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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도구로 보는 사회' 윤미향 사태, 무엇이 문제인가"

양순임 유족회장 "위안부할머님들은 윤미향을 무서워했다. 그는 공을 가로챘다..."

이하천 소설가 | 기사입력 2020/06/09 [11:51]

"'인간을 도구로 보는 사회' 윤미향 사태, 무엇이 문제인가"

양순임 유족회장 "위안부할머님들은 윤미향을 무서워했다. 그는 공을 가로챘다..."

이하천 소설가 | 입력 : 2020/06/09 [11:51]

 [플러스코리아 이하천 소설가] "이 글을 기도하는 자세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글을 읽어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 속에 들어와 있는 진영논리라는 허물을 다 벗어던지고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의 잣대를 대고 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반론이 있다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 지난 5월 7일 이용수 피해할머니의 기자회견으로 촉발된 윤미향과 정의연(정대협), 나눔의 집에서 위안부할머니들을 이용한 부정비리 사태...     © 편집부

▲ 이하천 소설가     © 편집부

 

원제: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의 시천주를 중심으로 본

윤미향 사태, 무엇이 문제인가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는 왜 시천주(侍天主)를 중심사상에 놓았는가? 시천주는 인간 하나 하나가 하늘님을 모시고 있는 귀한 생명체라는 뜻이다. 이 개념은 약자들에게 더 해당 되는 개념이다. 조선시대의 그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어린아이, 여성, 머슴들 그 외 사회적 약자들은 강자들이 휘두르는 시퍼런 칼날에 인정사정없이 쓰러져갔다. 그 참혹함을 본 수운은 강자들로부터 한스럽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약자들을 보호하려고 시천주를 중심사상에 놓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게 안 되면 어느 사회든 훌륭한 사회로 나아갈 수 없고 또 그게 안 되면 그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수운 최제우는 160년 전에 본 것이다. 놀랍게도 이 개념은 현 단계 우리사회에 작동해야 하는 민주화의 내면화라는 핵심과 맞닿아 있다. 우리사회는 아직도 하루 37명씩 자살을 하고, 세계 그 어디에도 없는 한이라는 심리적 병을 가지고 있고, 하루가 멀다 하고 강자들의 갑질에 피를 토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민희

최민희는 TV에 나와서 정의연의 원대한 사업규모를 들먹이며 위안부 할머님들을 돌보는 문제는 그 모든 사업의 n분의 1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주 우리는 이렇게 위대한 일을 해요라는 듯 이것저것 나열했다. 그런데 돈은 할머님들을 내세울 때만 들어왔다. 진영논리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그게 맞다 면 왜 할머님들을 내세우며 돈통을 돌리는지 의문이다. n분의 1만 돌려야하지 않나?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정의연은 문화권력을 획득한 집단이다. 학벌들도 화려하다. 정부지원도 후원금도 빵빵하게 들어온다. 이 말은 돈과 명예를 검어 쥔 최고의 강자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학벌도 없고 열악한 생활을 하는 할머님들은 차마 말을 못하고 30년이 지난 이제야 말을 할 수 있는 약자입장이다. 이 두 집단에 갈등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보지 않아도 강자들의 횡포로 봐야 한다. 약자들은, 더군다나 위안부로 끌려간 수치심의 깊은 상처를 가진 그런 최하위 약자들은 세계적인 큰 뜻을 부르짖는 강자 앞에서 정상적인 대화의 창구는 막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용수 할머님을 통해서 나온 한스러운 외마디 비명소리 ‘30년 동안 당할 만큼 당했고 속을 만큼 속았다를 우리사회는 듣고야 말았다. 돈은 생각하지 말고 자신들의 원대한 뜻을 따르라고 할머님들을 설득을 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뜻을 세운다

