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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향사태와 최숙현선수의 죽음을 지켜보며"

이하천 소설가 | 기사입력 2020/07/21 [19:30]

"윤미향사태와 최숙현선수의 죽음을 지켜보며"

이하천 소설가 | 입력 : 2020/07/21 [19:30]

 [플러스코리아 이하천 소설가]

▲ 윤미향 사태에서 무엇을 잃을 것이고,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 플러스코리아

 

위대한 모성의 현장

 

 어디를 둘러보아도 짙은 안개다.

 묽은 어두움이 한 발짝... 두 발짝... 다가서고 있다.

 안개는 그렇게 다가서는 어두움에 흡수되면서 잔잔하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산봉우리도, 그 중허리까지 깊은 안개에 컴컴하게 잠기어 있다. 마치 그림자처럼 음영의 자태로 서 있는 주변 산들은 사방에서 스스럼없이 기어 나오는 안개에 잠시 흔들거리다 주저앉다 하며 다시 그 모습을 희미하게 드러냈다.  

 

 오늘도, 강한 함량의 수분을 담은 안개는 신선한 숲의 기운과 조화롭게 뺨을 맞대고 있다가 모처럼 만의 해우를 반가워하듯 서로를 향해 은근하게 킁킁거렸다. 그것은 마치 삶의 지겨움과 초라함, 반점처럼 순간순간을 지배하는 우울함, 지겨울 정도로 달라붙는 슬픔 같은 무늬들을 이제는 괜찮아, 다 잘 될 거야라는 듯 여유롭고 자상한 품성으로 주변을, 그리고 산천을, 그리고 깊은 계곡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포옹하듯 울렁거렸다. 산골마을에 내려오는 안개군단은 그렇게 언제나 마치 다정함의 증거라도 보여주듯이 가야금 소리 같은 애달픔과 가까이 가서 의지하고 싶은 친밀한 쓸쓸함도 그리고 누구나 다 기꺼이 용서할 것 같은 넓은 어머니의 가슴까지도 갖고 있었다. (5년 후 출간될 소설 ‘환생’의 첫 장면)

 

이런 안개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위대한 모성의 현장을 보는 기분이 든다. 위대한 모성이란 저런 모습일까. 역사적으로 우리사회는 위대한 모성의 길을 제시하는 대신 왜곡된 모성이 길러지도록 자꾸만 틀린 길을 닦아 후손들로 하여금 그 길을 걷도록 했다. 주체성을 가지지 못하도록 법으로 관습으로 묶어놓고 더 이상 개인의 숨소리가 커지지 않도록 조종했다. 이런 구도는 우선은 이익이 오는 것 같지만 결국 승자도 패자도 더 이상 갈 길이 없도록 만들었다. 이런 역사적인 심리적 배경은 우리들로 하여금 때때로 승자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모성이란 여성성, EQ, 이런 넓은 의미의 모성을 말한다. 그런 모성은 여성과 남성에게 다 들어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집단무의식에 쌓이는 마음의 상처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돈은 보이니 손해가 오면 즉시 반응을 하고 마음은 보이지 않으니 그런 듯하다. 특히 강자 입장에 있으면 자신이 쓰는 언어가 어떤 식으로 약자에게 작동하는 지 무지하다. 남의 상처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라는 것. 돈이 보이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어떤 이는 재미로, 어떤 이는 질서가 잡히지 않은 자신의 내면의 상처로 인해 스스로 치고 받다 어떤 환경이 되면 흉기가 되어 돌출한다.

 

▲ 故 최숙현선수의 카카오톡 메세지     ©플러스코리아

 
지난 달 26일 철인 3종 국가대표 출신 최숙현 선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숙현은 ‘이들의 죄를 밝혀달라’는 마지막 문자를 어머니께 남겼다. ‘내 잘못이 아니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김홍영검사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최숙현은 육체적 폭행과 정신적 강간을, 김홍영은 정신적 폭행과 강간을 지속적으로 당했다. 정말 한스러운 일이다. 젊은이들이 자신의 영혼이 딱딱한 좀비가 되는 걸 막아내기 위한 앞길이 순탄치 않을 것 같아 마음이 몹시 불편하다. 
 

물리치료사 팀탁터와 그 팀닥터에게 감독이 쩔쩔매는 것처럼 분위기를 만든 것은 팀닥터와 감독이 돈을 걷기 위해 공포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팀닥터가 선수를 때릴 때 감독은 밥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때 두 사람의 눈빛이 반짝 은근히 마주쳤을 것이다. 정상적이면 막았어야 했다. 여기에 가장 약자로 보이는 최숙현이 당했다. 부모가 강자였다면 이런 식으로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간교함, 교묘함은 정치권 지지진영에서도 보인다. 윤미향 사태가 터지자 검찰개혁 때 열광적인 언어를 쓰던 한 학자가 이상한 글을 내보냈다.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그 글을 보고 난감했었다. 너무 뽕짝적이어서 그랬다. 주요 내용은 ‘윤미향이 30년 동안 얼마나 힘들었겠으며 자신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윤미향을 돕겠다는 언어를 마구마구 내질렀다. 왜 저러지? 그러나 오래지 않아 밑밥을 까는구나 결론을 냈었다. 전에 많은 돈이 순식간에 걷히는데 고무가 된 것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돈인데....무슨 방법으로 자신이 그 책임을 지겠다는 건가? 그건 또 후원금을 걷겠다는 의지 속에서 전시대 한국인을 사로잡았던 뽕짝적 언어의 특성인 ’아, 나는 슬프다‘를 선택한 것으로 본다. 왜냐? 뽕짝은 아직 한국인들에게 먹혀들어가는 정서이기 때문이다. 이 뽕빡정서가 악이 서식하는 중요한 통로로 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그래, 인생은 슬픈 거야~너희들은 슬픈 노래나 부르고 거기에 머물러야 돼. 깨어나면 안 되지~우리는 우리 길을 갈테니까~우하하하~’ 하는 어둡고 음흉한 에너지들의 신나는 속삭임이 들린다. 물론 구체적으로 자신이 그걸 의도하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무의식에서 작동했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인은 이런 교묘함까지 간파를 해야 할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하다. 최숙현, 김홍영 둘 다 EQ가 발달한 사람들로 보인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문을 닫아라!

