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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우리역사와 '단군신화'(3)

700년의 민족? 단군때 만든 '선기옥형',3900년 후 재현한 '혼천의'

리복재 역사칼럼 | 기사입력 2011/09/02 [08:00]

사라져 가는 우리역사와 '단군신화'(3)

700년의 민족? 단군때 만든 '선기옥형',3900년 후 재현한 '혼천의'

리복재 역사칼럼 | 입력 : 2011/09/02 [08:00]

[제3편]단군조선의 실체와 삼천구백년 후 조선시대에 재현된 문화와 과학

일제시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말살하고 왜곡하기 위해 생겨난 ‘조선사편수회’가 있다. 민족반역자로는 이병도와 신석호가 대표격이며 단군조선 등 우리 상고사가 ‘신화’라며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그저 전설이라고 명문화하여 지금껏 종교주의자들과 호홉을 같이하며 우리 조상인 한인임금, 한웅임금, 한검임금을 모시면 우상숭배라고 맹공을 퍼붓고 단군상을 훼손했던 것으로 민족정체성을 뿌리채 없애려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해왔다.

또 이들 민족반역자들은 광복 후에도 마치 우리나라를 위해 독립운동한 것처럼 교묘하게 속여 국가 요직을 두루 두루 차지했다. 사망하기 몇해전 역적 이병도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머지 ‘단군은 실존인물이며 조선은 실제로 있었다’고 참회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후학들과 강단사학계는 지금까지 주장하고 밥벌이 수단으로 이용하여 왔던 것이 화가 미칠까 봐, 노망한 미친 늙은이로 취급해 버렸다. 그들이 지금 우리 역사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다. 그러니 어디 역사바로세우기나 민족정기가 바로 설 수가 있는가?

그런데 인터넷판 조선왕조실록 등을 살펴보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즉 우리의 역사를 말살하고 축소 내지 왜곡하는데 앞장선 일제만을 위한 식민사학자와 어용사학자들이 유일하게 인정한 역사서가 있었다.

바로 <고려사열전 중 백문보전>이다. 고려 말 공민왕 때 백문보(?~1374)가 <삼국유사> 등을 토대로 몽골 즉 원나라가 물러간 뒤 민족정체성과 정기를 바로세우기 위해 단군기원을 쓰자고 건의한 내용이다.

이들의 말만 믿고 광복 후 지식인과 지도자들은 우리 역사가 반만년(오천년)이라고 외쳐 댄 것이다. 이는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세웠다고 주장하는 데, 그 연대는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고려 말인 13세기 말에 건의한 것을 근거로 꼽고 있다.

그러나 이들 주장을 엄밀히 따지고 보면 반만년이 아니라 천년도 채 안 된 700년 정도이다.

▲ 삼일신고와 상응하는 단기고사. 사진은 캠퍼스와  곱자를 든 복희와 여와    

이것이 우리 역사라고 함정을 파놓고 진실을 숨기고 역사를 말살했던 일제와 민족반역자들의 의도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속임수는 단군 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신화로 치부해 버렸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일제가 가져가지 않고 남겨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라는 점이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바로 이점을 우리 역사학계나 모든 국민이 올바로 알고 대처하여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확립해야하는 의무가 있다. 정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다. 그간 우리 지도자들이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강조할때마다 그들 민족반역자와 일제는 얼마나 박수치고 통쾌해 했을까?

그렇다면 이들의 간악한 속임수에 속지 않고 한중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과 선조들의 기록을 살펴 대처하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우리 역사를 찾는 방법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서라도 면밀하게 살펴보고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아야 한다. 그저 책상머리나 학생들에게 잘못된 역사강의를 들려주고 밥이나 빌어 쳐 먹는 인간들을 제쳐놓더라도 양심있고 의식 있는 민족사학자 몇명만 있어도 된다. 필자가 지금까지 또 앞으로 열거해 놓은 것만이라도 충분히 연구한다면 우리 역사는 올바르게 정립 될 수 있고 민족정기 구현은 물론 민족정체성도 확립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말 동녕부를 토벌할 때 금주와 복주 등지에 방문(榜文)을 부치기를 '우리나라는 당요와 같은 때 건국했다(「용비어천가」 42장 주)' 하고, 고려 공민왕때 백문보(白文寶)가 언사소(言事疏)를 올리기를 '우리 동방은 단군이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3천6백년이 되었다(「고려사」<열전>)'고 했다.