우리는 뜻을 세운다는 말을 한다. 사실 자신이 사회적 문제에, 혹은 국가적 문제에 품은 뜻을 펼칠 수만 있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거기다 자금까지 넉넉하게 들어온다면 금상첨화다. 정의연 전 대표 윤미향은 이처럼 좋은 일의 장을 만난 것이다. 거기다 국가적으로도 국민들도 그 뜻에 동참해 실제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이런 지원을 할 때는 일본과 과거사 싸움을 잘 하라는 면도 있지만, 나라와 시대를 잘못 만나 한스러운 삶을 살아 온 통곡할 정도로 가여운 위안부 할머님들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 지원한 면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뜻이 있어도 자신의 생계비와 가족, 군사들을 먹일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실제로 행동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럴 때 아이템을 잡았다는 말을 한다. 윤미향은 위안부 할머님들이라는 아이템을 잡았고, 그렇다면 이 할머님들을 시천주의 마음으로 대했어야 했다. 처음에는 그랬을 것이다. 상황도 열악했을 것이고.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뜻이 자꾸 커졌고 할머님들은 점점 더 작아졌고 그 외 다른 뜻도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다른 뜻이란 여러 사업계획과 안성쉼터를 산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닌 것 같다. 무엇이 더 드러날지 정말 겁나는 일이다. 사실 외곽지역에 그런 집을 짓고 사는 사정을 조금 아는 나로서는 많은 게 의아하다. 우선 그렇게 비싸게 사서 그렇게 싸게 팔았다는 것, 집을 살 때 그런 식으로 계산되지 않는다는 것, 관리하는 사람까지 두었다는 것, 그런 집은 아주 부자가 아니고서야 관리하는 사람까지 둘 필요가 없다. 근처 마을 사람 중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청소를 하게 만들고 cctv를 달아 놓으면 된다. 거기에 무슨 귀중품이 있어서 그런 구도를 잡았는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자기 돈이라면 그렇게 했을까? 그리고 할머님들을 상주시킨다는 것으로 현대중공업에서 후원을 받고 전혀 그런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태가 터질 즈음 바로 그 집을 반값에 팔았다. 이것저것 다 합쳐서 후원이 들어온 것 10억을 날려먹은 것이다. 정의연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다.

 

가부장적인 정신적 틀

우리는 분명 대의를 사랑한다. 뭔가 근사한 일, 위대한 일,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 같아서 현단계에서 즉 많은 것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사회이기에 더욱 더 그렇다. 그러나 그 대의는 누군가의 희생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전시대 한국남성들은 여성을 희생의 대상으로 보았다. 희생하지 않는 여성에게는 웬지 화가 나는 심리, 남성들에게도 심각힌 마음의 상처가 있었다는 증거다. 그것은 가부장적인 정신적 틀에서 파생된 심리적 측면의 부정적 파편들이다.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 세대는 그 파편들을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듯이 온몸에 맞으며 견뎌야 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 파편들은 우리사회 곳곳에 뿌려져서 그때그때 마다 형체를 바꾸고 새로운 옷을 갈아입으며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윤미향은 여성이면서도 이런 시대에 맞지 않은 파편들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여성도 권력을 가지면 그 파편들을 생생하게 재현시킬 수 있는 심리적 기반이 있다는 논리가 형성된다. 여성이라고 다 선이고 남성이라고 다 악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도 역시 심리적 상처가 기반이다. 문제는 이 상처가 평소에는 숨어 있다가 때를 만나면 심리적 배경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 희생의 대상으로 위안부 할머님들을 지명한 것이다. 온갖 창피한 마음의 상처를 갖고 있는 그 할머님들을 앞세우며 대의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그게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 자신이라면 어떻겠는가? 이럴 때 마다 얼마나 자신들의 자긍심에 상처가 왔겠는가? 사실 이들의 비명소리는 2004년에도 나왔었다. 고 심미자 할머님은 위안부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리는 악당들이라는 극단의 언어를 썼다. 나눔의 집은 돈으로 부귀영화를 꿈꿨고, 정의연은 대의라는 자신들의 열정을 명분으로 정신적 부귀영화를 꿈꿨다. (실제 돈으로도 꿈을 꿨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심미자 할머님의 목소리를 에이하며 모른 척했다. 왜 모른 척 했느냐에는 다른 요인도 있었겠지만, 일본에게 우리의 모습을 들키기 싫었던 것이 가장 중요하게 작동했던 듯싶다. 얼른 덮은 것이다. 자신들을 내세우며 성금을 걷는 것, 그리고 자신들에게는 별로 실제적 이득이 오지 않는 것, 그러면서 30년 세월이 지난 것이다. 그만큼 약자들이란 것이다. 그리고 할머님들이 돈을 더, , 더 한다고 뭐라 그런다. 당연한 것 아닌가? 자신들을 내세워 모금을 했으니 돈을 자신들에게도 좀 써야 한다는 것, 누구라도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그런데 작년에 겨우 3%만 썼다. 그 많은 지원금과 후원금을 쌓아놓고도 말이다. 만약 할머님들의 자손이 빵빵했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 끌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는 약자들이라는 것이다.

