위서로 단정짓는 행태는 역사가로서, 학자로서, 후손으로서의 양심을 벗어난 반민족적인 자라고 단정지을만 하고, 훗날 이들에 대해 용서없이 가혹하게 단죄를 내려야만 민족정기가 구현되고 민족정체성이 바로설 수 있다.

규원사화, 한단고기, 부도지가 위서라고 주장하고 또 강단사학계의 정설이라면 필자는 한 가지만 묻고 싶어진다. 후대에 창작했다면서 위서라고만 주장할게 아니라 당신들이 위 고서처럼 창작하여 보라. 그러면 위서인지 진서인지 알게 아닌가? 그러면 현행하는 세계 최고상이라 불리어지는 노벨상을 한 천개는 받을 테니까.

위 실록에 나오는《안함로 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와 《삼성밀기(三聖密記)》는 한단고기의 한 부분인 [삼성기(三聖記)]와 상통한다.

또《지리성모 하사량훈(智異聖母 河沙良訓)》은 지리(智異)산의 성모(聖母) 즉 한반도 남부지방의 고대 여성 지도자 즉 [마고할머니]에 대해서 쓴 책으로 보이는데 [부도지]와 상통한다.

그런데 위에 열거된 역사서가 지금은 다 어디로 갔나?

 

조선시대 이러한 사서를 수거한 조정이 이를 모두 불태우거나 없애지는 않았을 것이고 조선의 국립도서관인 [규장각]의 창고에 많은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규장각의 책들은 1911년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이때 넘어간 도서는 5,353부 10만 187책, 각종 기록은 1만 730책. 총독부는 전국에 고대사서를 수거하여 20만여권을 불태우고 귀중한 사료는 일본으로 가져갔다. 또 일본왕실사고에 근무했거나 양심있는 학자들에 의해 우리 고대 사서들이 일본사고에 수북이 쌓여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 예로 일제시대 우리 역사관련 책자에 대해 분류 작업한 박창화씨가 광복직후 최기철 명예교수에게 “1933년부터 12년간 일본 궁내청 쇼료부(書陵部:일명 왕실도서관)에서 우리 상고사 관련 사서를 분류하는 일을 담당했고 그곳에 '단군조선'과 관련된 책들이 쌓여 있다"고 최기철(崔基哲)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털어놨다.”고 최씨가 1999년 언론을 통해 증언했다.

좀더 이해를 돕기 위해 강단사학에서 위서라고 주장하는 [한단고기]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입증한 서울대 박창범 교수'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 대해서 본지 우기수 칼럼니스트의 글을 싣는다.

천문과학으로 증명된 단군조선의 실체
 
서울대 박창범 교수 '단군조선은 신화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 역사'

 

 
 
 
▲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쓴 국내최초 천문학에 의한 역사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 편집부
한민족의 뿌리인 단군조선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기성 사학계로부터 위서 (僞書) 라는 `누명`을 쓰고 버려져 왔던 상고사 서적들에 대한 복권 작업이 젊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관심을 끌었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표준 연구원 천문대의 라대일 박사는 학계에서 방치해 왔던 상고사 서적들의 내용을 천문학적인 방법론으로 검증한 결과 상당 부분이 당시의 실제 상황과 일치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학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약 6개월에 걸쳐 진행된 이들의 연구는 상고사 서적들에 나타난 당시의 천문 현상 기록을 당시의 실제 천문 현상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상당히 과학적인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서적은,  단군조선 시대에 대한 풍부한 역사 기록과 함께 당시의 천문 현상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는 <단기고사>와 <한단고기>에 들어 있는 <단군세기>이다.

<단기고사>는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서와 옛 비문, 현장 답사 등 13년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엮은 단군조선사이다. 제1세 단군왕검으로부터 제47대 단군까지 약 2천여 년의 역사를 역대 임금의 재위 기간과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이름만 전해 오던 것을,  구한말의 한학자인 유응두가 중국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행촌 이암이란 선비가 저술한 단군조선 시대 역사서로,  <단기고사>의 서술 내용과 큰 줄기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

(#) 오행성 결집, 큰 썰물 현상 모두 "사실"
 
이 서적들은 최근에 들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 일부 내용이 과장돼 있다는 이유로 기성 사학계로부터 사료로서 인정받지 못해 왔다. 그러나 재야 사학계에서는 이런 주장이야말로 일제 식민 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통박해 왔다.

재야 사학계는, 일제 때 단군조선 말살 운동에 앞장섰던 일인 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조선의 고대사 관련 사료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밖에 없다. 그 밖의 사서는 사서가 아니라 위서다."라고 주장한 것을 기성 사학계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해 온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한 소국의 역사로 개악하고자 했던 일인 학자들에게,  적어도 고대 조선이 대륙을 사이에 두고 중국 민족과 자웅을 겨뤘던 고대 강국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이들 상고사 서적들은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단기고사>와 <단군세기> 에는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 모두 10군데,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등 육안으로 보이는 다섯 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 결집 현상'이 한군데,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이 한군데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천체 현상은 물리 법칙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전개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특정 시점의 행성들 위치를 알면 슈퍼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이 행성들의 과거와 미래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 연구 결과, 이 사서들이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무작위 적으로 날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것은 오행성 결집 현상에 대한 기록이었다.

 
*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
<단기고사>나 <단군세기> 기록에 따르면, 제13대 단군인 홀달단제 50년,  즉 BC 1733 년에 다섯 개의 별이 서로 한군데에 모인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돼 있다. 즉 '무진 오십년 오성취루(戊辰 五十年 五星聚婁)' 라는 한 줄의 글귀로,  무진 50년에 다섯개 별이 루성(婁星) 근처에 모였다는 뜻이다. 