또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세종실록」<지리지>에 단군이 다스렸다(檀君之理) 한 것을 단군의 후손(檀君之裔)이라 적고 있으며, 김부식의 「삼국사기」<동천왕조>에 '평양은 본시 선인왕검의 댁(宅)으로 혹 말하기를 왕의 도읍지를 왕검(王儉)이라 하였다'하니,

정인보는 이것이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이 비판한 것과 같이 사마천의 「사기」<조선전>에서 위만을 언급하다가 '왕지도왕검(王之都王儉)'이라 나오는 글귀를 표절한 것이라 말한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이 ‘단군어미가 짐승 곰이었다 하더라'고 하는 신화문제에 대해 정인보는 다음과 같이 잘라 말한다.

“'고기' 또는 '본기'에 신화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신화 부분은 신화로 돌아갈 것이로되 신화 아닌 부분까지 신화로 끌어들일 수 없다고 강력히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나섰다.

"이름하여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이때가 중국의 당요 즉위 50년인 경인년에 해당하는데 도읍을 평양성에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號曰檀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 都平壤城 始稱朝鮮)"는 부분까지 신화라 할 수 없지 않는가.“라고 삼국유사의 잘못됨을 정면으로 거론하며 지적한 것.

사마천이 서이족에서 서하족으로 그리고 화하족으로 발전해 나아간 지나족의 중심 역사를 독립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 뿌리가 되는 동이족의 역사를 지나족의 역사에 부속적인 것으로 비틀어버렸는데 먼저 나온 이 철옹성의 책만은 어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단군조선의 기록이 지리서의 형태 속에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단군조선이 실체했고 단군왕검이 실제 존재했다는 것을 중국 최고로 오래된 지리서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단군신화’라며 전설로 치부한 자들은 도대체 어느나라 국민이고 민족일까?

▲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모셔져 있는 “한인, 한웅, 단군왕검”의 초상화. 중국 사서에 구월산은 단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산이기 때문에 그곳에 삼신전을 모시고 제사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니산에는 단군 할아버지께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제천단이 지금도 남아있다. 대한제국때까지 집집마다 이 영정을 걸어  정안수 떠놓고 빌었던 우리민족. 식민지화되면서 사라진 우리의 뿌리...  종교때문에 우리들은 조상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반성해야 한다.  [필자 주] 



정인보가 주장한 내용을 더 살펴 보자.「삼국유사」보다 앞선 기록인 신라인 박제상이 고기(古記)를 인용한 「부도지(符都志)」제 1장에 "단군 임검이 불함산에 천부단을 쌓고 그곳을 조선(朝鮮)이라 하여 사해(四海)를 화합하게 했다"고 했다.

대진국(발해.중국측 사료)을 개국한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은 단군 조선의 2천 년 역사를 대진국어로 기록하게 한 「단기고사(檀奇古史)」 역시 단군 조선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 책은 그 후 3백 년 뒤 황조복(皇祚福)이 한문으로 번역 출판했다.

