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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옛적에(23) - 남한국민의 대오각성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20/11/04 [12:16]

옛날옛적에(23) - 남한국민의 대오각성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20/11/04 [12:16]

  80여년 전에 이데올로기대립상태가 해체되고 전 세계가 자본주의 일색으로 급변하면서 한민족에게는 다시 한 번 큰 시련이 닥쳤다. 특히 자족자급경제를 포기하고 소위 수출주도형 경제니 자유무역경제니 하는 환상을 쫓아 다녔던 남한의 타격은 극심한 것이었다고 한다. 옛미국의 강요하에 사회의 모든 분야가 일방적으로 자유개방당한 결과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생존에 가장 중요한 농업마저 황폐화되어 버리고 말았다고 하니, 남은 일이라고는 앉아서 망하는 날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으리라. 실제로 국제경쟁력이 있는 상품이라고는 거의 전무하다시피했으니 무엇으로 수출입국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자본시장마저 '자유개방'되어 돈많은 외국인들이 남한의 기업들마저 하나 둘씩 장악해가고 있었고, 제품수출이 안되어 문닫은 공장들로부터는 신제품대신 실업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한국(남한)경제의 파탄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소위 정경유착으로 불리운 정상배들의 추악한 부정축재가 심화되면서 정상적인 이윤을 내지 못한 대기업들은, 늘어나는 외채이자 상환에 급급해서 또다른 외채를 도입하는 게 일상화되었는데, 대체로 그러한 외채들은 원리금을 단기간에 상환해야 하는 고율의 단기외채(, 국제고리대금)로 충당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국가경제는 더욱 외채의존적으로 화해갔다. 실제 외채규모는 전세계적으로 1,2위를 다툴만큼 거대하게 팽창했으며, 무역적자가 계속되는 동안 그것은 도저히 자력으로는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더미가 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추악한 정상배들은 자신들의 실책(失策)을 가리려고 세계무역 10위국이니, ‘선진국경제회담(OECD)가입이니 하면 허풍을 쳤는데, 실속없는 무역은 적자규모만 눈덩이처럼 불렸고 선진국타령은 대다수의 국민들마저 들뜨게 만들며 과소비를 부추겼다. 마치 부지런히 소비에 몰두하지 않으면 경제성장이 달성되지 못할 것처럼그리하여 마침내 국민들은 국가경제의 진상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경쟁적으로 소비에 열중했다고 한다. 마치 마약에 중독된 환자가 중독상태에서 깨어나기를 두려워하고 계속 더욱 강력한 마약을 찾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일용노동자들을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가정마다 자가용차를 한 대 이상씩 굴리면서 모두가 부자가 된 듯한 환상을 즐겼다고 한다. 마치 좋은 차, 고급차를 소유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기라도 하듯이, 자가용차가 없으면 스스로 형편없는 가난뱅이임을 증명하는 수치스러운 일이라도 되는 듯이진상으로 말하자면 자가용차가 아닌 자전거도 과분한 형편이었는데도 말이지! 그러나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한 허상은 결코 오래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고급생활에의 욕구는 당연하게도 노동자들의 임금상승 요구로 표출되었고, 부정부패가 일상화된 정상배들은 자신들부터 정직하게 국가경제에 이바지할 생각은 않고, 그러한 민중의 장미빛 환상을 부추기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러한 노동자들의 요구를 막을 방법도 없었으므로 임금에 관한 한 자유방임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급격히 상승하여 수출단가가 비싸졌기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허약한 체질의 수출산업체들은 그나마 수출경쟁력이 더욱 약화되어 경영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소위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한 이후 30여년간 오로지 수출지상주의에 의존했던 한국경제는 수출업체들의 경영부진으로 인하여 관련업체들이 줄줄이 도산하는 위기에 빠졌고, 마침내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나서 단 1년분(실은 약 1개월분)의 원리금상환조차 불가능해지는 국가적 도산사태를 초래했다. 그것은 파행으로 일관했던 수출지상주의의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소위 경제지도자들로 자처해 온 그 누구도 책임지려하지 않는 가운데 마침내 파국이 몰아쳐 왔다. 한국의 경제정책 운용실정으로는 도저히 원리금회수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한 국제자본가들은 국제통과기금(IMF)을 내세워서 한국경제를 위탁경영하기로 결정내렸고, 그 결과는 가히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국제통화기금의 긴급자금대출에 기대어 임시조처를 취함으로써 당장의 파국만은 막는 조건으로 당시의 정상배들은 민족경제를 송두리째 외국인들의 수중에 내 주었다. 그러나 외국인들의 목적은 처음부터 한국경제를 자립이 가능한 튼튼한 경제체질로 만들어주고자 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경제력 증강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자 했을 뿐이므로 민족경제는 더욱 크게 왜곡되어 갔다.