 

자살한 최숙현은 국가인권위원회, 경주시, 경찰, 체육계...다 고발을 했는데도 아무도 나서지를 않았다. 이 기회에 국가인권위는 문을 닫아야 한다고 본다. 위의 모든 행정시스템 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상위 개념이다. 설립취지가 ‘준사법적인 인권전담 독립 국가기관. 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하고 민주적 기본질서 확립을 위해 설립되었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이 행정기관이 다른 그 어떤 기관 보다 상위개념이란 것을 못 보고 있다. 간판은 근사하게 내걸어 마치 할머님들의 흉상을 앞세워 국민을 속이기 딱 좋게 해 놓은 나눔의 집처럼 겉껍질은 만들어 놓았지만 하는 짓은 똑같다. 국가인권위...얼마나 근사한 이름인가? 어떤 일로 인권위가 민원을 어떻게 처리 하는 지 볼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깡패 같은 부산도시공사(부산시 경제부시장을 지냈던 김영환이 사장이었던 때)라는 공기업에 이렇게 저렇게 당했다고 민원을 넣으면 하는 일이 고작 그 문서를 도로 그 깡패에게 보내는 것으로 손을 턴다. 하루 종일 그 짓을 하면서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다는 것. 놀라운 일이었다. 그 깡패는 으히히 웃으며 ‘너희들이 그래 봐도 다 소용없다’는 식이 되는 건 당연한 결과다. 한두진이라는 젊은 과장을 앞세워 하는 짓은 전혀 원리가 작동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자신들은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생 까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여러 번 이런 식에 대한 불만을 보았지만 구체적으로 그 말이 무엇을 뜻 하는지 몰랐다. 그런데 이번에 최숙현은 확실한 증거물까지 절박하게 보냈는데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돌고돌아 경주시 체육회로 갔을 것이다. 자신들에게 권력을 준 것은 그럴 때 사용하라는 의미다. 그런데 전혀 그 권력을 사용하지 않고 이런 게 인권위에 접수됐다고 알리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니 다른 건 말해서 무엇하랴! 부산 시도 마찬가지였다. 홈페이지는 너무나 근사하게 국민을 위해서라고 내걸고 있지만 기실 그들에게 국민은 없었다. 그들이 가장 힘을 쏟는 건 표 관리와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전시행정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이다. 거대증에 걸릴 수밖에 없는 한국의 잘난 남성들의 허망한 심리가 전국에 쫙 깔려 있다. 이 심리적 병폐가 제거 되지 않는 한 이런 일은 계속 될 것이다. 이것도 다 왜곡된 모성 속에 갇힌 사람들에게 권력이라는 권한이 주어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무엇이 중요한 지 전혀 읽을 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자신들이 왜 그 자리에 있는 지 전혀 모른다는 것...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거돈 시장이 성추행으로 걸려들었을 때 저 나이에 저렇게 허망한 일에 정신이 가 있었으니 민원이 어떻게 처리되는 지 내 알바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밑에 사람들은 최고 책임자의 의식을 암암리에 간파한 것이다. 사명감을 가지고 해결을 하든지 해결할 능력이 없으면 상사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데, 그건 윗분을 괴롭게 만드는 것이라 못 하고 겨우 생각해 낸 것이 돌리고 돌려서 깡패들에게 도로 그 민원을 보내며 손을 턴다.

  

 최 선수는 지난해 다른 선수에게 “너무 힘들다” “사람 사는 것 같지 않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경주시체육회는 심석희선수사건 이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사람이 죽어 나가야 이슈가 돼서 수사가 들어가는 이상한 나라’, 인터넷에서 본 댓글이다. 매달 100만원씩 납부, 최 선수도 2016~2019년간 약 1400만원을 치료비 명목으로 팀닥터에게 입금했다. 한 선수 당 이랬으니 그 금액도 상당하다. 이들은 이렇게 돈을 받아내기 위해 선수들이 선수생활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약점을 잡아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냥 돈을 달라면 자신들이 약자가 된다. 그러니 감독과 팀닥터는 강자 입장을 유지하면서 서로 암묵적 짝짜꿍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 치료를 목적으로 가슴을 주무르는 것을 합법화하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협박의 공포가 필요했다. 이들은 자신이 차지한 강자입장을 합법화하기 위해 공포분위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 故 최숙현 선수 가족, 숨지기 하루 전날 인권위 진정. 故 최숙현선수와 국가인권위원회     © 플러스코리아

 

윤미향이 위안부할머님들을 암암리에 협박하면서 자신들 말을 듣도록 만드는 것과 비슷한 심리구조다. 실제로 말을 듣지 않은 할머님들은 기림비에서 빼버렸고 동조하며 돈까지 낸 할머님은 장학재단, 브랜드화...까지 세우며 다른 할머님들을 협박했다. 이게 말이 되나. 동상을 세우더라도 기림비를 세우더라도 브랜드화를 하더라도 공동으로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할머님들 가족들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자신들이 가족의 자리에 치고 들어가기 위해 그 가족들을 깍아내리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 가족 끼리 돈을 주건 말건 왜 그런 걸 간섭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지 참 이해 불가다. 그러면서 가족 몰래 유언장까지도 윤미향 자신 앞으로 받아냈다. 길원옥 할머님은 일본 정부의 위안부 합의금 대신 2017년 국민 성금으로 마련한 1억원을 받았다. 길할머님 통장으로 들어온 1억이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을 채 한 시간만에 순식 간에 다 빠져나갔다. 오전 10시 52분 길 할머님 통장에 입금된 1억원은 1시간여 만인 11시 56분 ▶500만원 ▶5000만원 ▶2000만원 ▶2500만원 순으로 모두 빠져나갔다. 500만원은 현금 인출로, 5000만원과 2500만원은 각각 수표 1장, 나머지 2500만원은 100만원짜리 수표 25장으로 빠져나간 것으로 나타났다. 윤미향은 걸림돌이 되는 가족들을 밀어내기를 서슴치 않은 행동의 주범이었다. 그 사실이 여기에 고스란히 들어있다고 본다.  윤미향에게 가족은 역적이었다.  윤미향, 정의연이 떼거지로 돈 밝히는 양아들, 입적된 지 한 달밖에 안된 양아들이라고 언론플레이를 했다. 거기에는 다 깊은 사연이 있는데 가족으로서는 기함할 일이었다. 정의연과 여가부가 발간한 자료에 아들 황목사는 길할머님께서 한 살부터 데려다 키웠고 그 당시 여성 혼자서는 성을 만들어 줄 수 없기 때문에 성씨 만들어주기 위해 첩까지 들어가고, 고생고생 키운 아들이며 목사까지 만들었다.      

 

하늘의 이법을 어긴 가부장제란 정신적 틀로 인해 유독 한국인들은 해결되지 않은 극심한 마음의 상처가 많다. 여성은 그렇다 쳐도 남성은 수혜자인데 무슨 상처(?)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남성들은 받지 않아야할 정신적 뇌물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자기들이 원한 게 아니다. 태어나 보니 그런 위치에 자신이 놓인 것이다. 돈만 뇌물이 아니다. 원리에 어긋난 것을 모르고 했던 알고 했던 정당하지 않은 것을 받았다면 다 뇌물로 봐야 한다. 한국남성들이 이렇게 뇌물 사건에 많이 걸려드는가의 원인은 태생적으로 범죄자의 소굴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사실 이 주제를 자세히 설명하려면 많은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럴 수 없으니 간단하게 시 한편으로 마무리를 하려고 한다.

