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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옛적에(29) - 근세 한민족사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21/02/09 [20:16]

옛날옛적에(29) - 근세 한민족사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21/02/09 [20:16]

 

▲ 임진왜란은 왜적(서구와 왜구)들의 반란이다. 사진은 드라마 한 장면.   © 플러스코리아

 

4.. 근세

   자고로 외세에 종속된 국가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은, 극히 바람직하지 못한 외세 기생적인 타락한 반민족적 권력집단이 민족사회에 그 뿌리를 박게된다는 점이다. 그러한 현상은 외세에 종속되었던 어떤 집단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 일반적인 현상에 속하며, 그 집단의 고유한 특성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일반적인 현상의 하나로서 몽골족 창궐시기의 고려사회를 조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굴절된 사회에서는 또한 파렴치한 세도가들에 의한 부의 집중이나 토지겸병같은 독소적인 사회악적 요소들이 창궐할 수 있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또한 고려 사회에 있어서는 민족정기의 단절이라는 최악의 부정적인 요소만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몽골족의 압박을 받는 속에서도 문명사회회복을 위한 정열에 불타는 선비들의 맥은 끊이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굳게 그 명맥을 이어갔다.

 

   약 백여년에 걸쳤던 몽골족의 유라시아 지배가 몽골족 자체의 관리능력 부족으로 인하여 한계에 부딪치고, 각 지방마다 민족해방의 투쟁이 용암끓듯이 터져 나오고, 특히 중원지방에서는 백련교를 신봉한다는 홍건적의 무리들이 창궐하여 몽골족은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부패하고 무능에 빠진 몽골군이 도적떼들을 막아내는 데 힘겹게 되자 원나라는 염치불구하고 고려에 대하여 파병을 요청하게 되었는데, 최영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은 홍건적의 정예인 장사성의 병력을 궤멸시키는 등 가는 곳마다 혁혁한 공을 세우고 개선했다.

   중원지방원정으로 원나라와 홍건적의 실상을 잘 알 수 있게 된 고려의 용장들은 영명한 군주 공민왕을 중심으로 힘을 모아서 고구려의 강토를 회복하려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겨갔다. 그리하여 이성계․지용수 장군 등은 마침내 당시의 요하(서압록)까지 이르러 고려의 영토임을 선포했고, 이에 놀란 신흥세력 명나라는 만주를 모두 장악하려고 고려에 대한 협박을 자행했다. 즉, 요하중류 만곡부의 철령(鐵嶺) 이북은 명나라에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몽골의 조공협박에 대해서도 강력히 대응했던 고려인들이 그러한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는 만무한 것이었고, 대부분의 권세가들은 또 다른 이유에서 정명(征明)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 이유란 몽골의 압박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봉건적인 착취지배계급화한 대지주이기도한 권력층에 대하여 고려의 농노화한 민중적 불만이 폭발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적 불만을 정명군을 일으킴으로써 해소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의 고려민중의 피폐상은 한민족 유사이래 가장 혹심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심한 것이었다. 즉, 농민(국민)의 대부분은 자신의 토지를 가지지 못한 채, 같은 경작지에서 두 세명의 지주에게 소작료를 내는 형편이었고, 심지어는 7,8명이나 되는 지주가 군림하는 땅도 드물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많은 농민들이 유민화하여 사회불안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부의 편중에 대한 국민적 불만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만큼 폭발직전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각종 혜택을 받으면서 커온 불교사찰들이 소유한 토지와 노비의 수도 엄청났으며, 그에 따라서 거의 전국민이 노비, 농노 내지는 반농노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대로나마 농사라도 지을 수 있는 장정이 있는 집은 어떻게 해서든지 연명이라도 해 나갈 수 있었지만, 그나마 군역에 끌려나가는 날이면 남은 식구들은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고 말았던게 당시의 숨김없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규모의 정명군이 징집되자, 당장에 고려 국민들은 술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농번기에 군사가 동원된 것은 더욱 많은 물의를 불러 일으켰다. 만주출병에 나선 군사들도 사기가 크게 저하되어 있어서 대명전역(對明戰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인 지에 대하여 큰 불안요인이 되고 말았다. 정명군을 이끈 이성계 장군은 우선 고려국민의 생활을 안정시켜놓지 않는 한 어떠한 장기적인 군사작전도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반정(反正)을 시도하여 성공했으며, 이성계장군의 반정이후 고려의 권력구조는 크게 바뀌었다.

