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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력사 인물] 20대의 명장 남이장군

이형주 기자 | 기사입력 2020/07/02 [11:51]

[조선력사 인물] 20대의 명장 남이장군

이형주 기자 | 입력 : 2020/07/02 [11:51]

 

▲ 남이장군 활약상. 사진=조선의 오늘     ©이형주 기자

20대의 명장 남이

 

예로부터 슬기롭고 용감한 우리 민족의 반침략투쟁사에는 이름난 애국명장들이 많이 기록되여있다. 20대청년명장으로 알려진 남이도 그들중의 한사람이다.

위대한수령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의 한 무인인 남이장군은 남자로서 20살에 나라를 바로잡지 못하면 후날에 누가 대장부라고 하겠는가고 하였습니다.》

남이장군은 1441년에 태종의 외손으로서 의산군 남휘의 아들로 태여났다. 그는 16살에 무과에 합격하였고 세조의 총애를 받아 26살의 젊은 나이에 중추부 동지, 오위도총부 도총관, 공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의 높은 벼슬을 지냈다.

남이가 청년명장으로서 이름을 떨칠수 있은것은 1467년 9월에 침략자들을 징벌하는 싸움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기때문이다. 당시 외래침략자들은 빈번히 북부국경지대에 침범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략탈하군 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국경을 침범하여 살인과 방화, 략탈만행을 감행하는 침략자들을 징벌하는 부대를 무어 파견하였다.

이때 남이는 이 부대의 우대장으로서 총대장인 주장 강순과 함께 침략자들의 소굴에 들어가 놈들을 징벌함으로써 큰 전과를 거두고 그 두목을 생포하여 목을 베였다. 그는 싸움마다에서 공을 세우고 용맹을 떨침으로써 당시 이름있는 젊은 장수로 꼽혔으며 세조는 그를 표창하여 적개공신 1등에 봉하고 병조판서로 임명하였던것이다.

그러나 20대청년명장 남이는 간신들의 모함으로 피끓는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사형당하고말았다.

1468년 세조의 뒤를 이어 그 둘째아들인 18살난 예종이 왕자리에 앉은지 얼마 안되였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밤 궁중에서 남이는 밤하늘에 나타난 유난히 밝은 빛을 뿌리는 혜성을 보고 그것이 《낡은것을 제거하고 새것을 펼치는 기상》이라고 말한적이 있었다. 이때 남이의 눈부신 발전을 두고 항상 시기질투하고있던 병조참지 류자광은 남이의 이 말을 외곡하여 그가 반역을 꾀하였고 왕의 딸인 공주를 겁탈하였다고 국왕에게 허위보고하였다.

첩의 자식인 류자광은 《새것을 펼치는 기상》이라고 한 남이의 말을 외곡하여 장차 새 임금이 나올 징조라고 보고하였던것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남이는 자기의 억울한 심정을 국왕에게 하소연하였으나 류자광이 일찌기 남이가 외적을 징벌하고 개선할 때 지었던 시까지 외곡하여 예종에게 거짓참소를 함으로써 끝내는 남이가 모진 고문끝에 사형당하였다고 한다.

류자광을 비롯한 간신들은 시의 세번째줄에 있는 《남아이십 미평국》이라는 글줄에서 《미평국》을 《미득국》이라고 고침으로써 나라를 평정한다는 뜻을 나라를 얻는다는것으로 완전히 달라지게 만들어버렸다.

그리하여 몇명의 간신들때문에 용감하고 대바르고 억센 기질을 가지고있었던 청년명장 남이는 반역죄의 억울한 루명을 쓰고 27살의 젊은 나이에 사형당하고말았던것이다.

당시 80고령의 늙은이로서 령의정의 높은 벼슬에 있던 강순이 남이를 심문하는 장소에 같이 있었는데 그는 남이의 죄가 억울하다는것을 알면서도 자기 보신을 위해 남이를 구원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강순은 남이의 야유와 조소를 받았으며 마지막에는 그도 반역죄로 몰리워 남이와 함께 모진 고문을 받고 죽었다.

남이장군은 외적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발휘한 용감성과 훌륭한 시를 남긴것으로 하여 오늘까지도 우리 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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