 

여성을 똥강아지라고 부르지 마라

 

예1)

할머니는 남자들만 좋아하신다.

우리 친할머니도 내 막내 동생에게는

강아지라고 하는데

나와 은영이한테는 똥강아지라고 하신다.

(동시 ‘할머니는 남자들만 좋아하신다’ 초3 임지혜)

 

예2)

할머니 집 고산길에

민들레 꽃 피어 있고요

할머니 집에 들어서면

오냐, 온냐 내 새끼 많이 컷구나

내가 내가 어여쁜 꽃이 됩니다.

(시인 김용택의 ‘할머니 집에 가는 길’)

 

 위의 예는 도서출판 ‘이프’가 펴낸 ‘독이 되는 동화, 약이 되는 동화’에서 발췌한 것이다. 우리는 이 두 시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가? 남성들은 강아지도 되었다가 오냐, 온냐 내 새끼도 되었다가 어여쁜 꽃도 된다. 여성은 똥강아지도 되고 남의 새끼도 되고 쓸데없는 꽃도 된다. 사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정도로 우리사회에는 이런 불평등한 가짜 언어, 본질에 위배된 언어들이 비단 옷을 입고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이런 가짜 언어들은 가정에서부터 여성과 남성의 심리적 배경을 틀어쥐기 시작하고 그 결과 공정한 애정분배를 ‘으히히’ 웃으며 깨어버린다. 그 결과 자연의 최고의 선물인 언어의 음률을 깨어버렸다. 아니 박살내어 버렸다는 표현이 더 나을 것이다. 가부장제가 만들어 낸 언어의 틀은 한국인의 영혼을 개인논리에 가둬서 공적인 정신을 가져야 할 공인들의 영혼까지도 못 자라나게 한다. 그 결과 많은 공인들이 명예와 부는 잽싸게 거머쥐고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적어도 이 땅의 시인이라면 혼자서만 꽃이 될 일이 아니라 왜 할머니가 내 여동생에게 안 쓰는 언어를 나에게만 쓰는가 불편해 하고 그 사실에 대해 심각한 사고를 해야 한다. 할머니가 철이 없어 자신에게만 주는 꿀떡을 혼자서 날름날름 받아먹을 일이 아니라 ‘할머니 그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을 할 정신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뇌물을 준다고 다 받아먹으면 결국 감옥과 같은 좁은 공간에 갇힐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문학정신의 기본이다. 그런 정신적 물질적 뇌물을 많이 받아먹었으니 한국남성으로서 사는 게 얼마나 고달픈가. 너무 많은 짐이 남성들의 어깨에 얹혀 있다는 것이다. 그 부당한 짐을 내려놓아야 인간인 남성으로서 살 수 있지 않겠는가. 해서 남성들도 인간선언을 해야 한다고 본다. 불안한 영혼의 남성들을 그만 보고 싶다. 옆에 있는 사람이 불안한데 여성이 어떻게 인간으로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겠는가. 여성과 남성은 서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반자이다. 남성들이 여성을 짓밟고 정신적 해방을 느낄 수 없듯이 여성들도 남성을 짓밟고 정신적 해방을 느낄 수 없다. 나는 내 앞에 와서 행복, 행복을 부르짖는 수 많은 여성들을 보면서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나의 생각을 단적으로 표현해 준 간디의 말을 거듭 인용한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정말 간디는 인류에 위대한 언어의 선물을 주었다.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 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행복을 부르짖는 이들에게 말한다. 진정한 행복을 원한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넓은 문으로 들어가 휘젓고 다녀보아도 역사가 그대를 언젠가는 칠 것이다’라고.

  

한 나라의 작가는 공인이다. 공인이란 무엇인가? 공인이란 자신의 분야에서 사회적 결핍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내어 그것을 메워야 하는, 적어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의무이고 책임이다. 그것을 우리는 사회성, 공공성이라고 말한다. 공인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우리사회는 이 잣대를 정치인, 법조인, 공직자에게만 들이댄다. 가부장제의 정신적 틀이 이토록 한국인의 영혼을 괴롭히고 있는데 이 부분을 남겨 놓고 그 위에서 민주화만 부르짖고 있으니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여기서 펑 저기서 펑하고 여진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과 결과다. 이것은 정서적 문제다. 또 궁극적으로 언어의 문제다. 언어는 하나의 건축물이기 때문에 이성과 감성이 골고루 균형이 잡혀 있어야 한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언어는 기울어진 건축물과 같다. 기울어진 건축물 안에서 일생을 살고나면 자연히 비딱하게 서 있는 인간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적 현상에 문학인들과 인문학자들은 어떤 노력과 실천을 해왔나? 묻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책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피 속에 존재하고 있다(칼 구스타프 융)

 

자, 다시 상처의 문제로 돌아가자. 이 한이 될 정도의 극심한 마음의 상처들은 집단무의식으로 스며들어 가 차곡차곡 쌓인다.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은 대단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없애려면 특이한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런 의미를 모르니 그것에 대한 수고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수고는 강자들이 해야 하는데 자신들에게 이득이 오는 일이니 기존질서에 편승하고 모르쇠로 일관한다.  약자들은 우선 억울해도 힘도 없고 또 방법을 모르기도 한다. 겨우 할 수 있는 방법이란 게 정신병자가 되거나 자살을 하거나 범죄자가 되거나 한이라는 병을 떠안거나 그렇게 저항할 수밖에 없다. 나는 유독 자살이 많은 우리사회를 이런 선상에서 바라본다. 또 특이한 케이스의 정신병자나 범죄도 이 선상에서 본다.  