 

   그는 고려사회의 병폐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하여 불세출의 경략가인 정도전의 경륜을 대폭 받아들여서, 토지를 국유화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함으로써 봉건적인 토지소유관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성리학의 장점을 받아들여서 완전한 민본국가인 입헌군주제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으므로, 처음에는 이성계의 야심을 경계했던 사람들도 대체로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는 부단없는 개혁정책으로 국민의 생활기반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으므로, 마침내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추대를 받아서 공양왕으로부터 양위를 받은 후에 조선을 건국했다.

 

   이성계 태조의 조선건국에 대해서는 아직도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점은 이태조의 건국으로 인하여 국민들은 모두 예전에 누려볼 수 없었던(물론 고려중기 이후를 말함) 생활의 안정과 풍요를 구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며, 조선건국의 민본적인 이념은 그 후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하여 변하지 않고 이어져갔다는 점이다.

 

   그것은 또한 서양의 역사적 변천과정에서 중세봉건시대를 거쳐 해외식민지 수탈이라는 왜곡된 과정을 또 거쳐서 소위 근대시민사회로 흘러간 잘못된 사회발전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순수한 자기정화적인 노력으로써 거의 완벽한 입헌군주적 민주제('민본적 입헌군주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를 이룩할 수 있었다는, 올바른 사회발전의 예이자 인류사회에서 유일한 예를 이룩했던 점에서, 아무리 높게 평가 받아도 지나칠 것은 없다. 조선사회의 등장은 인류가 나아갈 가장 바람직한 사회적 유형의 하나를 제공했었다는 점에 있어서도 그 가치는 충분히 인정되어 마땅하다.

 

   조선사회는 인류사회에서 일찌기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청백리들을 끊임없이 배출해 낸 훌륭한 전통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도 매우 독특한 발전을 이룩했다. 가난을 긍지로 생각하고, 부정․부패를 최고의 치욕으로 알았던 훌륭한 선비들이 줄을 이어 출현하고 있었으니, 21세기 초기의 혼탁한 정상배들로서는 그 높은 기상을 올려다보기에도 어지러울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완전에 가까운 ‘철인정치(哲人政治)’ 또는 ‘지치(至治)’의 이상세계였던 것이다. 인류사회의 그 어느 민족도 해 낸 적이 없는 명실상부한 세계최고의 인류문명이기도 했다.

 

   흔히 조선사회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은 조선을 강제병탄했던 강도 일본제국주의의 악선전에 의한 것인데, 일본제국주의자들(일본국수주의자들)이 조선을 비방한 이유는 순전히 저들의 불순한 침략동기를 합리화하려는 것이었다. 저들이 비방한 주요 목록은 이른바 ‘당쟁(당파싸움)’․‘사대주의’․‘독재적 절대왕권’ 등인데, 많은 연구가들의 종합적인 견해에 의하면 조선사회가 절대왕권사회라는 것은 무식의 소치이며, 거기에다가 20세기에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유물론의 영향을 받아서 널리 전파되었던 ‘봉건사회’라는 용어는 그 자체가 조선사회에 어울리지도 맞지도 않는 허구의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도 이제는 잘 알려져 있는 상식에 속한다.

 

