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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력사 인물] 우륵과 가야금

이형주 기자 | 기사입력 2020/05/29 [21:29]

[조선력사 인물] 우륵과 가야금

이형주 기자 | 입력 : 2020/05/29 [21:29]

 

▲ 우륵 초상화. 사진=조선의 오늘  © 이형주 기자

 

조선의 력사는 대한민국의 역사와는 많이 다르다. 우리는 일제가 조작해 만든 조선사35권의 식민사관과 이병도일당이 조작해 만든 대국사관의 반도사관을 중심으로 한국사와 국사교과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반면, 북은 식민사관과 반도사관을 탈피한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이 남과 북은 역사의 특징을 보는 관점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본지에서 "조선을 바로 알아야 통일이 가까워 집니다"라는 신념으로 북조선이 알리는 '조선력사'를 인터넷매체 조선의 오늘이 공개한 게시물을 여과없이 게재한다.[편집자 주]  

 

▲ 가야금. 사진=조선의 오늘     © 이형주 기자

 

우륵과 가야금

 

우륵은 6세기에 활동한 유능한 음악가이다.

평민출신인 그는 본래 가야국 성렬현 사람으로서 오래동안 왕궁악사로 복무하였다.

그는 가야국이 신라에 통합된 뒤 제자 니문과 함께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류랑연주를 해오다가 신라왕의 신임을 얻어 국원에서 살면서 음악창작과 음악가양성에 힘을 기울이였다.

우륵은 여러 지방의 민요들에 기초하여 많은 악곡들을 창작하였으며 그가운데서 《하가락도》, 《물혜》, 《하기물》, 《사자기》, 《거렬》을 비롯하여 12곡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의 제자들가운데는 법지, 계고, 만덕 등 재능있는 음악가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수많은 곡을 창작하는것과 함께 가야금을 널리 보급하였다.

이렇듯 작곡가, 연주가, 교육자로서 널리 알려져있는 우륵은 훌륭한 민족악기인 가야금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 나라 음악문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우륵이 가야봉건국가에서 만들었다고 하여 《가야금》이라고 불리우는 민족악기는 1년 12달을 상징하여 12줄로 되여있던 초기의 모양을 형태상 큰 변화없이 계승하여오다가 조선봉건왕조 후반기에 이르러 13줄짜리로 소리폭을 넓히고 조현법도 한가지 방법으로 고착되게 되였다.

21줄짜리로 된 오늘의 가야금은 1960년대에 현대적으로 개량발전된것이다.

가야금은 독주악기로 쓰일뿐아니라 관현악, 기악중주, 반주 등에서 선률 및 리듬악기로도 쓰인다.

가야금은 탄력이 있으면서도 그 울림이 부드럽고 우아하며 연주자세가 률동적이고 아름다울뿐아니라 연주법이 다양하고 배우기도 쉬운것으로 하여 우리 인민들의 사랑속에 널리 보급되고있다.

류금열 20/06/01 [10:05] 수정 삭제  
  고구려 시조 추모대제 12년(기원전 26년)에 황룡국(黃龍國)은 고구려에 복속하여 역사 속으로 멸실되었으나 황룡국의 국왕이었던 우인(于仁)의 후예는 고구려 왕조에 명문벌족으로 대성족을 이루었습니다. 우인의 후예는 단일성씨로 가야국에서 악사로 활동한 우륵의 시조와 고향을 양분할 때 우륵의 시조는 황룡국의 우인이 부합하며, 우씨가 번성하여 분파를 형성하면서 도처에 세거했는데, 그 가운데 우륵의 고향은 《삼국사기》에 “악사 성열현인 우륵”에서 성열현은 미상이나 백제 성열성은 지금의 청풍에 성열성이 소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륵 가야국 성열현 사람”은 “우륵 청풍 성열현 사람”으로 정립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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