 

집단 무의식이란 게 참으로 묘하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하고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나도 모르게 유전자로 전수받은 집단무의식...그래서 칼 구스타프 융은 역사는 책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피 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바로 심리적 측면의 역사를 말한다.  나는 30년이 넘는 시간을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에 잠입해서 샅샅이 훑어 본 경험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거기서 내가 본 것은 너무도 끔찍했다. 첫 번째 소설을 끝내고 그 집단무의식에서 잠시 빠져 나왔을 때 나는 그 상처들이 흘린 피로 온몸이 흠뻑 젖어 피를 뚝뚝 흘리고 서 있었다. 조혜정(연세대 명예교수, 한국여성운동의 대모)은 그 소설을 읽고 이제야 말이 풀리기 시작했구나 하며 엉엉 울었다는 서신을 보내주었다. 조혜정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소설은 우여곡절 끝에 도올 김용옥의 배려로 통나무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40대 초반이다. 김용옥은 그때 한 번도 실제로 만난 적 없는 나에게 ‘탁월한 산문가’란 언어를 선물했었다. 아마 ‘언어와 해방’이라는 작가의 말을 보고 그리 평했던 것 같다. 김용옥이니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그 소설은 앞으로 다시 재편성을 할 계획이다. 그 당시는 다들 거짓말하기에 바쁜 시기였다. 30년 전인 그 당시는 우리사회의 여성성 문제가 너무도 심각하고 다급했기 때문에 그 거짓말을 뚫어내야 하는 형식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해서 소설이라기보다 증언에 가까웠다. 자, 나는 그로부터도 몇 십 년이 지난 이제야 한국인의 정서적 지형도를 손에 넣었고 우리사회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 대입을 하며 금기시 되고 굳게 닫혀 있던 그 비밀의 문을 열고 있다.  

 

이런 구도에서 언어를 선택해야 하는데 뽕짝적인 언어를 쓸 수는 없었다. 뽕짝적인 언어는 대중들에게 인기도 있고 돈도 벌리고 하겠지만, 그런 틀로서는 하려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나는 인문학적인 언어로 심리적인 영역을 다루고 있다. 나의 목적은 악에게 먹힌 마음의 상처에 권력이 붙었을 때 나타나는 거대 악을 약화시키는 데 있다. 그런 거대 악에게 ‘우리는 슬프니 좀 마음을 바꿔주면 안 될까요?’라고 슬슬 기면서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나는 채찍을 들어 그 악을 후려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인간의 자리로 돌아가라. 그것이 당신들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이 글을 읽는 50대 이후에겐 당신이 한국인으로 태어나 극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면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는 것을 말하려는 목적이 있고, 40대 이하는 자신들이 태어난 나라의 심리적 현 주소를 알려주는 것도 목적에 아울러 포함된다. 그러니 언어가 강할 수밖에 없다. 이제 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일을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영화 반지의 제왕을 도입해 본다.    

 

▲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우르크 하이     © 플러스코리아


 영화 반지의 제왕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면 우리의 정신세계에서 일어나는 것과 똑 같다.

 우루크-하이(Uruk-hai)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오크 괴물이다. 영어로 번역하면 Ork-folks로 대충 오크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일반 오크보다 덩치가 크기 때문에 사람만 하거나 사람보다 큰 경우도 있다. 일반 오크와 다르게 햇빛도 견딜 수 있고 신체능력도 월등히 뛰어나며 갑옷과 방패가 훨씬 두껍고 크다. 반지전쟁이 일어나기 수 백 년 전, 이미 사우론은 우루크라고 하여 햇빛에도 견딜 수 있는 상위 오크를 제작하였으나, 사루만이 창조하여 로한과의 전쟁에 투입한 우루크-하이는 모르도르의 오크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식량으로는 짐승의 고기와 빵구더기 빵을 먹는 듯 하며 인육과 오르크의 살코기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저급한 오크들과 동족이라는 인식이 없으며 자신들은 신형 저 놈들은 구형... 이런 식으로 무시하거나 싫어했다. 영화에서 우루크하이 광전사(Uruk-hai Berserker)란 일종의 정예병들도 등장하는데 우루크 하이 중에서도 더 포악하고 강인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양손으로 휘두르는 거대한 양날 검을 사용하는 최강의 악귀들이다.

 

 무대는 '중간계'라 불리는 판타지 세계.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핵심 인물은 키 작은 호빗족인 '프로도'. 프로도는 삼촌 '빌보'에게서 반지를 받게 된다. 그런데 이건 악의 세력 대빵(?)인 사우론이 만든 '절대반지'였다. 강력한 힘이 깃든 절대반지가 여차저차해서 골룸의 손에 들어갔고, 이걸 빌보가 가지게 됐고, 마지막으로 프로도에게 주어진 것.

 

 반지 자체가 사악한 힘을 가지고 있고, 이걸 사우론이 가지게 되면 큰일이다. 따라서 신성회의에서 이 반지를 없애기로 결정했다. 이 절대반지를 영원히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운명의 산 (불의 산)' 용암에 던져 넣는 것이었는데, 이 산은 사우론이 있는 곳이었다.

 

 이 위험한 여정을 위해 '반지 원정대'가 꾸려졌다. 원정대는 9인으로 이루어졌다. 구성원은 마법사 간달프, 인간족 아라고른(아라곤), 보로미르, 호빗족 프로도, 메리, 피핀, 샘, 요정족(엘프) 레골라스, 난쟁이족 김리.

 

 1편(반지 원정대)에서는 반지 원정대를 꾸리고 여행을 시작하는 이야기. 2편( 두개의 탑)은 사우론에 서게 된 마법사 사루만과 그의 군대에 대항하여 싸우는 이야기와 함께 산으로 가는 프로도 일행 이야기가 함께 진행된다. 3편(왕의 귀환)도 사우론 군대와의 대규모 전투와 함께 반지를 파괴하려는 프로도 쪽 이야기가 펼쳐진다. (Empty Dream 참조)

 

 악귀에 먹힌 정신이 댓글 창을 만났을 때

 

 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검은 그림자들이 부정적 에너지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반지를 나르는 사명감에 불타는 호빗족들은 긍정적 에너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어쩌면 저렇게 내가 일생 동안 쫒고 있던 인습의 귀신들과 모습이 똑같은가 싶어서다. ‘나는 에너지 전쟁을 하고 있다.’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그리고 언제나 한국인에게 내재된 합리적인 선량한 에너지와 그 에너지의 성장을 방해하고 내려앉혀 부정적 에너지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악의적 에너지를 추적하고 있다. 내가 미국과 캐나다에 있던 2,30대에 그곳에 이민 와 있는 한국인들에게 흔히 듣던 말, ‘한국인들은 씨가 나쁘다. 질이 나쁘다, 한국인은 안 돼’였다. 의식이 깨어나기 전에 한국을 떠났던 나는 이 말에 승복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귀국 후 그 이유를 찾아가는 와중에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악의적인 에너지와 맞닥뜨리게 된다. Q씨의 지지운동에 한번 뛰어든 적이 있었는데 그 지지진영에서 댓글로 표출되는 악의성을 본 것이다. 그 에너지를 따라가던 중 어떻게 이렇게 악의적인 에너지들이 기가 살아서 판을 치나 하면서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었다. 이게 인간의  진짜 모습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유가 뭐지? 15년 전의 시기니 지금보다 더 극심했다. 사람들은 댓글을 우습게 안다. 이게 무기가 되어 사람을 죽여도 댓글 정도는 시시하게 본다. 나는 그런 우리의 생각에 변화가 와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에 한국에서 일어나는 댓글현상은 집단무의식에 잠재된, 그래서 우리의 핏속에 전수된 왜곡된 모성이 모처럼 자신만의 고유영역이 생긴 댓글창이라는 권력을 만났을 때 악의성이 극대화 한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악귀에게 먹힌 정신이 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할 말이 있으면 합리적인 언어로 조금 더 비판적인 언어로 쓰면 된다. 나는 그런 댓글들을 보면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저급한 오크류로 본다. 아주 가끔 기절초풍할 댓글을 볼 때가 있다.  