 

▲ 17세에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는 조선처녀. 영화 귀향의 한 장면 캡처     © 편집부

 

놀라운 실체

태평양전쟁피해자유족회장 양순임은 기자회견에서 실제로 위안부할머님들은 윤미향을 무서워했다고 증언했다. 양순임은 또 자신들이 실제로 할머님들을 발굴해서 시작하고 할머님들의 생계비를 법적으로 추진했는데, 다 해 놓은 그 공을 정대협 윤미향이 가로챘다고 했다. 이 단체는 열악한 사람들이고 새로 시작한 정대협은 학벌도 좋고 사회적 지위도 좋고 해서 이 일은 우리가 한다며 치고 들어온 것으로 본다.

 

또 서옥자(워싱턴 컬럼비아칼리지 교수) 미국 워싱턴 정신대대책위원회(정대위) 고문이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연의 전신 격인 정대협에 대해서 “20072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미국 청문회 증언에 나섰을 때(미국의회 결의안 121호 채택) 돈 한 푼 지원하지 않아서 모두 미국 단체에서 돈을 미련해 할머님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미국에 오실 때면 자금 사정이 어려워 호텔은 상상도 못하고 늘 우리 집에 모시곤 했다” “정의연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단체로 내세우지만 할머니들을 위한 단체는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미국에 알리는 데 공을 세운 레인 에번스 의원 동상을 서울에 세우려고 할 때도 정대협을 비롯한 위안부 단체들은 수십억 원 기부금을 쌓아두고도 한 푼도 후원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 당시 이 운동에 참여했던 한 운동가는 정의연이 일본으로부터, 아시아기금으로부터 돈이 올 때도 이용수 할머니가 싸웠다고 말하는데, 그건 정의연이 공창 된다며 받지 말라 했다. 또 지난해 이 할머니께서 참여하셨던 필리핀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 평화와 번영을 위한 국제대회 활동에 지원했다는 것도 경기도에서 모든 걸 지원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다한 것으로 공을 가로 채 갔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이 사과와 보상을 받게 하기위해 일본의 만행을 알려온 단체라면 피해자의 의중이 먼저인 것을 "우린 할머니들을 위한 단체가 아니다"로 변명을 한 것. 그럼 누구를 위한 사과와 보상을 일본에 요구하려 했던 건지? 라고 반문했다.

 

기가 찬다. 우리가 가장 높게 평가하는 윤미향의 업적은 위안부 할머님들의 법적 생계지원과 미의회 증언과 세계적인 이슈로 만들어 낸 것이었는데, 여기에 윤미향은 빠져 있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공을 이런 식으로 가로 챈 것이다. 그럼 어디에 집중했나? 다른 북미단체가 한 것은 같이 하지 않고 돈통을 걸 수 있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우리사회에는 자신들이 다한 것으로 홍보를 했다. 여기에 우린 넘어갔다.

