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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자 한길-이병호선생을 그리며

병원비 없어 별세. 일제 위해선 30억원, 애국지사는 달랑 10만원

소산 칼럼 | 기사입력 2012/10/20 [03:40]

민족주의자 한길-이병호선생을 그리며

병원비 없어 별세. 일제 위해선 30억원, 애국지사는 달랑 10만원

소산 칼럼 | 입력 : 2012/10/20 [03:40]
▲ 故 한길 권중희선생 장례식장     © 소산

 
[플러스코리아] 소산 칼럼=
'그 죄가, 죄가 아닌 어떤 식으로든 승리자의 역사가 이렇다?'
 
"불쌍해서 어쩐답니까?"

"네에?..."

한통의 전화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무슨 일이 터졌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고, ‘혹시 선생께서 잘못되었다면?...’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사모님! 진정하시고 긴 숨을 들이마셨다 내 쉬고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 네?"

"흑흑... 그 분이 가셨어요, 저 세상으로...불쌍한 양반, 후유..."

며칠 전까지 통화에서도 낭랑하면서도 카랑카랑하게 말씀 하셨던 분. 갑자기 정신적 혼란이 왔다. "날, 빨갱이로 친북주의자로 몰아도 좋아...우리 민족이 힘을 합쳐 통일하자는 데, 그게 나쁜 거여? 우리 민족이면서도 왜놈과 양키 놈의 탈을 쓰고 부와 권력만 움켜쥐려고..."

평상시에도 '힘을 합쳐 통일하자는 데, 그게 나쁜 거여?'하고 말하던 선생.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먼저 여기 저기 언론사에 알려 기사화시켜 놓고 나자, 심장이 멎는 것처럼 충격이 다가 왔다. 사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사모님! 그니까 선생님께서 서거 하셨다는 말씀이신데, 어떻게 운명을 달리 하셨어요?"

"휴...오전에 시장에서 배추 한 다발을 들어다 주셨는데, 힘들어 하시더라고. 조금 가다 멈추고, 숨이 가쁘다며...한 달 전부터 심장이 아팠어요. 돈이 없어 응급약만 먹다가, 수술도 못했지..."

"아! 그러셨군요. 사모님, 제 말 잘 들으셔야 합니다. 선생님은 민주시민과 애국지사들이 모실 터이니, 사모님은 누가 왔다 가나하고 잘 살피세요. 아직 이 나라는 민주화도 되지 못했고 선생님을 용공 좌익으로 몰아 죽였던, 그 자들이 득시글거린다는 사실만 알고 계세요. 훼방 놓을지 모르니까, 혹시 어디 다니실 때 혼자 다니시지 말고, 항상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셨죠?"

"아이고! 불쌍한 양반, 불쌍해서 어째? 흑흑..."

부인은 선생을 ‘불쌍한 양반’이라고만 뇌까렸다. 병이 났어도 돈이 없어 치료도 제대로 못해본 선생을 ‘불쌍한 양반’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선생은 울화병으로 심장이 멎은 것이다. 통일을 위해 많은 글을 쏟아내자, '빨갱이 종자새끼, 더러운 친북 새끼,북한으로 가라...'하고 입에 담지도 못할 쌍욕을 퍼부으며, 좌익·용공으로 몰아가는 '더러운 전쟁'의 민족반역자와 하수인들...

▲ 서울 효창공원 백범 김구 선생묘소 앞에서 거행된 故 권중희 선생 영결식에 참여한 시민들은 원으로 둘러 고인의 유덕을 기리며 지난 날 선생과 함께 했었던 기억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 소산


배달겨레를 대표하는 민족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께서 일개 초급 장교의 손에 암살당했는데도, 오히려 2계급 특진 시키며 보호를 해주고, 경제적 부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었던 나라. 당시 강원도 제2위의 세금 납세자로서 경제적으로 대부호까지 만들어 떵떵거리게 해주었던 나라. 평생을 호위호식, 금의옥식으로 천수를 누리게 만들려고 했던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일당이었다.

그러나 정의와 얌심을 가지고 실천한 권중희 선생이 있었다. 선생은 1936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셨다. 15세에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백범을 민족의 혼으로 가슴에 새겼다. 평범한 시민으로 생활하던 선생의 인생행로가 전기를 맞게 된 것은 1982년이었다. 매국노요 더러운 민족반역자 하수인이었던 테러범 안두희가 모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진실을 외면하고 변명만 늘어놓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해 했다.