 

 ‘이 분, 왜놈의 씨를 원 없이 받았다는 것 자랑하나?

 

이용수할머님을 저격한 댓글이다. 그 댓글을 올려놓은 어떤 젊은 여성은 한없는 슬픔을 느낀다는 표현을 했다. 나에게는 그 여성이 엉엉 울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 댓글을 보았을 때 우르크 하이 광전사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구인지 모를 이 사람에게 이 자리를 빌어서 말한다. ‘그대는 대대손손 그대가 쏟아낸 저 흉측한 언어에 대해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이것은 내가 내리는 벌이 아니다. 나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 하늘의 이법이 그 사람을 다스리게 될 거라는 얘기다. 이법이 없다면 우리는 함부로 살아도 된다. 그러나 삶을 살아보면 이법은 정확히 작동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언어를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약자에게 언어를 함부로 썼기 때문에 그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 거다.  

 

▲ 이용수 피해할머니와 윤미향 의원     © 플러스코리아

 

화랑정신과 김범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정신적 기반은 화랑정신이다.

시인 김지하가 ‘현대 한국 최고의 천재’라고 평했던 김범부(사상가), 범부의 이러한 천재성을 미당 서정주는 ‘하늘 밑에 제일로 밝던 머리’라고 남긴 바 있다. 일제시대에 한 번도 직업을 가져 본 적이 없고 독립운동가(사상범)였던 김범부는 화랑정신을 높게 평가하며 그것에서 한국인의 가장 한국인다운 긍정적 맥을 짚어내는데 일생을 바치며 동방학을 구축해냈다. 그렇다면 화랑정신의 핵심은 뭘까? 현대어로 번역하면 바로 공적정신이다. 공적정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반으로 삼국통일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이래서 정신이 그토록 중요한 거다.

 

그는 말한다.  한국인의 큰 결함인 말살성에 대해서. ‘지위나 세력이 없을 때는 나타나지 않지만, 지위나 세력을 가지게 되면 결단이 난다,’고 범부는 말했다.  6.25 전쟁 때 실제 전쟁 보다 각 마을에서 벌어졌던 좌우 갈등으로 더 많은 한국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사회는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 사실을 박찬승은 ‘마을로 간 한국전쟁’이란 책에서 증언했다. 그 때도 권력이 개입되지 않았다면 그런 처참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Q씨의 지지자들에게서 보았던 ‘악의적 에너지’...이 모든 게 맥이 같다. 그래서 얻어진 결론은 악은 우리의 주변을 떠돌아다니다 미성숙한 인격에 침투를 해서 자신의 업적을 쌓으며 나름 자신들 세계에서 권력을 가지려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귀신 들렸다.’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런 표현을 우리는 흔하게 들어 봤을 것이다. 미성숙을 악이라고 표현한 스캇펙의 말은 미성숙하면 악에게 먹힐 위험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한국인들은 씨가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권력이 직간접으로 개입이 되었을 때 극대화 되는 말살성. 헛되고 황당하며 미덥지 못한 가짜 욕망을 쫓는 지지자들의 약점을 정치권의 강자들은 여태껏 잘도 사용해 왔다. 드루킹도 좋은 예다. 씨가 나쁘다고 결론을 내릴 구조적 이유가 가부장제라는 정신적 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해서 결론적으로 씨가 나쁘다는 말은 진단을 잘못 내렸다고 본다.

 

 인습과 관습

 

우리사회의 인습과 관습은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크고 작은 검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냥 오크에서 우르크 하이, 우르크 하이 광전사까지 그 모습이 다양하다. 연출가 이윤택과 시인 고은, 양진호(한국미래기술 회장), 경주 철인 3종 팀닥터 안주현, 김규봉 감독...등등은 우루크 하이 광전사 쯤으로 보인다. 기절초풍할 모습이라는 것이다. 윤미향은 어디에 속할까? 그것은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에 맡긴다. 내가 인습과 관습을 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방해하고 가두고 짓밟고 희롱하고 조몰락조몰락 거리고 급기야 정신적 강간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으로 설 수 없도록 만든다. 그렇게 방해하는 이유가 겨우 사적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우리사회는 아직 육체적 폭행과 성폭행만 보고 있다. 이제 정신적 폭행과 성폭행을 봐야할 시기가 도래했다. 정신의 성은 진정성으로 표출된다. 이런 인식의 쓰레기는 횡포를 부리지 못하도록 과감히 청소를 해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  이 음흉한 그림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반지의 제왕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우리사회의 인식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가부장제라는 정신적 틀은 강자들의 심리에 암흑세력의 대빵인 사우론이 만든 절대반지를 나눠주는 형국이 되었다. 어떤 이는 새끼손가락에 하나, 어떤 이는 두 손가락에, 어떤 이는 열 손가락 다 끼도록 나눠주었다. 한국사회는 열 손가락에 다 이 절대반지를 낀 위험한 심리를 가진 강자들이 도처에 깔려있다. 또 한국 땅에서 태어났다면 아주 열악한 약자라도 남성들은 다 새끼 손가락 하나라도 절대반지가 끼워지게 되어 있다는 것. 이 절대반지를 영원히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운명의 산 (불의 산)' 용암에 그 반지를 던져 넣어 아무도 가지지 못하게 파괴시키는 것이다.

