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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력사] 탈놀이

이형주 기자 | 기사입력 2020/09/27 [15:29]

[조선력사] 탈놀이

이형주 기자 | 입력 : 2020/09/27 [15:29]

 

▲ 탈놀이. 사진=조선의 오늘  © 플러스코리아



탈놀이

 

가무놀이에서 그 유래가 깊다.

탈놀이의 유래에 대하여서는 신라의 소년 황창랑이 백제에 가서 칼춤을 추다가 백제왕을 찔러죽이고 죽은것을 추모하여 그의 얼굴과 같은 탈을 만들어쓰고 칼춤을 추게 된 때로부터 시작되였다고 전하여온다.

보다 오랜 풍속에 범이나 사자와 같은 사나운 짐승의 탈을 쓰고 짐승을 잡기도 하고 적을 놀래우기도 하면서 그것을 용감성의 상징으로 삼는 현상들이 있었던것으로 보아 탈놀이는 삼국시기보다 퍽 앞선 시기부터 있었다고 생각된다.

탈놀이는 후세에 짐승탈놀이, 칼춤, 봉산탈놀이, 양주탈놀이, 오광대놀이 등으로 발전하였다.

일찍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우리 나라 탈놀이는 이웃나라에도 보급되였다.

일본력사책에는 612년에 백제사람 미마지가 일본에 건너가서 백제의 《기악무》를 보급하여 일본탈놀이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씌여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탈놀이가운데서 지방적특색이 뚜렷한것으로서는 황해도의 봉산탈놀이, 강령탈놀이, 북청지방의 사자탈놀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산대놀이, 경상도의 오광대놀이 등을 들수 있다. 탈놀이로서 이름난 봉산탈놀이는 4~5월에 놀았다.

이 놀이는 봉건사회의 심각한 계급적모순을 형상적으로 폭로한것으로서 통치계급에 대한 당대 인민들의 증오와 적개심을 반영하였다.

봉산탈놀이는 12과장으로 되여있는데 탈춤과 가면극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봉산탈놀이의 사상주제적내용은 부화타락한 중들의 부패한 생활과 봉건량반통치배들의 타락과 무능력, 그들의 몰락의 필연성 등을 상징적수법으로 폭로한것이였다. 다른편으로는 당시 인민들이 지니고있던 착취계급을 증오하고 배격하는 감정을 그들에 대한 조소와 야유, 부패한 생활에 대한 폭로를 통하여 표현한것이였다.

이밖에 서울을 중심으로 한 산대놀이, 경상도의 오광대놀이들도 그 주제는 봉산탈놀이와 비슷한데 부분적으로 지방적인 특색을 가지고있었다.

북청지방에서 정월보름때에 놀던 사자탈놀이는 짐승탈놀이의 대표적인것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사자탈놀이는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 그것은 6세기의 음악가 우륵이 작곡한 12곡들중의 하나인 《사자놀이》가 잘 보여주고있다. 북청사자탈놀이는 탈춤과 우습강스러운 재담이 혼합된 형식으로서 량반통치계급의 탐욕과 착취적본성을 폭로하는것을 기본내용으로 하고있었다.

밝은 달빛을 받으면서 넓은 놀이장을 마음껏 뛰노는 용맹한 사자의 모습은 이 춤을 보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씩씩하고 힘차며 활달하고 격동적인 사자탈놀이는 우리 인민의 힘있고 용맹스러운 기개를 잘 표현하였다.

우리 나라 탈놀이는 적지 않은 제한성과 일부 미숙한 점들을 가지고있었으나 오랜 옛날부터 발전하여온 민족문화유산의 하나로서 우리의 인민적무용예술을 보다 풍부히 하는데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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