▲   오성취루 현상.

박교수팀은 기록에 나타난 BC 1733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백50년 사이에 오행성의 결집이 일어난 시점을 샅샅이 조사했다. 조사 결과는 처음에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BC 1733 년으로부터 바로 1년 전인 BC 1734 년에 매우 뚜렷한 형태로 오행성이 서로 아주 가까워져 있는 현상이 발견된 것이다. 이 해 7월 13일 초저녁 다섯개의 별은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여 있었다.

이 날은 왼쪽 하늘에 초승달이 비스듬하게 떠 있어, 별빛이 한층 더 찬란하게 빛났었다. BC 1733 년을 기점으로 하여 5백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오행성이 이보다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백80년 전인 BC 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밖에 없었다. 
 

▲     BC 1733년 홀달 단제 시대 단군 조선인들이 보았을 오행성의 결집 현상을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역으로 추적하여 컴퓨터 합성기법으로 시각화했다.

박교수는 "기록 연수보다 1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약 3천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이다." 라고 말했다. 만약 후대의 누군가가 이 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해 넣었을 경우,  이것이 서로 맞아떨어질 확률은 박교수의 계산 결과 0.007%,  즉 "세계 지도에서 임의의 한 장소를 지목했을 때 그것이 대한민국일 가능성" 에 비유될 정도로 매우 희박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 큰 썰물 현상
오행성 결집 현상과 함께 박교수팀이 주목한 것은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이다. 두 사서 모두 제29세 마휴단제 9년 (BC 935년) 때 `남해조수퇴삼척(南海潮水退三倜)` 라 하여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적혀 있다.

오행성에 대한 조사와 마찬가지로, BC 935년을 기점으로 전후 2백년 간에 나타난 조석력의 작용을 조사해 본 결과, 기록에 나타난 해로부터 4년 후인 BC 931년 11월 22일에 이 기간중 가장 큰 조석력이 작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기록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전후 2백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4년 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대목이라고 박교수는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후대의 누군가가 작위로 이 기록을 써넣었을 가능성은 0.04%에 지나지 않았다.


* 일식기록 분석
박교수팀이 처음 연구에 착수할 당시 가장 크게 기대했던 것은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다. 일식 현상은 그것을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때문에,  일식 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 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단군 조선기에 실제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는 일식 현상이 약 1천 5백회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비해 기록은 10개밖에 안돼 의미 있는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다만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 기록이 주나라 때인 BC 776년인데 비해,  우리의 경우는 제2세 부루단제 때인 BC 2183년 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어 중국 기록보다 적어도 1천 4백여 년이나 앞선다는 점,  그리고 10여 개의 일식 기록 중 다섯 개의 기록이 실제 현상과 일치하고, 그중 두개는 해뿐 아니라 달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 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박교수는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 박교수팀이 내린 결론은,  이 사서들이 그 동안 일인 학자들이나 국내 기성 사학계에서 주장한 것처럼,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전적으로 날조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은 왜곡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를 확인하기도 어렵지만, 천문 현상은 윤색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사서들의 상당 부분은 단군 조선 당시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라고 박교수는 말했다.


(#) 기성 사학계도 연구 결과 인정

박교수팀의 연구는 그 동안 이들 사서의 내용에 대해 상당 부분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기성 학계의 두터운 벽 때문에 실제 연구 과정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던 고조선사 연구 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윤내현 교수 (단국대 사학) 는 "그 동안은 주로 중국 사서들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기록들에 의존해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연구를 계기로 서지학자들이 참여하여 이 사서들의 내용을 좀더 정밀하게 검토한다면, 단군조선사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일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라고 말했다.

박성수 교수 (정신문화연구원, 사학)는 "기존 학계의 그릇된 통념을 깨는 획기적인 연구다. 이들 역사서의 내용을 전부 믿을 수는 없다 해도, 연구도 해보지 않고 이를 백안시해 온 학계의 풍토는 개선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박교수팀의 연구에 대해서는 그 동안 상고사 서적들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온 `한국 상고사학회` 측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이들의 연구 결과가 기성 사학계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상고사학회는 10월에 발간할 예정인 이 학회 연구 논문집 <상고사학보> 에 박교수팀의 논문을 게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단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와 관련해 상고사학회의 실무를 맡고 있는 최몽룡 교수 (서울대, 고고학)는 "연구 결과의 중요성을 인정해 논문집에 싣기로 결정했다. 단군 조선에 대한 연구는 결국 한국 문화의 뿌리에 대한 연구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문헌사적인 연구뿐 아니라 자연과학적인 연구도 활발하게 벌일 필요가 있다" 라고 말했다.

 
이와같이 천문을 관측하고 기록했던 단군조선을 '신화'라고 말하고 있는 매국식민사학계는 정말이지 오강들고 벌서야 한다. 이런 기록이 있다는 것은 그 당시 우리 선조들이 천문을 계속 관측하고 있었단 말이다. 천문에 대한 기록은 국가가 아니면 어려운 일이다. 이토록 위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던 나라 단군조선을 아직도 신화속의 이야기라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될법한 이야기인가!!! 위대한 자기 조상을 신화 운운하는 식민사학계는 전부 쪽바리의 자식들이나 뛔놈의 후예들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망발을 함부로 말한단 말인가?


[참조/ 인터넷판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단군고기(檀君古記.한국고대사). 역사서에 기록된 단군과 조선] 

[제3편]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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