 

아무튼 할머님들은 NO할 수도 그렇다고 YES 할 수도 없는 심리적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이걸 보지 못한 우리사회는 할머님들께 진심으로 사과하고 미안 해 해야 한다. 나라를 잘못 만나 일본에게 당하고 또 다시 민족에게 당한 꼴이 되어버린 것, 이유가 없다. 우리 모두는 사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인간을 도구로 보는 사회

우리사회는 어느 시점부터 인간을 인정사정없이 노골적으로 도구로 보는 게 안착됐다. 돈을 위해서는 못할 짓이 없는 사회라는 게 곳곳에서 드러난다. 특히 한스러운 건 약자인 사람들이 강자들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n번방 박주빈도 인간을 돈이 생기는 도구로 보았고, 경비원을 자살하게 만든 사람도 인간을 자기 화풀이 대상의 도구로 본 것이다. 그 외 사이비 종교지도자들도 다 도구로 보았다. 나열하려면 끝이 없다. 윤미향도 처음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만, 앞에서 말한 심리적 배경 위에 도구로 보는 사회현상이 스며들어가 자신의 원대한 꿈을 이루는 도구로 본 것이다. 나눔의 집도 할머님들을 돈이 들어오는 도구로 보았다. 나는 그 어떤 성과를 가져왔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인간을 도구화 시키는 것은 범죄행위로 본다. 이 모든 사람들이 약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의 시천주라는 가치관만 가지고 있었다면 뜻도 살고 할머님들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어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일본과도 싸움이 가능했을 것이다. 육체의 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성으로 표현되고, 정신의 성은 진정성으로 표출된다. 나눔의 집과 정의연은 인간의 진정성에 대한 정신적 성폭행을 지속적으로 한 것으로 규정한다. 이 말은 횡령문제가 결론나지 않은 현 단계만 가지고도 나 같이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이미 결론이 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성은 상위개념이고 횡령은 하위개념이기 때문이다. 돈 보다도 심리에 더 중점을 두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마음 보다 하위개념인 돈 문제만 갖고 난리들이다. 이래서는 시간이 너무 걸린다.

 

생명의 근원은 돈이 아니라 마음이다

인간행동의 모든 것은 심리가 관장한다. 우리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에 대해 아주 무지하고 거기다 더하여 무시한다. 똑 같은 상황에서 심리적 배경이 공적정신이냐 사적정신이냐에 따라 그 결과는 판이하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일이 벌어지면 누가 강자냐, 누가 횡포를 부리느냐, 횡포를 부리는 강자의 심리적 배경은 무엇이냐로 추적한다. 윤미향은 공적정신이라는 가면을 썼지만 실제로 저 깊은 곳에서는 사적정신으로 움직였다. 사적정신을 가지고 정의를 내세우는 무서움을 이 기회에 깨닫기 바란다. 왜냐하면 사적정신을 가지고 정의를 부르짖다가 자신이 기득권(강자)이 되면 이 사적정신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처음에는 빼꼼히 밖을 내다보다 용기를 내어 걷다가 자신감으로 뛰다가 자만감과 오만함에 먹히면서 빙그르르 돌다가 급기야 REAL I는 이불 속에 딱 숨기고 SUPER I가 극대화 대며 신나게 춤을 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렇게 복잡한 동물이다. 윤미향은 어느 단계인가? 마지막 단계까지 와 있다고 생각한다.

 

할머님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이 사안을 놓고 진영논리가 작동하는데 놀랐다. 갑자기 토착왜구가 등장한다. 이 토착왜구라는 프레임이 왜 틀렸는지 언젠가 발표를 할 것이다. 빨갱이로 때려잡더니 이제는 토착왜구로 때려잡는다. 진영논리는 비극적인 우리의 정치사에 그 원인이 있다. 진영논리는 정치권이 책임져야할 부분이다. 이제 177석이 되었다. 이 말은 어떤 사안에 대해서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의 잣대를 갖다 댈 때가 왔다는 걸 의미한다. 이긴 자는 훌륭함을 보여야 한다. 언제 까지 네 편 내 편을 가를 것인가. 그래야 다음 단계 우리사회가 훌륭한 사회로 가기 위한 통로를 만들 수 있다. 단계가 바뀌면 핵심도 바뀐다. 나는 우리사회가 우리의 심리에 가짜로 뒤집어 씌워진 그 허물을 벗게 되기를 바란다. 가짜 허물을 뒤집어 쓴 원인도 전 시대 인간을 도구로 본 가부장제라는 정신적 틀에서 파생된 파편들이다. 얼마나 도구로 보았으면 딸, 아들을 구분해 길렀겠는가? 가부장제는 한국인에게 많은 틀린 정신적 길을 가도록 유도했지만, 하나만 짚으라면 왜곡된 강자의 논리(사적정신)를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그 잘못된 정신적 틀을 택했던 대가를 우리사회는 지금 곳곳에서 톡톡히 치르고 있다.