「상고조선 3천년사」를 지은 최재인(崔在仁)은 발해 대조영(699-719) 때 발간된 「단기고사」와 그 후 천년이 지난 조선 숙종(1675-1720) 때 북애자 노인이 저술한 「규원사화(揆園史話)」와 독립군이자 애국지사 계연수의「환단고기」가 모두 단군조선의 역대 년표와 역대 왕명이 일치할 뿐 아니라 단군세가(檀君世家)까지 모두 일치한다 말하고,

「단기고사」가 「부도지(符都志)」보다 뒤의 것이기는 하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보다는 4백 여 년 앞서 단군 조선을 입증했으며 일연의 「삼국유사」보다 5백 여 년이나 앞서 단군 조선을 입증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단기고사」가 우리 민족에게 널리 전해지지 못한 것은 발해가 건국된 지 2백 여 년 만에 거란의 요(遼)에게 망한 뒤 고려가 금의 눈치를 살피느라 발해사마저 우리 국사에서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므로 해서 「단기고사」가 널리 전해질 수 없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미수 허목(許穆)의 「동사」는 단군 개국으로부터 시작하여 환웅이 9이(九夷)의 조상이라는 것과 환웅의 신시(神市)로부터 단군 조선이 개국되었다는 것과 주(周) 무왕의 때에는 단군조선의 단궁(檀弓)을 수출했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단군이 개국한 조선은 동방일출 광명의 진리를 상징하는 국호라는 설명과 역대 단군 세가에 대한 설명과 함께 역대 단군의 통치가 1048년간의 역사라는 것을 설명하고 기자조선으로 설명이 이어지는 책이다.

한편,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중원의 요 임금때 단군이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으로 했다는 것과 단군은 천자 성손(聖孫)이라는 것과 그때의 9이(九夷)가 단군을 임금으로 섬겼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우리민족의 옛 이름은 조선(朝鮮)으로 조선이란 광명을 뜻한다 했다. 조선족은 최초에 파미르 고원 혹은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인 간방을 찾아 동방으로 진출, 백두산 일대와 그 부근에 자리잡아 조선이라 불렀다 했다.

단재는 조선족이 처음 개척한 나라가 부여이며, 한국문화의 원시시대 <수두>의 발원지가 옛 이름이 부여인 만주의 송화강 연안 하얼빈 부근이라 말한다.

또 단군왕검은 지나의 수재(水災:9년 홍수) 구제차 2세 단군이 된 장남 부루 태자를 사천성 유도( 都:지금의 중경) 양자강 상류을 굽어보는 도산(塗山)에 서행(西行)케 하여 순(舜)의 명을 받은 하우(夏禹)에게 덕치의 교의를 가진 수두교를 전하는 선구적 업적을 성취하게 했다고 말한다.(이로 인해 서경 속에 등장하는 3신 상제님을 치제하는 상제 봉선(천제) 의식과 천일, 지일, 태일의 3신관이 자리잡게 됨)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단군 조선과 기자가 5천명의 피난민과 함께 조선에 가서 무왕의 봉작을 받아 조선 왕이 되었다며 조선에 관한 모든 기록에 항상 기자조선을 근거 삼아 단군(고)조선을 축소시켰고 복속시키려는 중국

그 뒤, 주(周) 나라가 흥하자 단군을 하늘로 받들며 도산신서(塗山神書) '홍범구주'를 신봉하는 은나라 왕족 기자가 무왕을 피하여 수두교의 조국인 조선으로 동래했다고 말한다.(이와 더불어 강태공은 동방 신교의 도통(道統)을 중국의 한족(漢族)에 전수한 바 있다) 

신농의 후손에 강태공은 동방 신교의 도통(道統)을 중국의 한족(漢族)에 전수한 사람이라. (道典1:11:6)