 

   연속되는 주가폭락에 얼이 다 나가 버린 주식투자자들은, 외국인들이 회사주식의 50%이상을 소유할 수 있게끔 특별조치가 취해지자 환호하기도 했으니, 나라야 결딴나건 말건 주가만 오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좋다는 매국적 뱃짱이었던 것이다. 국제적인 기업매수자유화바람을 타고 수출부진에 의한 경영난과 주가폭락으로 자금줄이 막혀서 문닫은 한국의 기업들을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인수할 수 있었던 외국(주로 옛미국과 옛일본)의 자본가들은, 이번에는 너무나 늘어난 실업자들때문에 오히려 더 저렴해진 노동력을 얻을 수 있어서 값싼 제품 생산이 가능해졌다고도 한다.

 

   그리고 총체적으로 파산상태에 빠진 한국의 금융업체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한 그들은 만성적으로 빚에 쪼들리던 농민들에게도 농지를 담보로 잡고 대출해 주었으나, 수출지상주의 이후에 이미 파탄난 지 오래였던 농민들의 경제력으로는 처음부터 빚갚을 능력이 없었고,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마지막 생존보루인 농토마저 잃게 되고 말았다. , 공장과 사람과 땅을 포함한 모든 것이 외국자본가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지경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유무역을 빙자한 새로운 식민지시대의 도래였다.

 

   북한은 어차피 국제무역에 의한 외부의존도가 극히 미약한 자급자족 지향적인 사회였기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별로 타격을 받지는 않고 있었다. 북한이 처했던 문제는 과도한 군사비 지출과 식량의 만성적인 부족으로 인한 민생의 파탄이었고, 옛 공산우방국들이 사라져 버린 상태에서 어떠한 해결책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어 갔다.

 

   그래도 남한쪽의 사정이 그런대로 외형상으로나마 풀려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때까지는 남한이 북한에 대해서 경제적 우위를 차지한 상태에서 북한에 대해서도 어떤 혜택을 줘 가면서 민족통일에 접근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희망이라도 가져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사회의 생존조건마저 내외적 곤경에 처하면서 그처럼 파탄으로 치달리자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근본적인 민족생존문제에 관심을 쏟게 되었고, 그것은 오히려 한민족부활의 새로운 단서가 되었다고 한다.

 

   외국자본가들이 독사같은 수법으로 한국인들의 피를 말려가는 데 대하여 한국인들이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그렇게도 몽매에서까지 경제부흥이니 풍요한 사회건설따위를 부르짖은 지 반세기가 지나도록 그 많은 노동자들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문자그대로 분골쇄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외국자본가들에게 민족경제의 주도권을 내어주고 대규모 실업사태에 직면하게된 데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동안 오로지 돈벌이에 매달렸던 노동자들도 실업사태와 물가고와 임금대폭인하 등으로 인하여 생존자체의 위협에 빠지게 되면서부터 누가 특별히 가르쳐 주지 않았어도 한국사회의 경제구조에는 뭔가 기본적으로 큰 문제가 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경제개발이전 옛 시절의 그 좋던 인심은 간 곳이 없고 모두가 악에 받쳐서 눈알들을 부라리면서 바쁘게 다투어가며 살아야 하는 삭막하고 어두운 사회풍조에 대한 환멸과 자탄(自嘆)이 없을 수 없었다.

