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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는 박정희 정권이 만들어 낸 '상상력의 산물'

한국 건축문화유산의 대명사라는 경주 불국사는 어느 시대 건물일까?

아무리힘들어도 | 기사입력 2013/01/01 [00:48]

불국사는 박정희 정권이 만들어 낸 '상상력의 산물'

한국 건축문화유산의 대명사라는 경주 불국사는 어느 시대 건물일까?

아무리힘들어도 | 입력 : 2013/01/01 [00:48]
[네티즌논단=플러스코리아] 한겨레 신문에 <불국사가 통일신라 건축물? 박정희 정권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희안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제가 너무 과문하다는 자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됩니다.  불국사가 후신라(박정권때 통일신라로 부름) 시대의 건축물이 아니라니, 경천동지할 일이 터졌습니다.
 
하기사 아무것도 모르고 철조차 들지 않았던 70년대 초반에 수학여행이랍시고 다녀온 뒤로는 불국사를 가본 적이 없으니, 불국사 건축양식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못하였고,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도 이 문제를 지적했는지,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에서 사라졌는지 아리송하니.. 도무지 생각조차 못했던 일입니다.
 
위 현재의 만원권과 아래는 시쇄권 지폐. 최초의 만원권 지폐 도안은 (앞면)석굴암, (뒷면)불국사 였다. 아래 사진은 최초의 만원권 지폐 (1차 만원권)의 도안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 석굴암 만원권의 지폐는 1972년 4 월4 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까지 났었던 지폐로 알려져 있다.
당시엔 신권 화폐가 제조되면 대통령의 재가가 꼭 필요해 박대통령이 직접 시쇄권(시험적 생산지폐 샘플)에다가 친필 싸인으로 재가를 했었다고 전해진다. © 편집부

  

광복 이후의 대형 문화재 복원사업으로 '불국사'를 선정하였다는 한겨례의 지적은 좀 더 고찰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를 연구해보면, 상대적으로 소수인 정복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피정복민들을 자신들에게 순치시키고 영구적으로 복속시키기 위해, 은근히 전략적으로 신경을 기울이는 분야가 바로 건축입니다.
 
1066년 윌리엄이 노르만족 기사들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정복한 뒤에 잉글랜드 통치를 영속화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도 '건축'입니다. 그 이전까지 몇 백년을 잉글랜드 땅에서 살던 앵글로색슨 6왕국의 교회건축은 일반 주민들의 생활주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민들은 자신의 집과 별로 다르지 않은 교회를 부담없이 들락거렸습니다. 하지만 노르만 기사들은 어마어마한 고딕건축술을 도입하여, 소위 '대형교회'를 건축합니다. 그러므로 11세기 말부터 잉글랜드에는 같은 로마 카톨릭 교회일지라도 지배자들의 종교와 피지배자들의 종교로 사실상 계급이 나뉩니다. 그리고 마치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처음부터 하나님이 명백하게 운명지운 것처럼 인식하게 만듭니다.
 
일제가 경복궁 앞에 보란듯이 '중앙청'이란 건물을 웅장하게 지은 것도 동일한 이유입니다.

▲ 그러나 기독계 단체에서 특정종교(석굴암은 불교를 상징)를 우상화 할 수 있다는 격렬한 반론을 제기하여 결국 전면에는 세종대왕상을 뒷면에는 경복궁 근정전을 디자인으로 수정되었다. 이미지의 지폐 원본은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서울과 대전) 2곳에만 전시되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득한 석굴암 만원의 시쇄권은 2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박정희가 불교를 우상화하기 보다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독재자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 편집부

이에 반해 불교는 한국에 '인도, 중국의 독특한 불교건축물'을 거의 가지고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당시에, 관청건물을 내주어 중국 불교가 시작되도록 하였습니다. 중국의 관청 건물에 불교 장식을 입힌 것입니다. 한국에 전래될 때에도 한국 교회의 토착건물 특히, 궁궐 건축양식에 불교색깔만 입힌 것이 한국의 사찰건축입니다.
 