지금은 인터넷 시대이다. 한문이 어렵다면 인터넷판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한글로 되어 있어서 찾기도 쉬울뿐더러 이해하기도 쉽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단군에 대한 기록에 대해 <단군고기(檀君古記)>가 많이 인용되어 있다. 산국유사나 삼국사기 같은 사대주의 입각해 저술한 역사서보다는 《단군고기》를 연구하여 역사를 바르게 정립될 시기가 되었다.참고로 단군에 대한 기록을 좀 더 열거한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의 기록이다.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與堯同時.
위서에 말하기를,지난 2천 년 전,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하였으니, 요임금과 같은 때이다. ... 《삼국유사》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일연이라는 중이 위서와 고기를 들먹이며, ‘단군의 어미가 짐승 곰이었다고 나오더라‘하고 없는 사실을 왜 기록했을가? 누차 주장했지만 일연은 스키타이 족속으로 사대모화사상에 찌들어 그 관점에서 기록하고 이 땅을 불국정토로 만들려고 그 짓을 했을 것. 조선사편수회를 맡은 일제어용학자 금서룡(이마니시 류)이란 자가 훌륭한 책이야‘ 라며 무릎을 치며 기뻐하고는 ’단군신화‘로 치부해 버렸다. 이때부터 우리 민족은 뿌리가 없는 즉, 7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초라한 민족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땡 중 일연이 인용했다는 위서와 고기에는 단군 어미가 곰이었다는 기록이 없다. 이러한 사실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가증스럽고 위선적인 자들의 말만 믿지 말고...

《세종실록》〈오례>에 인용된 《위서》의 기록이다.
《魏書》云, 檀君王儉 開國號朝鮮, 與堯同時.
위서(魏書에 말하기를, 단군 왕검(檀君王儉)이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하였으니, 요임금과 같은 때이다. ... 《세종실록》〈오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단군 왕검에 대한 기록이 있다.
王以丸都成經亂, 不可復都, 築平壤成, 移民及廟社
平壤者 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왕이 환도성이 난리를 치러 다시 도읍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디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혹은 ‘왕의 도읍 왕험’ 이라 한다.


《세종실록》〈지리지〉「평양부」에서는‘당요 무진년’까지 언급되고 있다. 평양에 도읍한 단군을 전조선과, 기자의 후조선 41대, 위만조선, 한사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알려져 있었던 내용들을 모아 정리한 것.

(강화는) 고구려의 혈구군(穴口郡)으로,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한다. 마리산이 남쪽에 있다. 산 정상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세간에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이라고 한다. 전등산은 삼랑성이라고도 하는데, 세간에 이르기를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게 했다고 한다. 문화현(文化懸) ... 유주. 원래 고구려의 궐구(闕口). 구월산(세간에 이르기를 아사달산), 장장평(세간에 이르기를 단군이 도읍했던 곳으로, 곧, 당장경), 삼성사(三聖祠 ; 단인, 단웅, 단군의 사당)이 있다.

▲ 단군조선시대의 선기옥형(천문)을 재현해 낸 조선 세종시대의 혼천의(선거옥형 이라고도 함) .


《조선왕조실록》에 단군과 조선에 대한 실체뿐만 아니라 구월산과 단군사당의 제례 의식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다. 살펴 보자.

단군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을 받은 임금이며, 기자는 처음으로 교화를 일으킨 임금입니다. ... 태조, 예조판서 조박

우리 동방은 단군, 기자가 모두 그 역년이 1천 년이 됩니다. ... 태종 5년 의정부 상서

단군, 기자가 모두 1천 년이며, 한 사람이 아닌 왕조였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 대를 이어온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평양은 단군과 기자가 도읍을 세운 뒤로 서북지방의 본영이 되었습니다. ... 태종 7년 평양 부윤 윤목

즉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모두 서북의 평양에 도읍하였다고 주장한 것으로, 이에 대해 세종대왕(9년)은 “단군이 삼국(진한 마한 번한)을 통일했는지 내가 듣지 못하였다.”라고 답변한다.

단군 조선 때는 이름을 아사달산이라 하였고, 신라 때에 궐산(闕山)로 고쳐 불렀으며, 그 때 문화현을 처음으로 궐구현(闕口縣)으로 이름하였습니다. 재의 중허리에 신당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처음 세웠는지 알 수 없으며, 북쪽 벽은 단웅 천왕, 동쪽 벽은 단인 천왕, 서쪽 벽은 단군 천왕이니, 문화현 사람들은 항상 삼성당(三聖堂)이라 부릅니다. ... 세종 10년 우의정 유관

즉 단군과 관련된 지명이 신라 시대 이전에 기원하였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위에 언급된 궐(闕)에 대하여《규원사화》에서는 ‘궐(闕)년’은 1만 년을 뜻하고, 단군 이전의 환웅시대를 궐백년(1만 1백 년) 또는 궐천 년(1만 1천 년)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황극경세서》의 1원(元)인 10,800년과도 비슷하다.