   또한 어느 사회이건 민주적인 언론을 보장해 가는 과정에서 여러 정파가 나뉘어져서 여러가지 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현대사회에서도 오히려 발전된 민주적 언론제도로 볼 수 있는데, 아닌게 아니라 다른 인류사회에서는 절대적인 왕권이나 독재적 봉건사회의 틀 속에서 언론이라는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던 당시에 이미 언론의 자유를 활성화했다는 사실은 자랑이 될 수 있을지언정, 덜 떨어진 족속들로부터 비난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당적인 견해가 극단적으로 흘러서 네차례에 걸친 사화(士禍)를 초래했던 것은 역시 다소 지나쳤다고 볼 수 있을런지 몰라도, 조선조 500여년을 통하여 치열한 정당대립(소위‘당쟁’)이 있었던 기간은 불과 60여년에 불과하며, 조선후기에 탕평책이 실시된 이후로는 정당을 초월한 고른 인재들의 등용으로 인하여 오히려 정당정치가 더욱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해 갔는데, 정작 조선의 쇠약을 초래한 것은 그러한 발전된 정당정치가 일부 세도가들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훼손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몰락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자정(自淨)작용이 풍부했던 조선사회를 자신의 침략적 야욕의 제물로 삼아서 식민지로 만들어버렸던 제국주의일본, 즉 왜구들의 철면피한 야만적 침략에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기본 인식을 가지고서 조선사회의 역사발전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면, 조선에 사대주의라는 것이 있었다는 논리도 전연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조선에 ‘사대’는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사대교린’이라는 정책적 현상으로 나타났는데, 사대교린이란 국제적인 힘의 질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러한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한에서 태평성대의 평화적 이상세계를 건설,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던 것이다. 즉, 국력이 성대한 큰 이웃이었던 명나라에 대해서는 그 국력을 인정해 주고, 세력이 비슷한 이웃인 여진과 일본열도에 대해서는 선량한 이웃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국제적 충돌의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초기에는 정도전 등 자주적인 사상가들에 의하여 크게 국학진흥의 기풍이 일어났다. 정도전 등은 우선적으로 민생을 안정시킨 후에 만주회복의 웅도를 구현하려 했는데, 이성계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은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대경략가를 암살해버림으로써 스스로의 명분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고, 그에 따라서 명나라 및 북원과 대등한 강국을 이룩하려던 정도전과 이성계의 꿈은 수포로 돌아간 채, 명나라의 동아시아에서의 발언권을 강화시켜주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만주에 있어서 완전한 영토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남만주의 서남쪽 일부(해안지대와 요하를 따라서) 만을 장악하는 선에서 만주에 대해서는 조선 및 여진과 함께 거의 공동관리를 하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의 후예이기도 한 여진인들은 조선에 더욱 시종일관 친밀감을 느끼고 조공에도 기꺼이 응해왔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임금들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서는 대체로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거의 유례가 없을 정도로 우수한 학자들이었으며, 훌륭한 자질을 지닌 인격자들이었다. 황실의 사치라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으며, 임금 스스로 검소와 학문적 자세의 모범을 보이려고 시종일관 노력하는 사회에서 그 숱한 청백리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다만 어느 인류사회에서나 있기 마련인 간사한 무리들도 없지는 않았기에 조선도 소위 ‘중쇄기’라는 것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중쇄기의 시초는 조선초기의 가장 태평스러운 치세였던 세종임금 시절에 싹트고 말았다. 그것은 이른바 ‘훈구파’로 불리우는 개국공신의 일부집단이 토지를 사유화함으로써 불길한 막이 올랐는데, 그에 더하여 영세한 농민들이 세력가들에게 토지를 매도함으로써 토지의 집중및 소작농의 증가현상이 병행되면서 나타났다.

 

   연산조를 거치면서 발호하기 시작한 간사스러운 무리들은 이러한 퇴폐적 증상에 더욱 불을 붙이는 꼴이 되었는데, 그에 따라 농토를 잃고 유랑하는 농민들이 늘어나고 일부는 도적이나 산적이 되는 등, 사회불안이 심해졌다. 명종년대에 이르러서는 임꺽정같은 대규모 유랑민집단의 수령이 생기는 등 더욱 혼란이 심해졌다. 그리고 그 다음 임금인 선조대에 가서는 일본열도의 왜구들마저 조선을 집어먹으려고 총공격을 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대체로 일본열도와 조선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비극은 항상 다음과 같은 상관관계 하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한민족은(특히 조선인은) 바다건너 섬구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간에 별다른 관심이나 영토적 야욕같은 것을 결코 품어본 적도 없는 반면에, 왜구들은 항상 한반도나 대륙쪽에 대한 침략야욕을 잃지 않고 그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려왔다는 점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역사적으로 일본열도 내에서 무슨 정변이 일어나건 간에 조선인들은 한번도 원정을 시도한 적이 없는 반면에, 조선사회에 약점이 노출되기만 하면 어김없이 조선을 노략질해 온 왜구들의 성향에서 증명이 되는 것이다.

