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옛날옛적에(17)-진통끝에 재탄생한 신 러시아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20/08/23 [19:31]

옛날옛적에(17)-진통끝에 재탄생한 신 러시아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20/08/23 [19:31]

  이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함께 전 세계를 양분해서 조종하다시피했던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된 후, 연방에 속했던 여러 개의 국가들이 다시 연합하는 형식으로 엉성하게 결합된 독립국가연합으로 모양새가 바뀌었다고 한다.

 

 

   문화와 신앙체계가 다른 민족국가적 특성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도, 새로 성립된 독립국가연합은 원칙적으로 상부상조를 내세우고, 뒤늦게나마 함께 자본주의적 발전을 도모하려 했다고 한다. 애초에 우려되었던 각 나라 사이의 혼란이나 투쟁은 벌어지지 않았으므로 순조로운 출발을 하는 듯 했으나, 제정러시아 시절부터 수백년 동안의 영토확장과 정복과정에서 생겨난 그 많은 갈등이 한 순간에 사라지기를 바라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회주의적 또는 공산주의적 연대감이 무너진 자리에 새로 들어선 자본주의적 발전이라는 낯선 목표를 달성하려고 각 독립국가들은 저마다 살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독립국가연합의 경제적 강점은 막대한 지하자원산림자원농축산물 등 일차산업을 이용할 수 있는 풍부한 천연자원에 있었다. 특히 중앙아시아와 코카서스 지방의 석유자원과 천연가스자원은 공업을 발전시키는 데 가장 긴요한 에너지원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그러나 국력이 약한 체첸공화국이 석유자원과 중요한 송유관 경유지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은 발전이 아닌 불행의 단서가 되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많은 갈등과 박해를 경험했던 체첸인들이 완전한 분리독립을 선언하자 서기 199412월에 러시아군이 전격 침공함으로써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졌다.

   체첸과 러시아의 갈등은 이미 서기 1792년부터 본격화되었다고 한다.

 

   사방으로 영토확장을 해 가던 제정 러시아는 카프카즈 산줄기를 따라 생활하던 체첸인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아 많은 타격을 받았다. 매우 힘들게 체첸을 점령한 후 러시아는 체첸인들을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모두 아홉 차례에 걸친 강제 대이주 과정에서 수많은 체첸인들이 희생되었다.

 

   마지막 아홉 번째 강제 이주는 체첸인들이 나치스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스탈린 치하였던 서기 1944223일에 시행되었다. 스탈린의 수족이었던 베리아가 지휘한 이 작전에서 하루 만에 만이천여 명이 피살당했고 대부분의 가정이 인명피해를 입었다. 살아남은 체첸인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도 없이 무작정 화물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했는데, 위생과 생존여건이 열악한 이송과정에서 절반가량이 티푸스로 죽었다. 그보다 7년 전인 서기 1937년에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당한 수십만 한국인 교포들 또한 비슷한 고통을 먼저 겪었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하겠다.

 

   강제 이주된 지역에서도 체첸인에 대한 배려는 일체 없었고 인근 주민들이 도와주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 적수공권으로 황무지에 내던져진 채 살아나야만 하는 극한 환경에 몰렸던 것이다. 그 모든 과정에서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인 20여만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졌고, 체첸인들의 원한은 골수에 사무칠 수밖에 없었다.

 

쏘련 붕괴 후 벌어진 독립전쟁에서도 체첸인들의 비극은 그대로 대물림되었다.

 

   서기 1994년에 시작된 러시아와의 1차 전쟁에서 열악한 조건에서도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용한 효율적인 게릴라전술을 구사하며 끈질긴 항쟁을 벌인 끝에 서기 19968월에 평화협정을 맺었다. 서기 19975월에는 다시 신평화조약을 얻어낸 후 일단 소강상태로 들어갔던 양국 관계는 불과 2년 후인 서기 1999년에 다시 악화되었다.

 

   러시아 권력자들은 세계 최대 매장량으로 추정되는 카스피해의 석유자원 일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러시아와 유럽으로 통하는 송유관이 통과하는 체첸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만일 체첸이 독립에 성공하면 러시아연방 내 수십 개의 다른 자치공화국들도 연쇄적인 독립을 시도하여 큰 곤경에 빠질 것을 예상하여 체첸을 독립운동 실패의 본보기로 만들고자 했다. 덧붙이자면 러시아와 다른 문화적 배경(러시아정교 : 이슬람 수니파) 또한 상호 극단적 적대감을 악화시키는 한 요인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정치경제종교적인 분쟁의 모든 요소를 구비한 체첸사태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전쟁은 체첸 측의 과욕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체첸인들은 같은 문화적 배경과 유대감을 가지고 있던 이웃 다게스탄과 합병을 시도하려고 서기 19994월에 다게스탄으로 침입해서 체첸-다게스탄 공화국건설을 선언했다. 그런데 같은 해 여름에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에 여러 차례 아파트 폭탄테러가 벌어지자 러시아정부 측은 테러 배후를 체첸회교반군이라고 지목했고, 95일에 체첸 국경부근의 반군거점에 대한 무차별 공습을 단행했다. 그로부터 다음 해 2월까지 치열한 공방전 끝에 수도 그로즈니가 러시아군에게 함락당했고, 전쟁은 게릴라전과 자살테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어 양 측 모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잠시 사태가 진정되는 듯이 보이던 서기 200210월에 모스크바의 한 극장에서 체첸 반군지도자 바라예프가 사흘 동안 관객 수백 명을 인질로 삼아 러시아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치명적 마취가스를 동원한 러시아 특수부대의 작전으로 진압되었고, 그 과정에서 운 나빴던 관객들을 포함하여 140여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그 반군 중에는 여러 명의 여성전사들이 허리에 폭탄을 두른 채 죽음을 맞았는데, 그녀들은 체첸 독립전쟁 전사자들의 부인들로 밝혀져 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체첸사태의 후유증은 체첸인들을 막가파로 몰아 넣어서 납치마약밀매무기밀매 등 일반적으로 금기시되고 사회악으로 지탄받는 돈벌이에도 거리낌 없이 뛰어 든 것으로 알려졌다. 코란의 가르침과는 분명 크나큰 괴리가 있으나, 독립운동 자금이건 단순한 생활 자금이건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그들에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도 주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러시아측에서도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체첸인들은 물론 인근 국가들과의 평화공존을 비교적 잘 유지했다고 한다.

 

   그 후 역시 에너지 자원 문제를 둘러 싸고 같은 슬라브족 나라인 우크라이나와도 해묵은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당시 푸친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으로 당분간은 크게 확대되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종족, 같은 언어, 같은 문화를 가진 나라들끼리도 역사적 배경과 경제적 득실에 따라 언제든지 이합집산을 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명백한 예라고나 할까

 

   마치 당시 세계 유일의 분단상태에 놓여 있던 남북한 처럼 -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신 러시아의 등장 관련기사목록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울주군, 제5회 작천정 벚꽃축제 개최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