태고의 처음에 혼돈이 개벽하여, 먼저 하늘이 생기고 나중에 땅이 생겼으며, 이미 천지가 있은 연후에 기가 화하여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어찌 수십만 년 뒤의 요임금 때에 다시 기가 화하여 사람이 생겨나겠습니까. ... 세종 10년 우의정 유관

그 근거는 알 수 없지만, 하늘과 땅의 역사를 수십만 년으로 추정하였습니다. 단군이 요와 함께 즉위한 때부터 기자 조선·신라가 모두 1천 년을 누렸고 전조의 왕씨 또한 5백 년을 누렸습니다.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3천 9백 년이 되었습니다. 성종 12년 남원군 양성지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게 된 것은 상고 시대부터인데 단군이 맨 먼저 나왔으며, 기자가 동쪽으로 건너 온 이후로 삼한으로 나뉘고 구이로 흩어져 있다가, 신라와 고려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습니다. ... 정조 23년 지중추부사 홍양호

지금까지 조선시대 단군조선에 관해 임금과 신하가 말한 대목을 열거해 보았다. 놀랍지 않는가? 그런데도 ‘단군신화라’고 떠벌린 자들이 지금도 도처에 갈려 있다. 특히 친일친미사대주의자와 특정종교론자들에 의해서....신자나 신도들은 신을 믿지 않고 구세자 또는 구도자 행세를 하며 자칭 일부 종교지도자인 이들을 믿고 따르는 결과 무지에서 또 자신들 외 다른 종교는 이단이나 사탄으로 취급하는 무식자 내지 광적인 자들이 되었고 자신의 뿌리나 조상도 모르고 사는 천한족속이 된 것이다. 안타까울 뿐이다. 하루라도 빨리 역사의 진실을 알았으면 한다. 
 
《세종실록》, 단군조선의 문화 과학기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에 주목해야

▲ 선기옥형. 이를 근거로 혼천의가 재현되었다. 북두칠성과 비교해보면 답이 나올 것 .   

옛일이 이미 멀어서 제도가 퇴폐하여졌으니 책에 실려 있은 들 그 뜻을 뉘가 알리오. 신성하신 임금이 시대에 응해 나셔서, 요·순의 법을 받아 표(表. 수표)와 누(漏. 물시계)와 의(儀. 천체)와 상(象.천체)의 옛제도를 회복했네. 요가 희·화에게 명하여 책력에 일월성신을 형성하고, 순은 '선기옥형[璇璣玉衡] '을 만들어 칠정을 바로잡았으니 ...

‘혼천의(渾天儀)’의 경우, 하늘의 축에 의해 바퀴가 회전하도록 되어 있으며, 365 1/4의 눈금이 새겨져 있다. 그 유물로 보더라도, 당시 나무를 다루는 기술은 조선 세종때의 기술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부도지》에서는 ‘자방(磁方)’을 이용하여 도읍을 정하는 내용이 나오는 단군조선 당시에도 방향의 측정에 자석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즉 자북이 북동쪽이라고 했는데, 전문가들이 연구하면 연제든지 확인이 가능하고 이미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밝혀낸 부분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이게 사실이라면 혼천의가 재현될 시점으로 봐서 3천 9백년 전에 단군조선 문화가 이토록 발전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를 근거로 3900년경 후에 재현하면서 기록에는 ‘요·순 임금’이 등장하는 것은, 한나라 이전의 잊혀진 제도였지만 조선 세종때 재현해 낸 것으로 연구가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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