 

   왜구들의 노략질 즉,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조선 사회에 심각한 피해를 초래했다. 거의 전 국토(전라도를 제외하고)가 전쟁통에 황폐화되었고, 민심은 흉해졌으며, 그 후 이삼백여년이 지나도록 그 모든 파괴는 결코 복구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왜란과 때를 같이 하여 발생한 여진국의 강성은 동아시아의 정세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고구려의 후예인 여진을 중흥시킨 영웅은 누루하치였는데, 그는 결코 조선과 다투려 하지 않았던 반면에 명나라와는 생사를 건 대투쟁을 감행했다. 이미 내부적으로 썩을대로 썩어있던 명나라는 신흥의 여진국, 즉 후금(後金)에 대하여 국력을 기울인 토벌전을 감행했으나, 후금은 오히려 그러한 명나라를 산해관 이남으로 쫒아 버리고 만주와 몽골지방과 장성이북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리고 그에 그치지 않고, 명나라가 여러군벌들로 인하여 혼란에 빠지고 명나라의 마지막 왕인 희종이 자살하는 난국을 이용하여, 마침내 산해관을 넘어서 중원지방마저 평정하여 신시 이래의 대통일을 배달환웅의 후예들이 완성하게 되었다.

 

   다만 후금의 2대 황제인 청태종은 명나라와 우호관계에 있던 조선의 후방공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조선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켜줄 것을 요구했으나, 왜란때 원조해준 우호국을 도와야 한다는 명분론이 우세하던 조선조정에서 애매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으므로, 우선 조선에 출병하여 항복을 받아놓고 나서야 산해관을 마음놓고 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는 끝까지 조선을 우호국으로 대했을 뿐, 조선에 대하여 자극을 줄지도 모를 불필요한 간섭을 결코 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를 취했다. 그리하여 청나라는 중앙아시아의 여러 회교국들까지 통일하면서도 조선만은 독립국으로 존속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청태조 누루하치 이래로 여진과 조선을 같은 형제국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필연적이고도 대인적(大人的)인 태도의 결과였다. 왜란에 의한 피해는 필설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심했던 반면에 청나라의 침공에 의한 피해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구들이 무고한 양민들까지도 무참하게 도륙하거나, 왜구들을 만나는 사람마다 그 귀나 코를 왜구들에 의하여 잘려버렸던 데 비하여, 정의를 표방한 청나라군사는 그들에게 대항하여 전투를 벌린 군사나 의병들과의 정상적인 전투행위 이상은 절대로 하려 하지 않았다.

 

   여하튼 수차례의 전란이 폭풍처럼 조선사회를 휩쓸고 지나가자, 조선인들은 크게 각성하게 되었다. 특히 선비들은 그처럼 혹독한 전란을 당한 원인을 상세히 분석하여 다시는 그와 같은 참화를 겪지 않기 위하여 분골쇄신했다. 그러한 정열적인 노력의 결과는 ’실학’의 중창으로 나타났다. 실학은 원래 조선건국 당시의 정도전등 개혁파에 의하여 민중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하여 제창된 경세제민의 방법으로서, 성리학 자체도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도입이 시도되었던 것이었으나, 중쇄기를 거치면서 그러한 실천적 학문이 학문을 위한 학문으로 흘러버려서 본래의 의미를 찾기가 어렵게 되어버렸던 것이었다.

 

   그리고 여진인들을 야만인으로만 알고 있었던 친명적인 사대부들도 중원을 장악한 청나라의 지배자들이 매우 바람직한 이상사회를 건설해 가는 것을 보고서는, 청나라의 학문인 실증위주의 고증학이나 실용적인 여러 기술방면에도 다대한 관심을 기울임으로서 실학은 다시 크게 융성하였다. 거기에다가 영조․정조 등의 뛰어난 임금들이 바른 정사를 베풀면서 태평성세가 다시 도래하였고 조선은 바야흐로 대중흥을 맞이하고 있었으나, 정조이후 나타난 세도가들의 득세는 일시적으로 조선사회를 바람직하지 못한 독재적이고도 족벌적인 사회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폐단도 궁극적으로는 한민족이 역사상에서 끊임없이 발휘해 온 탁월한 능력으로 다시 정화되어 바른 문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아구대륙의 서쪽 끝에서부터 지구를 반 바퀴를 돌아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최신의 무기에 의한 식민지확보 욕심에 달아오른 서양오랑캐들의 총공세였던 것이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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