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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옛적에(25) - 민족정사를 찾아서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20/12/07 [09:17]

옛날옛적에(25) - 민족정사를 찾아서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20/12/07 [09:17]

 

▲ 대조선인의 위대하고 찬란한 역사를 숨기기 위해 그어진 38선.



  우리의 아름다운 세상은 어느 시점에 한꺼번에 나타난 게 아니란다.


  사실상 그런 세상은 도저히 나타날 수 없을 거라고 인류 대다수가 고개를 젓고 있을 때 싹이 트기 시작한 거야.


  전에도 벌써 여러번 얘기해 준 적이 있던 서기 21세기 초의 한심하기 그지없던 인류사회 - 모든 면에서 혼돈의 도가니였는데도 최고의 문명을 누리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던 세상이었지. 아니, 그렇게 집단적 착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정신적 고통을 버텨낼 수가 없었던 세상이었다고나 할까. 달리 뾰족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상가나 지도자도 없었으니 그냥 다 '세상은 그런 건가보다'하고 체념하고 사는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그런 왜곡된 세상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사람들도 여기저기서 나름대로 인류회생의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어. 나의 할아버지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지.


  할아버지는 시골의사였어.


  처음에는 수도권에서 개업생활하면서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과 한 10년 정도 정말 열심히 연구하셨다고 해. 세상을 제대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 모든 방법들에 대해서 -


  그리고 그 10년 동안 세상의 모든 역사들을 샅샅이 연구하면서 마침내 한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지. 그건 바로 세상사 왜곡의 근원은 바로 역사왜곡에서 시작된 거라는 거였어.


  처음에는 당시의 현대사가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그 다음에는 산업혁명 이후부터 이미 크게 왜곡되었다는 것을, 그 다음에는 소위 '대항해시대'부터 모든 세상의 가치관과 생활양식이 이미 왜곡되기 시작했다는 데까지 알게 되셨지. 그것은 즉, 당시 벌어지고 있던 수많은 분쟁과 사상적 갈등이 바로 컬럼버스라는 작자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거였지.


  하지만 할아버지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서양문명의 뿌리라는 그리스-로마 문명 자체도 참으로 한심한 정신세계의 산물이라는 것도 알아내셨어. 서양인들이 자랑하던 근대문명이 그리스-로마 문명을 재생시킨다는 소위 '르네쌍스'를 내 걸고 시작된 거니까, 말하자면 서양의 정신세계에 기댈 건 애시당초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을 아신 거야. 그러니 새로운 세계를 열려면 서양 것이 아닌 동양적인 어떤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데 생각이 도달한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지.


  동양역사라고 하면 그 당시에는 옛 중국을 중심으로 해석하던 때였어.


  그런데 그 때 많은 선각자들이 이미 동아시아 역사의 진실을 상당히 깊게 파헤치고 있어서, 할아버지는 그 분들이 연구해놓은 수많은 자료들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접근하셨지. 그 결과 세계사의 주류는  아니고 중국도 아닌, 바로 우리 한민족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되셨다고 해. 그건 정말 엄청난 발견이었고, 환희였겠지.


  하지만 여기에는 굉장히 조심해야 할 게 있다는 걸 할아버지는 곧 알게 되셨어.


  당시 한국의 역사학계(소위 '강단사학')는 완전히 일본제국주의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어서, 우리의 참된 민족사를 알리려 하는 역사연구가(소위 '재야사학가)들을 무조건 '국수주의자'니, 사이비역사니 하며 아예 입조차 벙긋하지 못하게 했다고 해.


  그러나 그 잘난 식민사관의 최선두 주창자로서 한국역사계의 태두라고까지 칭송받던 이병도라는 자가 노쇠로 인해 죽음을 얼마 앞 둔 때, 자신이 평생 부정해 왔던 '단군조선'을 사실로 인정하고 곧 사망했지. 한민족사 왜곡의 시작이었던 '단군조선 부정'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어. 그러자 그 수제자라는 자들과 그 수제자들의 또 수제자들이라는 손자뻘 식민사학자들까지 대거 들고 일어나서, 자기들의 스승(이병도)에 대해서 악담들을 퍼부었다고 하지.


글쎄, 이병도가 노쇠해서 헛소리를 지껄였다는 거야. 그로 인해서 수많은 논쟁이 다시 오갔지만, 그러고도 한 삼십년 동안 강단사학자들은 더욱더 식민사관을 포장하고 옹호하느라고 바빴지. 마치 식민사관을 버리면 자신들의 밥줄이 끊길지 모른다는 듯이 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비양심적 매국매족적 작태였던 거지.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어.


  옛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부터 수많은 고고학적 발굴들이 시작되어 어마어마한 유물들이 다른 곳도 아닌 우리 한민족 형제국가들의 역사현장이었던 만주와 몽골 일대에서 쏟아져 나왔다고 하지. 그건 고고학적 연대 측정과 유물들의 성격으로 볼 때 중국이 자랑하던 황하문명보다 무려 삼사천년이나 전에 존재했던 찬란한 동이족(한족이 부르던 한민족의 별칭)의 문명인 게 드러나고 만거야. 단군조선보다 더 앞섰던 문명, 중국측 기록에는 이름조차 없던 바로 그 문명, 신시시대와 그 이전 환국시대의 문명 유적이었던 거지.


  중국 고고학자들은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할 지 몰라서 처음에는 우왕좌왕하다가, 그걸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 한국에서 아무 말도 없으니까 대뜸 중국의 시원문명(始原文明)이라고 엉뚱한 이름을 갖다 붙였어. 그리고 그 지역에 있었다고 하는 단군조선도 중국 시원문명의 일부라고 하면서 자기네 역사에 갖다 붙이기 시작했어. 소위 탐원공정(探源工程)을 대대적으로 벌인 거지. 거기에다가 단군조선의 후예라는 고구려와 발해까지도 결국 중국역사의 일부라고 강변하며 동북공정(東北工程)까지 이어간 거야.


  어이없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차마 웃을 수도 없는 건 이런 황당한 사태에 대해서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이 보여준 반응이었어. 반응이랄 것도 없이 그냥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린 거야.


  이런 사태의 진전을 주시하고 있던 뜻있는 비강단사학 역사가들은 스스로 민족사와 세계사의 실체를 정립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지. 나의 할아버지도 그 중 한 명이었고, 누구보다도 열정을 가지고 동료들과 함께 역사연구모임을 만들고 새 시대를 위한 진짜 역사책을 펴 내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고 해. 그리고 10년 만에 우선 새로운 세계사의 얼개를 만들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그 다음 10년 동안 생활근거지였던 수도권을 중심으로 동료들과 함께 여러 가지 활동을 벌이셨던 거지. 그 후 만년 거취 문제로 시골로 거처를 옮기고 마을의사 생활을 하시게 된 후로는 주로 인터넷 등에서 작업을 이어가시며 유유한 만년을 보내셨다고 하지.


  이제부터 얘기해주려는 건 우리 민족의 세계사적 활동에 대해서 할아버지께서 아주 아주 요약할 대로 요약해 놓은 건데, 시간나는 대로 하나씩 알아 보도록 하자.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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