 

이 사태는 진영논리로 보면 안 된다. 지인이 이런 문자를 보내주었다. 이용수 할머님의 기자회견을 보고 유튜브에 뜬 동영상을 요약한 것이다. ‘일본이 바라던 바 위안부 규모 축소’ ‘정의연 수요집회 축소’ ‘2,3의 시민단체 출현으로 현 정의연 무력화’ ‘위안부 문제 사과없이 종결’ ‘일본 아시아 패권국으로 부상(유엔 상임위 등극)’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이런 것에 흔들리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핵심이다. 핵심이 건강하면 뭐든 길이 있다. 핵심을 저렇게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어 놓고 무슨 일이 되겠는가?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쓸데없는 방해는 물려 세우면 된다.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바로 할머님들이다. 처음 정대협에서 시작 할 때 숫자가 절대적으로 우위인 정신대와 소수인 위안부 할머님들을 섞으면서 할머님들이 소외가 되었고, 정의연에서 위안부 문제를 따로 떼어서 시작할 때는 또 다시 핵심에 할머님들의 뜻을 놓지 않고 자신들의 뜻을 놓았다. 그러면서 돈통을 돌리는데 만 사용이 되었다. 이러면서 30년을 지내왔으니 피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이들이 실제로 할머님들께 30년간 지원한 현금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용수 할머님 증언으로는 자신은 받은 게 없다고 한다. 정의연이 흔들어 대던 1억은 국민성금으로 따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돈에 대해서 정의연은 섞어치기를 하면 안 된다. 그럼 그 많은 돈은 어디에?라는 질문이 남는다.

 

사죄, 부족함, 서운함, 죄송

정의연과 민주당은 계속 사죄. 부족함, 서운함, 죄송이라는 언어 뒤에 숨는다. 그런 언어는 용서할 수 있는 사안에 쓸 수 있는 언어다. 용서할 수 없는 이 일에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을 썼으면 윤미향을 무소속으로 남아 있게 해서 검찰 결과를 보고 무죄판결을 받으면 돌아오는 것으로 틀을 잡아야 한다. 그러면 그 말을 쓸 수 있다. 할머님들을 아이콘으로 사용할 때는 청와대까지 초청하면서 난리들을 하더니 왜 할머님의 비명소리에는 저렇게 계속 숨기만 하나? 이 언어에 숨었다 저 언어에 숨었다 한다. 우리사회는 그런 거짓언어에 넘어가면 안 된다. 민주화 투쟁을 하던 그 치열성은 어디로 사라졌나? 벌써 게을러졌다는 것인가? 음모설 배후설도 어불성설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설사 그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용수 할머님이 내는 비명소리(다른 할머님들도 인증한) 보다 다 하위개념이라는 것이다. 저런 비명소리에 그런 진단을 하는 신경 두꺼운 우리사회의 진영논리에 분노한다. 지금은 더민주에서 나온 발언으로는 박용진(국회의원)만이 진영논리를 넘어선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의 잣대가 작동한 가장 정확한 발언을 하고 있다.

 

이 문제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우리사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할까? 현시점에서 우리사회는 모든 에너지를 총 집중해서 이 할머님들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 대로 한스러움을 껴안고 육체와 정신이 빈껍데기가 된 채 보낼 수 없다.