반면에, 한국 개신교는 거의 19세기 후반 미국 기독교입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가 그렇고 심지어 루터교도 독일이 아닌 미국 루터교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19세기 후반, 미국의 교회건축양식을 그대로 들여왔습니다. 그렇다고 19세기 미국의 건축양식이 무슨 고상한 철학이나 사상을 주변환경과 혼합하고 녹여서, 발전시킨 것도 아닙니다. 대체로 17세기에서 19세기 전반부의 유럽의 가난한 이주자들이 본래 고향의 소박한 건축을 들여다가, 서부 개척시대에 임시적이고 간단한 건축방식으로 발전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요 근래에 자연친화적 건축, 목조주택 건축이랍시고 아무나 망치들고 톱들고 지을 수 있는 건축이 대개 미국식인데, 무슨 허리케인이 불면 집이 성냥개비로 지은 것마냥 쪼가리들이 바람에 날리는 것이 그들 서부개척시대에 형성된 미국식 건축양식입니다. 그런 천박한 건축양식을 한국 땅에 들여와 뒤집어씌운 것이 선교사들입니다.
 
그것은 천박하고 불쌍한 한국인 영혼들을 위한, 희생정신이라는 우월감으로 이 땅에 뛰어들어, 조금이라도 서구문명의 맛을 보여주고 싶다는 발상을 아무리 순진하게 봐줘도, 그 깊은 내면에는 제국주의적 심성과 전략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골 지역에서 유교적 문화가 강해서 한국식의 교회들이 존재한 적이 있었지만 한국적 교회건축 양식이 자리잡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이 자체만을 놓고보더라도 한국에 진출한 개신교의 정체성은 순수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즉,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대 역할을 하였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것은 선교사 개인들의 영혼을 향한 사랑, 한국에 대한 순수한 애착과는 별개입니다.
 
즉, 토착문화 위에 지배문화를 존재케 해서, 지배/피지배의 프레임을 영원히 의식구조에 새겨놓기 위한 유/무형적 장치가 '건축'입니다. '집'은 매일 수시로 드나드는 장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이용자들에게 어떤 정신세계를 형성하게 하고, 주입하는 매우 중요한 장치입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뒤에, 자신과 자신이 속한 그룹의 통치를 영속화하기 위해, 각종 사업을 벌였는데, 그  중심에 건축문화재의 복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축문화재 복원사업을 '불국사'로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박 정권의 5개년 경제개발이 어느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가를 살피면서, 아래 기사를 읽어보시면, 오늘날 영남패권, 지역 갈등구조에서 경상도가 항상 승자가 되는 것은 치밀한 전략적 구상의 산물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일제의 분할통치 수법의 연장이라는 점에도 생각이 미칠 것입니다.
/이상, 시사평론 정론직필의 아무리힘들어도 네티즌 글

▲ 불국사 경내를 시찰하는 고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그러나 육영수 여사는 한달 전인 8월 15일 총탄을 맞고 운명을 달리했는데, 이 사진은 9월 11일로 표기해 놓았다. 누가 가필한 것으로 추정된다.      © 편집부

30일 한겨레신문은 <불국사가 통일신라 건축물? 박정희 정권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이 신문에 따르면 , ▲ ‘복원공사 전말’ 자료 첫공개 ▲ 터 외엔 신라양식 확인근거 전무 ▲ 정치적 의도에 따라 자의적 포장 ▲ 고려·조선 건축양식 뒤섞어 복원 ▲ 비용은 삼성·현대 등서 ‘강제시주’ ▲유신시대 저돌적 문화정책의 그늘 이라며 아래와 같이 보도하고 있다.  

한국 건축문화유산의 대명사라는 경주 불국사는 어느 시대 건물일까?

일반인이라면 열에 아홉은 통일신라(후신라. 이후 후신라) 건축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불국사의 대웅전·무설전·비로전·관음전 등을 비롯한 주요 전각과 회랑은 고려·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뒤섞은 다포·주심포식 기둥에, 맞배·사모지붕 건축물들이다. 터는 후신라 것이지만, 건물은 1970~73년 절을 복원할 당시 장인들이 상상력을 발휘해 양식을 짜내어 지었다. 그러니까 지금 불국사는 대부분 고증되지 않은 근현대 건축의 산물이다. 그 이면엔 당시 박정희 정권이 민족 정기 회복을 앞세워 벌인 저돌적인 문화유산 정책의 그늘이 있다. 
 
서울 한양대 박물관에 차려진 ‘한국건축문화재 복원과 창조의 경계(境界·警戒)’전(새해 2월23일까지)은 70년대 불국사 복원 비사를 통해 당시 권력과 건축문화유산의 미묘한 관계를 전해준다. 1968년 대통령의 경북 순시 당시 청와대가 적극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시작된 불국사 복원공사의 숨은 건축유산 복원의 정치·사회적 의미망이 바로 이 전시가 말하려는 고갱이다. 
 