 

   그나마 그렇게 애가 닳아서 추구해 온 경제안정이라는 사회적 목표는 국제경쟁력의 미비로 파탄에 빠지고 길거리마다 실업자와 구걸꾼들이흘러 넘치자, 그 누구의 눈에도 한국의 선택은 잘못되었던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국제경쟁력에 관한 한 한국은 희망이 없었다. 경쟁력은 국제적대자본가들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경쟁을 피하면서 국민경제를 생존수준으로나마 우선 유지시키려면 식량의 자급자족부터 도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명확했다. 한 때는 한국상품을 팔아서 외화를 많이 번 다음, 그 외화의 일부로 식량을 싸게 구입해오면 나라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들을 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팔아먹을 수 있는 경쟁력있는 물건은 별로 없게 된 반면에, 벌레나 쥐들도 먹고 살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오염된 외국산 식량만은 빚을 내서라도 사와야만 하는 엉터리없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으니, 그 잘났던 비교우위론자들은 저들의 추악한 죄악상이 드러나 민중의 역사적 심판을 받게될까 두려워하여 하나 둘씩 비실비실 해외도피의 길을 떠나갔다. 그 추악한 인간(人奸)들의 발걸음마다 역사의 심판이 임할진저!

 

   공장들이 대부분 문을 닫아버렸거나 취업의 기회가 극도로 줄어 든 도시에서는 도저히 생계의 수단을 찾을 수 없게 된 많은 실업자들 중에서 버려졌던 농촌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당시에 농가의 절반이상은 빈집인 채 황폐화되어가고 있었고, 멀쩡한 문전옥답들이 황무지로 버려져 있었다. 일년동안 지낼 수 있는 만큼의 식량과 종자만 있으면 일년 후부터는 우선 먹고 사는 것만큼은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는 무턱대고 도시로 몰려 들었듯이 이번에는 농촌으로 몰려 들어갔다.

 

    따라서 일부 황금광 건축업자들의 더러운 뱃속만 기름지게 해 줄 뿐이었던 도시의 저 흉한 쓰레기 잔해들 아파트들은 빠른 속도로 공동(空洞)화되었고, 도시들 자체가 텅텅 비어갔다. 마치 대단위의 유령도시들인 양, 공단들을 바라보고 세워졌던 많은 공단위성도시들은 공단들이 더 이상 조업을 하지 못하게 되어 폐쇄되자 아무도 없는 공터가 되어 갔다.

 

   민중의 분노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으나 정작 그 분노의 원인도, 방향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동안 한민족을 캄캄한 나락으로 이끌어 간 허상(虛像)의 최면술은 집요하고도 강력했던 것이다. 그 모든 허상의 근원은 일차적으로 남북한의 역대 자칭민족지도자들의 반민족성에 있었다. 그러나 가장 지탄을 받아야 마땅한 그들이 오히려 온갖 권세를 쥐고서 그처럼 파탄에 이른 모든 시책들을 민족중흥을 위하여한다고 역공(逆攻)을 취했었기 때문에, 한민족사회는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에 지대한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 때 나라를 팔고 민족을 팔던 자들이 여전히 민족을 위하여권세를 쥐고 있는 세상이 과연 어떤 세상이었을까?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이 잘 안 간다. 마치 악마들이 자기들을 따라오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꾀는 것과 마찬가지는 아니었을까?

 

   하기는 당시에 한민족사회를 휩쓸다시피했던 저 광기어린 말세론적 서양종교들도 한민족의 파탄을 초래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민족을 까닭없이(사실은 매우 깊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으므로) 미워하는 서양종교광신자들은 한민족사회에서 민족개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만일 민족의식을 바로 가지고서 한민족의 우수한 민족사상이나 민족문화를 발전시킬 때는 자신들의 설 자리가 없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저들은 민족을 위한 기도회따위를 뻔질나게 열면서 민족지도자들임을 자처하기도 했다고 한다. 서양문화에 완전히 넋을 빼앗긴 저들은, 마치 마약장사꾼이나 마약중독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약을 퍼뜨리듯이 편협한 서양종교를 한민족사회에 페스트처럼 급속히 퍼뜨려갔던 것이다.

 

   외세나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은 무턱대고 풀어놔 버리고, ()민족적인 것은 모두 저열하고 국제적인 것(, 외세와 외래문물)은 모두가 훌륭한 것이라는 관념을 한민족사회 깊숙이 심어놓았던 외래사상의 독아(毒牙)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 한민족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외세의 노예로 전락해 갈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이 민중사이로 일단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남한사회는 급속한 질적 변화를 일으켜서 정도(正道)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명실상부한 민족사회의 건설이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이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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