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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옛적에(27) -2. 고대(古代)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20/12/31 [20:28]

옛날옛적에(27) -2. 고대(古代)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20/12/31 [20:28]

논란이 분분한 상고사의 분야에 대해서는 단순히 그 역사적 가능성만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기록이 확실하다고 세계적으로 공인되어 온 단군조선 이후의 역사인 삼국시대 역사만 훑어 봐도 불과 1,300여년 전까지만 해도 한민족의 위세는 동아시아를 진동시키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 5호십육국 중에서도 배달민족의 큰 갈래인 선비족 계열의 국가들이 매우 강성했었음을 참고해야 할 것임. , 삼국만을 우리 민족이 활동범위에 넣어 온 경향에 대한 큰 수정을 요함 *

 

고구려의 다섯번째 임금인 모본황제때 이미 산서성 지방까지도 한민족의 활동무대였다. 그리고 그 후 수백년간의 지나지방 전란시대인 소위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에도 한민족국가(특히 고구려와 백제)들은 단군조선 이후 그 소유권이 불투명했던 중원지방에 강력한 세력기반을 재구축한 바 있다.

 

오호십육국 말기에 일어난 수당 등의 중원지방 통일국가들도 강대한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대참패를 당했던 것이다.

 

고구려를 침공했던 수나라 병력은 200여만의 대군이었고, 당나라 병력도 30여만이나 되었는데, 이러한 대공방전들은 단일 규모로는 세계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것들이었다.

 

백제는 특히 왜열도 개척에 크게 힘을 써서 열도의 역사전개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삼국 중에서 패권을 노리던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동족국가인 고구려백제멸망시키는 큰 실책을 저질렀다.

 

고구려는 얼마 후 다시 옛 터전인 만주와 연해주동부시베리아일대에서 대진국(또는 발해국’)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하여 대단히 융성했다. 고구려의 변경부족이던 거란말갈 등이 그 후에도 대요대금대청 등을 세우며 고구려의 유풍을 다수 계승해갔다.

 

이처럼 만주 일대는 완전히 한민족 국가들의 독무대였는데도 불구하고, 명나라가 잠시 남만주 해안 일대에 세력을 펼쳤을 때 여기저기 만들어 놓았던 임시 주둔지 유적들을 빌미삼아서, 현 중공 지도층들은 압록강 까지 만리장성이 연장되었다는 궤변들을 늘어 놓기도 했단다.

 

고구려 박작성이 분명한 유적을 두고 무슨 호산산성이라나 하면서...

백제는 그 근거지를 변방인 왜열도로 완전히 옮겨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그 후 왜열도의 후계자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 깊은 원한으로 응어리져 남았다. 그것은 왜구들의 잦은 준동과 임진정유왜란제국주의 일본의 조선침탈 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대진국과 신라사이에는 큰 전쟁은 별로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활발한 교류가 진행되었다는 증거도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동족간 상호불가침이라는 묵계 하에 각각의 사회적 발전을 꾀하며, 최소한의 용도 내에서만 인적물적 교류가 오간 것으로 보인다.

 

대진국은 250여년간의 번영을 누리는 동안 해동성국(海東盛國:즉 발해만 동쪽의 융성하는 나라)의 명성을 누렸고, 신라는 활발한 해상무역활동으로 한 때는 황해연안일대(중원지방 동부일대 포함)에 최대의 세력을 구축했다.

 

왜열도에서도 수차례의 대내대외적인 소규모 전란을 제외하고는 후일의 도꾸가와막부 시대와 비교될 수 있을 법한 비교적 안정된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당시에 유명한 대외활동을 펼친 한민족의 영웅들은 현재의 신강성 지역을 호령하며 이슬람군의 동방침략을 막아낸 고선지장군, 산동절강강소 등의 황해연안 주요부를 장악하여 60여년간 독립적인 역사활동을 펼친 이정기 절도사의 제()나라, 그후에 역시 황해연안과 왜열도 서부지방까지의 남해영역에서 대규모해상세력을 발전시킨 장보고 등이다.

 

신라는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하여 풍요를 구가했으나 부와 권력이 점차로 편중되어가다가, 한민족사회에 일찌기 없던 극심한 빈부의 차이가 나타났다. 소위 귀족층과 지방호족층은 거대한 부를 소유한 반면에 수많은 양민들이 농토를 저당잡히고 소작인화하였다.

 

그러한 사회적 모순이 증폭되어가자 농토를 잃고 유리걸식하던 무리들은 작당하여 대규모 비적으로 돌변하기도 했으며, 그 중에서도 궁예의 후고구려(태봉)와 견훤의 후백제가 신라의 중앙정권에 정면으로 맞서는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했다.

 

* 이른바 후삼국시대라고 불리우는 이 시대는, 엄연히 고구려의 진정한 후신인 대진국의 역사적 활동을 염두에 두지 않은 용어상의 모순 때문에, 한민족의 역사의식을 혼돈상태로 몰아 갈 가능성이 없지 않았단다. 사실은 남북국시대에 이어진 4국시대라고 봐야겠지? *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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