불국사 복원은 해방 뒤 국가가 주도한 첫 대형 복원사업이었고, 후대 문화재 복원 수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2층 1부 전시장엔 이와 관련해 40년 전 복원공사의 기록인 일간·월간 공사일지와 사찰 복원 청사진, 정부 공문서와 여러 전각들 공사 장면, 박정희·육영수 대통령 부부의 시찰 장면 등을 담은 낯선 사진들이 모자이크처럼 진열되어 있다. 70년대 복원공사 현장감독이던 유문용씨가 이 대학의 한동수 건축학과 교수에게 일괄 기증해 처음 공개하는 것들이다.
 
▲ 1969년 5월 경주종합개발계획의 하나로 추진된 불국사 복원은 해방 뒤 처음 벌어진 대규모 문화재 복원 사업이었다. 복원 공사 당시 건물 평면도. 한양대 박물관 제공     © 편집부

가장 궁금한 대목은 왜 건축물 고증이 거의 전무했을까 하는 부분일 것이다. 2층 전시장 한쪽에는 당시 공사책임자였던 김정기·김동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등과 4월 진행한 구술 간담회 내용을 바탕으로 한 일문일답 패널이 붙어 있다. 여러 차례 고증·설계 관련 회의를 열었으나, 터 외에는 신라 건축양식을 확인할 근거 자료가 전무했으며, 결국 기존 사찰의 경관 등을 고려해 고려 중기부터 조선 중기 양식까지 건축양식을 뒤섞을 수밖에 없었다는 해명들이 보인다. 당시 기술력이나 학계의 연구수준 등을 고려하면 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가공의 건축물을 당시 정권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후신라 건축물처럼 포장했다는 후대 학계의 비판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만약 다시 짓는다면 부재·설계 등이 크게 바뀌었을 것”이란 김정기 전 소장의 회고에는 자괴감이 비친다. 청운교·백운교 앞마당에 있었던 신라의 옛 연못 구품연지가 당시 공사 전 발굴에서 확인됐지만, 수학여행단 등 관객들 동선을 방해한다는 등의 이유로 묻어버렸다는 관계자들의 회고 또한 그러하다. 삼성·현대 등 대기업 사주들을 불러 시주금 형식으로 거액을 강제로 거둔 뒤, 공사 비용으로 충당한 것을 보여주는 시주금 목록과 기업 사주 설명회 공문 등에서는 당시 정치권력이 불국사 복원에 끼친 입김 또한 짐작하게 된다.
 
▲ 현재의 불국사 전경     © 편집부

문화재 복원의 사전적 의미는 ‘본디 형상대로 회복하는 것’이지만, 실제 작업 과정은 간단치 않다. 옛 공법, 옛 공구를 고증하면서 할지, 복원의 기준이나 대상은 어떻게 정해야 할지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수리(修理), 수복(修復), 이건(移建) 등으로 세분화되는 개념들 또한 창조 또는 훼손이라는 모호한 경계 사이에 놓여 있어서, 건축 장인들은 예단을 경계하며 철학적·미학적 판단을 거듭해야 하는 딜레마를 겪기 십상이다. 전시 2부는 이런 맥락에서 학계에서 논의중인 건축유산 복원의 여러 개념들을 소개하고 수원 화성·행궁, 충남 부여 백제문화단지, 수덕사, 숭례문 등의 복원 사례가 남긴 성과와 한계 등을 관련 부재와 패널 설명 등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복원된 건축문화유산들을 소재로 한 엽서, 사진, 안내서, 우표, 기념품 등을 전시한 3부도 건축유산이 관광자원으로 변질되거나 오독되는 사례들을 조명했다. 눈에 쏙쏙 잡히는 전시 구성은 아니지만, 권력과 얽힌 전통 건축 복원의 숨은 논란을 관객 앞에 끌어낸 이번 전시는 국내 고건축사와 대중을 소통시키는 소중한 계기를 만들어냈다.







한후예 13/01/03 [18:36] 수정 삭제  
  동해바다에 관이 있는 문무왕릉도 모르게 꺼내어 보니
신라왕조가 스키타이족이었다는 기가찰 노릇에 세상에 알리지 않고 없애버리려한 박정희매국정권이었지요?
여기에 한술 더떠 거짓으로 불국사 건축해대니 일제는 저리가라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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