 

고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부인인 이 명희, 딸인 조현아, 조현민을 보면, 이들은 손가락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 반지를 달고 있는 듯 했다. 그 좋은 자리에 있으면서 어떻게 이들은 훌륭한 인간의 삶에 대한 교육을 이리도 받지 못했을까 의아심이 든다. 이들의 행동을 보면 한국인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오르는 듯 했다. 땅콩회항 사건으로 그만큼 혼이 났으면 가족단위의 반성이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 이것도 정신적인 게으름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시대가 변한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부르던 노래를 계속 불러댔다. 그 정도의 집안 같으면 노블레스 오블리주(귀족은 의무를 갖는다.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 이 말을 현대어로 번역하면 강자인 사회지도층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에 대한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라는 뜻)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어야 했다. 어찌되었든 자신들을 그만큼 키워준 배경이 한국사회라는 것이다. 사회적 윤리성에 대한 책무에 자신들이 어떤 심리적 배경을 가져야 하는 지 부모는 가르쳤어야 했다. 반지의 힘에 눌려 이들은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이 든다. 이들은 가족 전체가 심리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중증으로 보였다. 나는 그들이 가진 그 좋은 위치를 우리사회에 헌신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기를 충고하고 싶다. 그러면 마음의 평화를 갖게 될 것이고 자손들에게도 훌륭한 인간이 되는 길을 가르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우리사회의 동물문제에 관심을 가져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면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될 것이고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입장에선 훌륭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가장 이득이 크다. 그걸 알 수 있는 그 누구의 가르침이 없었던 것 같다.    

 

 사악한 힘을 가진 반지를 영원히 파괴시키려는 반지 원정대인 호빗족들에게 희망을 걸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사회의 10대에서 40대까지의 젊은 세대들이다. 이들에게 반지원정대가 되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사회가 불편하고 ‘이게 나라냐’를 외친다면 가부장제가 하늘의 이법을 무시한 채 요걸 가지면 이익이 온다고 속삭이며 무분별하게 우리사회에 내깔겨버린 수없이 널려 있는 반지들을 수거하는 작업을 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 싶다면 반지들을 수거하라! 그리고 수거하여 골룸처럼 자신이 가지려 하지 말고 프로드와 샘처럼 불의 산에 있는 용암에 던져버려라!’라고 말하고 싶다. 그 반지는 이익이 오는듯하지만 영혼의 파괴를 불러오기 때문에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골룸은 사적정신의 상징성이고 불의 산에 있는 용암은 공적정신의 상징이다. 사적정신을 극복할 수 있는 개념은 공적정신뿐이다. 사회적 부모와 생물학적 부모가 공적정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들과 딸을 차별해서 기를 수가 없다. 재산도 제사를 핑계로 아들 그것도 큰아들에게 부당하게 건네주는 일도 하지 않게 되어 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인문학을 왜 국가적 차원에서 부활해야 하는가 그 근원적 이유가 있다. 그 기초공사가 튼튼해야 그 위에 어떤 집을 짓더라도 무너지지 않게 되어 있다. 돈, 돈만 있으면 하는 것은 허술한 기초공사 위에 현란한 디자인만 잔뜩 얹는 꼴이 된다.(버닝썬 사태는 이런 심리적 배경을 가진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극단적 범죄다. 남양유업 외손녀 황하나와 박유천, 로버트 할리의 마약 사건은 이런 심리적 배경을 덮친 허망함을 벗어나기 위한 출구로 마약을 선택한 것 같다. 현단계에선 그런 허망함으로 덮침을 피하기 위해선 우리사회에 헌신하는 삶을 사는 길밖에 없다. )

 

사실 우리사회에 새로운 물결이 일고 있다. 청와대 청원게시판 같은 것도 이런 일환이라고 본다. 시간을 내어 그런 일에 동참하는 것, 그리고 누군가 엉뚱한 갑질을 하면 벌떼처럼 일어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지를 빼앗아 불의 산 용암에 던져 파괴시키는 것은 좋다. 그러나 자신이 가지려고 반지를 빼앗으면 ‘이게 나라냐’를 외칠 윤리성 확보에 실패를 한다. 그런 것을 내로남불이라고 한다.

 

▲ 故 최숙현선수와 대한체육회     © 플러스코리아

 

내로남불, 진영논리라는 시대적 질병과 반일민족주의

 

나는 코로나19 보다 백만 배 더 무서운 우리의 정신을 점령한 이 흉측한 질병, 이 질병은 현대에 와서 진영논리와 내로남불이라는 시대적 전염병을 만들어냈다. 이 질병에 걸리면 영혼이 좀비가 돼버린다. 자,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전염병은 역사에 구덩이를 파서 묻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이런 질병을 가지고 통일을 논하지 말라, 이런 질병을 가지고 반일민족주의를 논하지 말라. 이런 질병은 또 다른 도적놈들을 만들어내는 꼴이다. 우선 이 질병을 치료하는 게 급선무다. 나는 에너지 전쟁을 하는 반지의 제왕에서 나오는 마법사 간달프의 심정으로 ‘낯붉힐 줄 모르는 감각으로 반만년이나 멍청하게 연장 되어 온 낡은 권리를 움켜쥐고’란 언어의 그물을 이 바이러스를 향해 던진다. 이럴 땐 작은 세균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쌍끌이 작전을 써야 한다. 그러나 내 역할은 여기까지다. 나는 그 그물에 갇힌 바이러스를 국민들에게 넘긴다. 이제 주체적인 국민들이 나서라. 국민이 주체성을 상실하면 계속 악귀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다. 나서서 역사에 깊고 깊은 구덩이를 파서 영원히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묻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대신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란 잣대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정의의 깃발과 위대한 모성이라는 깃발을 꽂아라. 그것만이 악귀들로부터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보호하는 길이다.  언제까지 맨날 싸우는 꼴을 아이들에게 보일 것인가?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자랄 것인가? 한국인이 왜 이렇게 암환자가 많은가? 왜 이렇게 아픈 사람이 많은가? 바로 정치권이 할 일을 하지 않고 맨날 쌈박질이나 하며 저 질병의 바이러스를 국민을 향해 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맨날 입만 열면 부르짖는 소중한 국민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 알고나 있는 것일까?

 

반일민족주의라는 게 어떻게 말이 되나? 나는 정치 진영에는 처음 들어와 보았다. 집단무의식이라는 거대한 뻘물의 강과 곳곳에 촘촘히 심어놓은 덫을 제거하면서 수시로 등장하는 산을 넘느라 3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 다른 걸 깊이 볼 여력이 없었다. 이번에 두 글을 내보내고 어떤 네티즌이 하는 댓글을 보고 이게 뭐지 싶었다. 그의 논조는 왜 이용수할머님이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느냐, 한 달에 300만원 정도 받으면 됐지 그러면 그냥 희생을 하고 자신들의 앞길을 막지 말라는 게 요지였다. 그는 이용수할머님께 대단히 화가 나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이 하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해서 밤낮으로 저 이해하지 못할 말이 뭔가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알았다. 이 전까지는 내로남불, 진영논리, 반일민족주의의가 뒤죽박죽 섞여 있고 그 중 반일민족주의는 희미하게 깔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일민족주의가 큰 기둥처럼 내로남불과 진영논리를 떠받들고 있었다. 그 선상에서 보니 그 사람의 글이 확~들어왔다. 나는 놀랐다.  

