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조선력사 사건] 국채보상운동

이형주 기자 | 기사입력 2020/07/04 [09:22]

[조선력사 사건] 국채보상운동

이형주 기자 | 입력 : 2020/07/04 [09:22]

 

국채보상운동

 

20세기초 조선봉건정부가 진 빚을 갚기 위하여 우리 인민이 벌린 반일애국운동.

애국적인민들은 일제에 의하여 《을사5조약》이 날조된 후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의 한 형태로서 전국적범위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적극 벌리였다. 일제는 우리 나라를 정치적으로뿐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종속시킬 목적으로 조선봉건정부를 강박하여 일본으로부터 여러차례에 걸쳐 막대한 량의 《차관》을 끌어들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봉건정부는 1 300만원의 빚을 지게 되였다.

일제는 이 막대한 《차관》에 매해 6. 5%의 높은 리자를 붙였으며 그것을 식민지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자금으로 리용하였다. 조선봉건정부는 일제의 《차관》에 얽매여 빚더미우에 올라앉게 되였으며 우리 인민은 채무노예의 처지에 빠지게 되였다.

애국적지식인들은 이러한 환경에서 조선봉건정부가 진 빚을 갚는다면 국권이 회복될수 있으며 또한 봉건정부의 재정이 극도로 말라있던 조건에서 봉건정부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대한 빚을 갚을수 없다고 생각하고 전국적범위에서 국채보상운동을 벌리기로 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대구에서 애국문화운동가들이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빚을 갚는다는 취지에서 《단연회》를 조직한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단연회》는 취지서에서 2천만동포가 이제부터 담배를 끊고 그 돈을 석달만 모으면 1 300만원의 빚을 능히 갚을수 있으며 만약 그래도 모자라면 애국의 뜻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의연금을 모아야 한다고 하면서 국채를 보상하고 국권을 회복하는것이 단체의 목적이라고 밝히였다.

《단연회》의 취지는 처음부터 인민들의 지지와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2월 21일 《단연회》 제1차회의가 열렸을 때 대구의 애국적시민들은 그 자리에서 500원에 달하는 돈을 국채보상금으로 바쳤다. 2월 22일 애국적지식인들은 국채보상운동을 넓은 범위에서 벌릴것을 목적으로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하였다. 뒤이어 《국채보상의성회》, 《국채보상일심회》, 《국채보상동정회》, 《국채보상단연회》, 《국채보상부인회》 등 여러 단체들이 각지에서 조직됨으로써 이 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고 벌어졌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범위에로 급속히 확대되여가자 애국적지식인들은 이 운동을 통일적으로 벌리기 위하여 1907년 4월 1일 서울에서 각 단체대표들을 망라한 《국채보상련합회의소》를 조직하였다. 국채보상련합회의소는 규약을 제정하고 당시 《대한매일신보》사 총무였던 량기택을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국채보상련합회의소가 나온 후 각계각층의 광범한 인민들이 이 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해외동포들도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하여나섰다. 로동자들은 피땀흘려 한푼두푼 모은 돈을 의연금으로 바쳤고 농민들은 식량을 팔아 국채보상금으로 냈다. 남자들은 《단연회》를 뭇고 담배를 끊어 그 돈을 국채보상금으로 냈으며 녀성들은 《감선회》를 뭇고 식찬을 줄여 남은 돈을 의연금으로 바쳤고 지어 《탈환회》를 무어 가락지와 비녀, 시집올 때 가지고온 옷가지와 노리개, 장도 등 귀중품을 서슴없이 내놓았다. 혼수감을 바치는 처녀들도 있었다. 부자집의 상노와 침모, 떡장사, 나물장사, 짚신장사까지도 땀에 절은 푼전들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아이들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하거나 바다가에 나가 조개를 잡아 판 돈으로 국채보상운동에 이바지하였으며 민족자본가와 상인들도 국채보상금모집에 적극 참가하였다.

국채보상련합회의소는 매일 《대한매일신보》의 제3면에 의연금을 낸 사람의 이름과 그 액수를 발표하고 한달에 한번씩 모은 의연금의 총액을 보도하였다. 이리하여 국채보상운동은 날을 따라 더욱 확대되여갔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제의 방해책동으로 말미암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일제는 이 운동이 《많은 페단을 야기시킨다》느니 뭐니 하면서 이 운동을 말살하려고 미쳐날뛰였으며 1908년 8월 23일에는 량기택을 국채보상금 《횡령범인》으로 몰아 기소하는 책동까지 감행하였다. 또한 놈들은 1908년 11월 말에는 2 000만원을 《차관》으로 조선봉건정부에 더 들이밀어 빚이 무려 3 300만원이상에 달하게 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이러한 책동으로 하여 중단되고말았으나 국권을 회복하려는 애국적인 운동으로서 우리 인민들속에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고 반일의식을 높여주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미식 여행지 고흥, ‘녹동항 포차’에서 추억을 쌓아요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