 

이용수 할머님의 일차 기자회견을 보고 경악했고 이차 기자회견을 보면서 너무도 참담해서 무릎을 그대로 꿇을 수밖에 없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팔았습니다. 팔아넘겼습니다. 내가 왜 팔려야 합니까?’ 이런 절규는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여기에 무슨 진영논리가 있나? 얼마나 마음들이 가난하면 여기에 진영논리를 대나? 그렇게 자신들이 없나? 177석을 가지고도 그렇게 자신이 없다면 무능하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또 토착왜구, 음모세력 등이 그렇게 무서우면 토굴 속에 살면서 정의를 부르짖으면 된다. 왜 밝은 햇빛에 서서 정의를 부르짖나?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그 모진 고통을 겪고 왔는데, 이제는 민족으로부터 착취를 당하는 모양이 되고 말았다. 우리사회는 다 같이 할머님들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 상태에 있는 줄도 모르고 일본만 미워하며 보낸 무지한 세월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윤리성에 대해 모르는 것 같다. 윤리성이 확보가 안 되면 이 싸움도 할 수가 없다. 소리 지른다고 구호만 외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안에 있어서 윤리성이란 무엇인가? 바로 할머님들에게 경제적으로 적정 수준을 확보해 주며 마음의 평화를 적정 수준 유지해 주는데 있다. 그런 다음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연은 자신들이 잡은 정신적 틀이 할머님들을 얼마나 정서적으로 학대를 해 온 것인지 모르는 것 같다. 집에서 학대받은 여아가 밖에서 어떻게 제대로 대접을 받고 살 수 있겠는가? 돈도 직접 줘야지 생필품 지원, 양로원 수준의 지원을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러면 권력이 정의연, 나눔의 집에 넘어가기 때문이다. 돈을 할머님들이 직접 쓰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할머님들에게 권력이 넘어간다. 돈이 할머님으로부터 나오니 함부로 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대통령께서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다. 문대통령 성품상 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시는 것 같다. 아신다면 할머님을 껴안고 통곡 하실 것 같다. 더민주도, 미통당도 다 함께 나서라. tv 판도라에 나와서 엉뚱하게 윤미향 옹호만 하는 정청래 의원, 그렇다면 할머님의 비명소리는 뭐가 되나? 저런 비명을 듣고도 빨리 움직이지 않는 더불어민주당의 심리에 문제가 있다. 이것은 최민희의 발언인 할머님이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심리와 맞닿아 있다. 이런 심리도 가부장제 라는 정신적 틀에서 왜곡된 강자의 논리에서 파생된 나르시시즘의 극치인 자폐증 증상의 일부라고 본다. 아파트 관리인도 이런 자폐증을 가진 강자앞에서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할머님이 자살이라도 해야 실체를 볼 것인가? 가방에 갇혀 결국 죽은 그 가여운 9살 아이도 저런 자폐증을 가진 계모와 아버지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다. 거기다 더민주의 우상호는 할머님이 저러시는 건 국회의원 출마하고 싶을 때 윤미향이 막아서 저런다고 말했다. 할머님을 인간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그런 발상이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사회는 힘없는 할머님은 그냥 할머니로 보지 인식이 있는 인간으로 보지 않는 성향이 있다. 우상호의 진단은 틀려도 너무 틀렸다. 왜 이럴까? 우상호는 평소 훌륭한 발언을 해 오던 정치인 아닌가? 나는 그 이유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IQ(남성성)로 하는 발언은 훌륭한데 EQ(여성성)의 영역에서 해야 할 발언은 지진아적 성향까지 띠는 전시대 남성들에게서 보던 문제가 표출됐기 때문으로 본다. 이것도 다 가부장제의 정신적 틀에서 파생된 파편들이다. 세계적인 정신과 의사 스캇 펙(M. Scoot Peck)에 의하면 이런 현상을 정신적 게으름으로 봤다. 치열하게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게으르게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할머님인데 뭐라는 식으로 대응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권력 뒤에 가서 낼름 숨었다.