 

반일민족주의라는 게 어떻게 말이 되나? 지금은 21세기다. 현대에 있어서 일본은 가까운 이웃이며 우리가 무역을 하면서 살아야 될 동반자이다. 과거 그들의 조상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한국인이라면 용서할 수 없는 일인 것은 맞다. 물론 반일민족주의가 일고의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정확히 기억은 하되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자’ 이게 정답 아닐까? 그리고 고도의 외교기술을 발휘해서 서로 윈윈이 되는 구도로 들어갔으면 싶다. 사실 일본도 들여다보면 딱한 구석이 있다. 나는 왜 일본이 개인들은 훌륭한데 국가적으로는 저렇게 마음이 크지 못하고 좀팽이 역할을 할까 싶었다. 그들은 매 년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자연재해라는 지진에 시달린다. 그것은 누구를 질책할 수도 원망할 수도 보상금을 받아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니 마음이 커질 수가 없다. 독일 하고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독일은 마음의 용량이 클 수 있는 여러 배경이 있다. 일본 국민들은 묵묵히 그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으며 거기다 더하여 언젠가는 저 땅이 물밑으로 가라앉게 되어 있다니 더더욱 딱한 일이다. 만약 한국이 그런 강도 높은 지진을 수시로 매 년 겪는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위안부 문제는 미국이나 각 나라에서 홀로코스트처럼 교과서에 올라가서 후손들에게 가르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성과이고 그것은 일반 시민단체에서 국제적으로 연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다. 사과와 보상금을 받아내는 일은 시민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치권이 게으르게 자신들이 해야할 일을 시민단체에 맡긴 형국이다. 그러다 한 방 맞았다. 교과서에 실리는 일이 일본으로서도 가장 타격을 입는 일 아닐까? 한번 사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대로 이어지는 응징이고 교훈이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사죄보다도 더 큰일을 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 반일민족주의는 어떻게 이렇게 굳건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을까? 그것은 정치인들이 빨갱이 논리에 맞서 지지층을 결속시키고 자신들의 입지를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구도가 만들어진 것과 같다. 한국남성들이 여기에 넘어가는 것은 거대담론만이 흥미를 유발하는 심리와 맞닿아 있다. 남성들이 거대담론을 좋아하는 심리적 배경에는 가부장제라는 정신적 틀에서 파생된 파편들 때문이다. 반일민족주의 하면 뭔가 근사한 일, 의미 있는 일인 것 같다. 그러나 이것도 ‘잊지말자’는 선에서 해야 되는 시기를 맞았다. 이 모든 시대적 허물을 벗어던지고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윤리성을 높혀 우리사회를 훌륭한 사회로 만들 것인가가 시대적 담론으로 부각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어두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개인이 보인다. 지금은 개인은 피를 토하는 일이 있더라도 방법이 없다. 죽어야 그나마 약간 보기라도 한다. 청와대, 국무총리실, 그 외 모든 공공기관에 하소연 해 보아도 끄떡도 하지 않는다. 설마 하겠지만 한번 해 보라. 아예 상관에 보고 자체도 안 하고 밑에 사람들이 서로 다른 기관으로 돌리고 돌려서 결국 실제 죄를 저지른 깡패한테 도로 보낸다. 그러니 그 깡패들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더 오만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거대담론, 표. 진영논리, 내로남불에 우리의 심리가 갇혀 있는 걸 방치할 것인가?  

 

 진중권은 ‘뇌가 없다’는 말을 했다

 

진중권은 미통당은 뇌가 없다는 발언을 했다. IQ야 이미 증명된 사람들이니 이 말은 EQ를 말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미통당 문제는 정서에 ‘조선의 낡은 도포자락’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게 문제다. 이걸 벗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 자신도 환골탈태라는 언어를 자주 쓴다. 나는 제안 한다. 미통당에 들어가 정치를 하려는 사람은 우선 농사를 한 3년 해 보고 국회의원을 하라고. 그러지 않는 한 스스로 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미통당은 빨갱이 논리로 많은 한국인들을 희생시킨 죄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 선거에 이용하려고 온갖 짓을 다 했다. 물론 일부는 실제 죄가 있었겠지만 너무 과도하게 국민들을 협박했다는 것이다. 이 죄를 앞으로는 훌륭한 정치로 갚아야 한다고 본다. 이익이 온다고 해도 할 짓이 있고 안 할 짓이 있다. 이렇게 거대 양당이 진영논리에 빠져 있으면 결국 맴맴놀이만 하겠다는 것을 표출하는 것이다. 개인이 개인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이제는 정신적 틀을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맴맴놀이는 앞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땡깡을 부리는 어린아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한국인의 심리에 자라지 않은 어린아이가 있는 건 심리적 역사를 살펴보면 당연한 결과다.

  

공인들이 자신의 정신적 틀을 사적정신에서 공적정신으로 바꾸는 것... 그걸 위해서는 매일 아침 일어나서 수운 최제우가 선물한 동학주문 즉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를 두 손을 모으고 10번씩 외우고 하루를 시작하길 바란다. 시인 김지하도 민주화 투쟁시절 감옥 좁은 공간에 갇혔을 때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매일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이 주문을 외웠다고 한다. 그가 주예수를 찾지 않은 것은 많은 의미가 있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우리의 진정성, 공적정신을 찾자는 말이다. 더 쉽게 이 사안에 대해 현대어로 번역하면 ‘국민은 나의 애인이다.’는 뜻. 애인을 대할 때 가져야할 심성은 사랑이다. 사랑의 핵심은 ‘보다 훌륭한 해결을 위한 적극성, 윈윈을 위한 선의적 해석, 사회상처치유적인 판단, 인간성 회복, 건설을 위한 파괴, 위대한 모성성의 부활, 밝고 아름다운 색채, 약자를 위한 헌신적인 삶, 부정성을 약화시키려는 에너지, 자신의 자리에서 정신의 일관성을 유지시킨 언어로 사회적인 책임을 지는 공적정신...’이다. 이 반대되는 개념이 바로 ‘야박성, 천박성, 음흉성, 무지막지한 소극성. 크고 작은 오만성, 악의성, 조악함, 고의적인 교활함, 거무칙칙한 색채, 윈윈이 존재하지 않는 파괴성, 나, 나, 나만 부르짖는 사적인 에너지...’이다.