선생은 즉각 직장을 그만두고, 민족반역자 하수인를 응징하기 위해 추적의 길에 나선다. 선생은 이때에도 수차례나 정부에 안두희의 거처를 알려 달라고 탄원서도 보냈지만, 전두환 일당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선생의 추적은 계속 되었다. 안두희를 직접 응징하리라 결심한 선생은 1987년 대로상에서 안두희를 만나 몽둥이로 정의했다. 폭행죄로 처벌을 받은 선생은 이후에도 추적은 계속되어 1991년 한차례, 1992년 세 차례에 걸쳐 안두희를 응징하고 멱살을 잡아 백범 선생 묘소 앞에 꿇어앉히게 하여 참회시킨 다음, 진실을 밝힐 것을 종용하여 마침내 당시 지휘계통에 있었던 자 가운데 일부를 고백하게 만들었으나, 이미 그들은 죽고 없는 자들이었다.

▲ 한길 선생의 책을 읽고 감명 받아 제자가 된 정읍 출신 박기서씨가 선생에 대한 회고와 민족반역자 하수인이었던 안두희를  4000원짜리 홍두깨비로 참살했던 당시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 소산

이후 질곡의 한국 현대사의 본질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선생의 제자였던 전북 정읍출신 박기서씨에 의해 안두희는 ‘정의봉’이란 몽둥이로 척살당하기에 이른다. 선생은 자신의 인생행로와 민족정기를 되살릴 방법으로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1993년출간)란 책을 집필했다.

이로써 친일·숭미사대주의자요 민족반역자들의 하수인인 암살범 안두희를 보호한 '더러운 전쟁'의 수괴들을 향하여 민족적 단죄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은 선생이 유일하다 할 것이다. 즉, 구한말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들을 보호한 친일매국노부터 노태우 일당까지 일대 경종을 울려준 사건이기도 했다. 친일앞잡이들을 중용하여 애국지사를 좌익·용공으로 몰아 죽이고, 일제 노래를 부르며 일제에게 충성한 군복과 사무라이 칼을 자랑스럽게 청와대에 떠억 하니 걸어 놓고, 죄 없는 국민을 군인을 시켜 총칼로 처참하게 죽이며, '더러운 전쟁'을 일삼았던 민족반역자들.


▲ 왼쪽 검정색 차람의 경영숙 의원과 재미동포 주태상, 이선옥 부부, 고 권중희 선생님 부인이신 김정자 여사님. 특히 주태상-이선옥부부는 선생께서 미국 문서기록을 찾아 방미 중 ,유학생으로 선생을 도운 인연으로 결혼하여 2살짜리 딸을 두고 있으며, 이번 돌 잔치에 한국 방문시 타계 소식을 듣고 제일 비통해 했습니다. 부부의 연을 맺게 해주신 선생을 평생 아버지로 모시기로 했다고 합니다.     © 소산

'그 죄가, 죄가 아닌 어떤 식으로든 승리자의 역사가 이렇다'

선생은 그들 행위에 대해서 단 한차례의 제대로 된 민족정기구현의 단죄였다. 일제가 우리민족의 정신을 없애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조그만 당쟁을 부풀리고 왜곡하여 포코스로 맞추어 부끄러운 조상을 둔 저질스런 민족으로 만들어 버리고, 오직 일신의 영욕과 지역이기주의 패권을 위해서라면, 서로 간 헐뜯고 모사와 음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민족반역자들을 양성하여, 광복을 맞은 후에는, 일제를 주인으로 받들던 그들 주구는 일제가 패망하자 백성을 깔아뭉개고 주인으로 우뚝 서서, '그 죄가, 죄가 아닌 어떤 식으로든 승리자의 역사가 이렇다!' 하고 독재자, 군사정권, 지역정권에 일본과 미국을 등에 업고 종일·종미사대주의자로써 권력과 부를 축적하고 아첨과 아부로 일관하며 우리 민족에게 '더러운 전쟁'을 했던 민족배신자들.

그들은 식민지 된 조국을 되찾고자 독립운동을 했던 광복군과 선생과 같은 애국지사들을 철저하게 좌익·용공으로 몰았다. 오히려 자신들이 '민족주의자, 보수주의자'로 위장하고 둔갑하여 오늘 날 까지도 광분하고 있다. '더러운 전쟁'의 하수인들과 민족반역자 하수이었던 안두희는 백년 천년 호의호식하며 살 것처럼 활보하고 다녔다.
 
그러나 민주화의 바람에는 어쩔 수 없었던지 음지로 숨어 다니다 '민족의 정의'란 이름으로 단숨에 척살당해, 그와 그 일당들이 원하는 천수를 누리지는 못했다. 아직도 그 지역패권주의를 못 넘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 '그 죄가, 죄가 아닌 승리자의 역사'라면서... 
 