 

결론

나눔의 집에 쌓여 있는 돈과 정의연에 쌓여 있는 돈을 일정 부분 압수해서 할머님들께 직접 목돈을 나눠줘야 한다. 그들도 후손에게 돈을 좀 줄 수 있을 정도로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일본과 싸움을 해야 맞다. 윤리성이 확보가 안 된 부모(사회적 부모)가 어떻게 일본을 향해 윤리적 잣대를 댈 수 있단 말인가? 나눔의 집에 쌓아둔 70, 정의연에 쌓아 둔 몇 십억만 있어도 해결이 가능하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욕심 많은 권력자들에게 돈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국가는 감시를 게을리 했다. 국가도 그 벌을 받아야 한다. 국가의 사업을 앵벌이식으로 진행하면서 할머님들의 자긍심을 짓밟은 죄를 저지른 그 무지를 깊이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품위가 없으면서 어떻게 일본에 대고 삿대질을 할 수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그런 땡깡 식은 더 이상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정당한 한국인의 자존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정의연과 윤미향이 우리사회에 내보내는 언어를 보면 계속 숨는다. 쉼터 소장이 자살을 한 사건에서도 역시 검찰에, 언론에 핑계를 대며 계속 숨을 곳을 찾는다. 죄가 없다면(공칠과삼) 숨지 말고 정면돌파를 하라! 그것만이 우리사회에 어른들로서 자긍심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길이다. 왜 자꾸 숨어다니나? 아이들을 창피하게 만들지 말라. 그런 식이면 공삼과칠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왜 모르나? 그리고 정의연에서는 소장의 죽음에 이런저런 이유를 대지만 인간은 그 정도 가지고는 자살을 하지 않는다. 소장이 머물던 쉼터에 상주하는 할머님들의 통장을 전수 조사해야 한다.

 

정의연은 피해자중심으로 사고의 틀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대폭 갈아야 한다. 문어발처럼 뻗어나간 사업도 다 줄여야 한다. 남의 나라 우물 사업까지(결국 실패)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시민단체 후손들에게 장학금 지급하는 것도, 조총련 계에 장학금 지급하는 것도 다 말이 안 된다. 이 기회에 돈을 받은 시민단체도 돈을 다 토해내야 한다. 그렇게 피맺힌 돈을 받으면서 그게 뭔지를 몰랐던 것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윤미향은 시민운동 대모가 되었다. 자신이 돈이 많아 자신의 돈을 쓰는 것이라면 훌륭한 일이지만,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그런 발상을 하는 자체가 이들이 얼마나 본질과 동떨어진 심리로 움직였는지 알 수 있다. 이것도 자폐증의 일종이다. 사람을 도구로 보지 않는 사회를 위해서는 수운 최제우의 시천주라는 개념을 중심 축에 놓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래야 나라를 나라답게’ ‘이게 나라냐란 구호를 외칠 수 있는 윤리성이 확보되지 않겠는가?

 

소설가 이하천 씀(문화비평집 나는 제사가 싫다의 저자) 2020. 6.8

 

추신: 이 글을 기도하는 자세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글을 읽어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 속에 들어와 있는 진영논리라는 허물을 다 벗어던지고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의 잣대를 대고 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반론이 있다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단 합리적 언어로 하시길 바랍니다. 이 글은 30년 넘는 세월을 모든 이익을 다 포기하고 강자들의 횡포에 쓰러지는 수많은 약자들의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새로운 이론까지 만들어냈어야 했던, 바로 그 이론을 바탕으로 써진 글임을 밝힙니다.

 

[이하천(소설가) 프로필]

-주요작품

 

장편소설 :

<조용히쓸어라 대지는 깊이 잠들지 않는다>

<불타는 대지>

<내가 증오한 사랑>

 

문화비평집:

<나는 제사가 싫다>

<바람이 없어도 좋아~바람이 되어 우리가 가는 거야>

근간 <동학만이 답이다!>

 

플러스코리아 초대운영위원장 역임(2006)

 

소설가이며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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