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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력사 인물] 새로운 화약무기제조에 기여한 최무선의 안해

이형주 기자 | 기사입력 2020/06/30 [10:39]

[조선력사 인물] 새로운 화약무기제조에 기여한 최무선의 안해

이형주 기자 | 입력 : 2020/06/30 [10:39]

 

력사에 이름을 남긴 조선녀성들 (11)

새로운 화약무기제조에 기여한 최무선의 안해

(14세기말)

최무선(1326-1395)의 안해는 남편과 아들이 새로운 화약과 화약무기를 만들어내여 왜구격멸에서 큰 공을 세우도록 적극 도와준 성실한 방조자이다.

14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왜구가 우리 나라에 자주 침입하여 살인과 방화, 략탈을 감행하여 인민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고있었다. 우리 인민은 포악무도한 왜구를 몰아내기 위한 싸움을 맹렬히 벌리였는데 이때 바다에서 왜구를 쳐물리치기 위한 무기가 몹시 요구되였다.

최무선의 안해는 이 사업에 앞장선 남편을 적극 도와나섰다. 그는 남편이 실험실을 차려놓고 새로운 화약제조법을 연구하자 식사보장, 휴식조건을 마련하기 위해서 적극 노력하였다.

최무선은 낮과 밤을 이어가며 우리 나라 병서들을 탐독하였으며 당시의 과학기술발전에 토대하여 연구를 거듭하였다.

최무선의 안해는 남편의 지시대로 실험재료로 쓸 절간이나 큰집의 마루밑에 있는 먼지와 부엌아궁의 재를 가져다주었다. 이것을 가지고 최무선은 거듭 실험을 하여 새로운 화약의 기본성분인 염초(초석, 초산칼리 같은 초산나트리움의 혼합물)를 만들어내게 되였다.

최무선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실험조사를 깐깐히 하고 연구를 거듭한 결과 염초에 반묘(류황)와 류회(탄소)를 합리적으로 배합하여 강한 폭발성을 가진 새로운 화약을 만들어내는데 끝내 성공하였다. 계속하여 새로운 화약무기까지 만들어내였다.

안해가 너무 기뻐서 남편의 손을 잡고 축하해주니 오히려 최무선은 안해와 집안사람들의 노력이 더 컸다고 하면서 성과를 그들에게 돌리였다.

최무선은 안해에게 《그간 집에서 실험실을 차려놓고 연구한 보람이 있구려. 처음에 염초의 원료를 가져오는데 당신의 노력이 정말 컸소. 그리고 당신은 나의 실험을 도와줄래,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하느라고 정말 수고가 많았소. 그러니 오늘은 푹 쉬오.…》 라고 사랑에 넘친 말을 하였다.

그러자 안해는 오히려 《당신의 노력이 컸어요. 당신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지막까지 실험을 하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지요. 입술까지 트며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오래동안 고생했는데 당신의 몸이 걱정돼요. 어서 쉬세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무선은 그럴수 없었다. 화약무기를 빨리 만들어 놈들을 하루빨리 족쳐야 하였다.

최무선은 나라에 제기하여 화약무기를 만드는 관청을 실시하고 화약무기를 대대적으로 만들것을 제기하였다. 이리하여 1377년 최무선을 책임자로 하는 화통도감이라는 관청이 설치되여 대장군포, 2장군포, 3장군포, 화포, 질려포 등의 여러가지 포들과 화전, 철탄자 등 포탄도 대대적으로 생산하였다.

이러한 성과에 기초하여 고려는 화약무기를 배에 설치하였고 1380년 금강하구(충청남도)의 진포해전과 1383년 박두양(경상남도 남해군앞바다)싸움에서 맹렬한 화포사격으로 왜구배들을 모두 소각하였다.

진포해전에서 최무선이 싸움배에 화약무기를 설치하고 왜구를 물리친 전투는 유럽에서 화포로써 큰 바다싸움을 벌린 1571년 레빤토해전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것으로서 세계최초의 해전으로 된다.

최무선의 주동적역할과 그의 안해의 방조에 의하여 고심끝에 만들어낸 화약과 화약무기의 생산은 고려왕조를 뒤집어엎을 야욕을 품고있던 리성계에 의하여 금지되였다.

리성계는 고려왕조를 뒤집어엎는데서 나라 곳곳에 위력한 무기들이 있으면 자기의 음모를 실현하는데 우환거리가 될수 있다고 하면서 화약무기제조와 사용을 금지시켰다. 그리하여 《화통도감》이 페쇄되고 최무선은 벼슬에서 물러나 집에 들어앉게 되였다.

최무선은 후세에 자기가 만든 화약제조기술을 전하기 위해 두문분출하고 화약과 화약무기제조에 관한 글을 썼다.

이것을 본 안해는 신심을 잃지 않고 남편의 저술활동을 적극 도왔다.

그는 남편을 위로하는 한편 아들 해산을 아버지의 높은 애국심과 기술을 배우도록 교양하였다.

1395년 3월 어느날 최무선이 세상을 하직할 때 안해에게 유언하기를 《이 책은 새로운 화약제조법과 화약무기를 만드는것을 저술한 <화약수련법>과 <화포법>이란 책이요. 지금은 국가가 탄압하고있는 조건에서 잘 건사해두었다가 꼭 필요할 때 아들 해산에게 물려주도록 하오.》라고 유언을 남기였다.

최무선의 안해는 남편의 유언대로 책들을 궤속에 깊숙이 건사해두었다.

15세기초에 들어서서 혼란되였던 조선봉건국가의 통치체제가 점차 안정되고 왜구의 침략책동이 로골화되기 시작하자 또다시 화약과 화약무기가 절실히 요구되였다.

그런데 최무선을 비롯한 제조업자들이 거의 사망하거나 리성계의 죄행으로 화약과 화약무기제조가 한동안 중지되였던 조건에서 그 제조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화약제조법과 화약무기생산문제가 다시 일정에 오르자 최무선의 안해는 드디여 남편의 유언대로 아들 최해산을 통해 내놓게 하였다.

이리하여 15세기초 최무선의 안해의 공로로 고려말에 만들어졌던 새로운 화약과 화약무기제조법이 그 아들 최해산에 의하여 다시 재생되게 되였으며 1487년 최식(최해산의 손자)이 비로소 책들을 봉건정부에 바치게 되였다.

15세기에 만든 화약과 화약무기는 왜구격멸을 위한 싸움에 적극 리용되였다.

이처럼 최무선의 안해는 고려말의 새로운 화약무기제조에 참가하였을뿐아니라 그것을 조선봉건왕조초에 다시 만들어내는데 큰 기여를 한 애국적인 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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