평생 ‘민족정기구현’를 위해 헌신해온 故 권중희 선생. 그런 선생이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유언장도 없이 허무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었다. 심장마비가 원인으로 밝혀졌다. 선생께서는 가슴을 부여안고 고통과 통증을 호소하며, 또 최후의 순간까지도 남북통일과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기 위해 인터넷에 글을 쓰시다, 울화통에 쓰러지고 말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병을 한 달 전에 알았다는 사실인데,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나 그 애통함을 더했다. 일평생 투쟁만 하시는 선생을 조용히 내조했던 부인 김영자 여사는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해 투쟁만 하시다, 지켜보는 이 없이 허무하고 쓸쓸하게 돌아가셔서 불쌍하기 짝이 없다..."는 말씀만 하셨다.
 
 ‘이 나라 민주시민과 애국지사들은 돈이 없어 치료도 못받고, 죽어서도 묘지에 묻힐 운명이 못되는 구나’ 할 정도의 복받히는 감정이 솟구쳤다. 또 한 번 선생의 서거가 살아 있는 우리들의 남은 짐으로 남았다.

▲ 국화꽃 한 송이를 바치며  선생의 가심을 안타까워하는 시민들  © 소산


즉 정부의 무책임한 행정과 ‘나몰라라’ 하는 것은 아직도 민주화가 제대로 안 되었다는 증거이며, 민주투사들에 대한 예우가 없어지고 있다는 현실이다. 방기와 방조가 난무하는 정부가 아니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는 지금이라도 민주투사들과 애국지사들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하고, 최대한의 예우와 장례절차, 국립묘지 안장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살아 있는 애국지사들이 사후에 대해 불안하지 않도록 철저한 대책을 강구해야만 할 것이다.

특히 정치통일사회단체들. 이들은 오로지 양지만을 쫒는 사회활동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후대에 가면 다 알 것이기 때문이다. 한숨만 나올 뿐이다. 일신의 안달을 위해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국민들도 각성해야 할 때이다. 그들 주구들의 논리에 현혹되지 말고 무조건 진보요 보수라는 어깨에 맞추려하지 말고, 냉철하게 그 자리에서 '민족정기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하고 모색해야 할 것이며, 가난한 애국지사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국민적 성원이 뒤따라야만 한다.

민족정기 구현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진정한 애국지사인 ‘한길 권중희’ 선생이 2007년 11월 16일 향년 72세로 타계하셨다. 선생은 정치사회경제 모리배들이 난무하는 나라에서 진정으로 민족의 아픔을 생각하는 의지와 몸짓을 하나로 살아오신 후대의 귀감이며, 민족 운동의 큰 스승이었다. 민족의 정기를 바로세우기 위해, 보수와 민족주의자로 탈바꿈한 모리배들을 축출하기 위해 헌신하는 가운데, 갑자기 너무나 초라하고 허무하게 영면하신 故 권중희 선생은 비록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그 숭고한 애국정신은 진정한 민족주의자요, 깨워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명박정권은 종일-종미 정권인가? 

▲ 한국독립유공자협회장 故 이병호선생 영결식장     © 소산

▲ 오열하는 故 이병호 선생의 유가족.     © 소산


2011년 11월 11일 아침, 故 이병호선생의 영결식이 거행된 서대문 형무소에는 비가 내렸다. 다행히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의 결단으로 비는 피할 수 있었지만, 장례비용 500만원이 부족해 애를 태웠다.

수 많은 애국지사를 가두고 고문했던 장소인 서대문형무소. 이런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한길 권중희 선생은 돈이 없어 수술도 못했고, 이병호 선생은 병원비 1000여 만원의 빚을 가족에게 남기고...

그런데 이날 빈소를 찾은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이 내놓은 것은 '부조금 10만원'과 대통령 이름이 적힌 화환 하나였다. 더욱 더 한심한 것은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 10단지 입구에 30억원의 혈세로 ‘일본군장교관사’를 복원했다는 데, 숭고한 독립의 가치를 전파한 애국지사에게는 달랑 10만원 이고, 청산하여야 마땅한 '일제 잔재인 일본군 숙소' 복원에는 왜, 30억원이나 지출했나 하는 문제이다.
 
선생 부부를 부양해온 큰 며느리 구묘정(52)씨는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꾸려갈지 막막하다. 친일파 자식들은 떵떵거리며 사는데 독립운동가 가족들은 언제까지 이리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 10단지 입구에 30억원의 비용을 들여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의 존엄을 악랄하게 유린했던 일본군 장교 관사를 문화재적 가치가 있어 복원했다고 한다. 더욱 더 한심한것은 서울시와 마포구청은 복원한 일본군관사를 문화재청에 문화재 등록을 신청하였고, 문화재청은 등록 문화재로 지정 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이하 기사 대체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111/h2011111202320221950.htm)

▲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이병호 회장의 언론특보을 맡을 당시인 2011.8.15. 광복절에 찾아뵙고 기념촬영.     © 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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