 

결혼할 애인이 아프다는 데, 결혼할 애인이 숨이 막히다는 데...맨날 맴맴놀이에만 정신이 팔려 있으면 애인은 죽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미통당만이 아니라 모든 공직자에게 필요한 주문이다. 기도에 주님을 찾으면 주님께 책임전가를 시키고 자신은 빠져나가기 때문에 그건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지난 100년 동안 주님을 외쳤다면 악의 세력을 2,30%대로 약화시켜 놓았어야 했다. 코19가 덮쳤을 때 괴상한 모습으로 등장한 사이비 기독교인들...나는 그 교주들로부터 악의 세력 대빵(?)인 사우론의 그림자를 보았다. 더 이상 말이 필요하나? 그걸 막지 못한 기독교인들도 책임을 피해 갈 수가 없다. 해서 이 실험은 실패를 했다고 봐야 한다. 또 실패할 수밖에 없는 복잡한 이유는 나중에 밝히겠다.

 

문재인대통령이 알아야할 일

 

문재인대통령은 우리사회에서 일어난 고 최숙현 사건에 대해 어떻게 그 어떤 기관도 움직이지 않았는지 믿을 수 없다는 말을 한다. 나는 지금 그 실체를 밝히고 있다. 이게 체육계만이 아니라 우리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라는 것.

 

민주세력이 들어왔다고 해도 똑같다. 전 국가권력이 표에만 정신이 팔려 개인이 민원을 넣으면 절대로 보지 못하는 상황, 대장에게 절대로 보고도 하지 않고 맴맴놀이에 돌리고 돌려서 깡패에게 그 민원은 돌아가는 상황... 단체로 표가 좀 되면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경험한 일이다. 지방자치 단체장부터 이낙연 전 국무총리실, 김부겸 전 행정자치부장관, 청와대 조국수석까지 다 마찬가지였다. 자살이라도 해야 겨우 시끄럽다. 이게 도대체 웬일인가? 어쩔 수 없다? 왜 어쩔 수 없나? 그 기관의 대표가 되었으면 이런 적폐부터 틀을 바꿔야 되는 것 아닌가? 반일민족주의를 찾을 일이 아니라 작아 보이지만 아주 큰일인 이런 일에 시선을 돌려야 된다는 것. 얼마나 더 죽어나가야 이 더러운 관행이 없어질 것인가?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면서 할렐루야를 외치고 서울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웃기는 일까지 벌어진다.  

 

▲ 영화 반지의 제왕 중.     © 플러스코리아


 결론

 

우리사회는 무슨 일만 일어나면 진영논리로 번지는 이 싸움을 어떻게 봐야하나? 이 모든 것이 집단무의식에서 전수된 왜곡된 모성이 저지르는 반란으로 봐야 한다. 무슨 문제가 일어나면 이렇게 양분화 되어서 복잡하게 전개가 되는 것은 현재의 한 개인과의 싸움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집단무의식에 축적된 상처와의 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량한 에너지가 앞으로 나가려고 하면 언제나 거대한 산이 가로막는다. 그리고 곧 흐지부지 되면서 과거로 회귀한다. 해서 이럴 때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물러서지 말고 새로 등장한 산에 터널을 뚫는 수밖에 없다. 사방에서 덤벼드는 악귀에 먹힌 부정성으로부터 방어를 해내는 유일한 길은 공정과 정의의 깃발을 앞세우며 터널을 뚫어 통과를 해야 한다는 것. 왜곡된 모성과 모성의 부딪침은 반드시 사회상처치유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는 것. 그대로 강대 강으로 부딪치는 것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는 걸 원치 않을 때 취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걸 누가 해야 하나? 이긴 자가 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긴 자는 내로남불, 진영논리를 과감히 벗어 던지고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의 잣대를 갖다 대면서 위대한 모성의 마음으로 공정과 정의의 깃발을 들고 앞으로 과감히 나가야 한다. 안 그러면 길이 없다. 그리고 계속 훌륭한 방법으로 산을 넘는 것을 보여줘야 자연스럽게 악은, 부정성은 사적정신은 약화가 된다. 악은 어느 사회나 있다. 악은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말이다. 단지 2,30%대로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이런 것을 제도적으로 해 놓은 곳을 우리는 선진국이라 부른다. 우리사회는 이 수치가 너무 높다. 악이, 부정성이, 사적정신이 공인의 옷을 입고 이렇게 시퍼렇게 기가 살아서 쌩쌩 거리며 도로를 달리고 있는 건 한국인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 너무 불행한 일이다. 다행히 더민주의 최고위원에 도전한 이원욱이 ‘내로남불 벗어나자. 부끄럽다.’는 말을 했다. 더민주는 이긴 자로서 윤미향 건에 대해 그렇게 처리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수문장 즉 문을 지켜 불행이 들어오지 않게 막는다는 귀신을 없애는 결과를 가져왔다. 새로 등장한 박원순 건은 아직 결론을 내기에는 이른 듯하다. 우리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투운동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보인다. 이것은 ‘미투운동 무엇이 문제인가’에서 짚겠다.

 

 ‘우리 끼리 더욱 더 똘똘 뭉쳐서’라는 표현을 더민주의 지지진영에서 보았다. 턱도 없는 소리들을 하고 있다. ‘우리 끼리“를 부르짖던 시대는 갔다. 국민들이 깨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을 향해 정의와 공정을 실현해나가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을 못 보는 진보 측의 판단에 경고를 보낸다. 윤미향 사건은 국민들에게 너무도 깊은 상처라서 한으로 남아 있을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그리고 국민을 아예 바보로 만든 사건이다. 이것은 앞으로 국민들에게 심리적 배경으로 사용될 것이다. 176석의 의미는 우리 끼리 똘똘 뭉쳐 봐도 길이 없는 시대를 맞았다는 것을 말한다. 폐족이 되고 싶지 않다면 명심하기를 바란다. 가장 끔찍한 것은 과거로 도로 회귀하는 것이다. 미통당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 왜곡된 모성을 바꾸는 일은 위대한 모성 본질을 일깨우는 수밖에 없다.

 
죽어가는 인문학을 부활시키고 인문학을 초등학교 때부터 가르치는 구조...그리고 지난 100년 동안 빼앗긴 하늘을 땅을 찾아와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영토만 국토가 아니다. 하늘도 문화로서 우리의 영역이다. 일제와 미국의 영향력을 거치면서 어떻게 조직적으로 한국인이 하늘의 땅을 빼앗겼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국인이 어떻게 자신들의 자존심을 서양에 팔아넘겼나.....를 알면 아마 기절초풍할 것이다. 위대한 모성을 일깨우는 일은 이 두 개념(인문학과 하늘 땅 되찾기)을 병행하며 동시에 계속 한스러운 상처들이 집단무의식에 쌓여 나가는 구조를 변경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하늘의 땅 문제는 너무 복잡한 일이라 다음 어느 기회에 짚겠다. 내가 그토록 찾던 마지막 퍼즐조각이다. 이제야 전체 지도가 완성됐다. 35년이나 걸렸다!

 

소설가이며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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