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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옛적에(30)-조선통신사와 아편전쟁

최근세사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21/02/25 [12:00]

옛날옛적에(30)-조선통신사와 아편전쟁

최근세사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21/02/25 [12:00]

 



  왜구떼의 발악적인 침략에 대하여 조선은 그 후 어떠한 태도를 취했던가?

 

   일반적인 세계사적 상식으로 말하자면 조선인들은 절치부심하며 섬에 대한 총공격을 시도하여 복수할 것을 꾀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그러한 하책(下策)은 군자의 나라인 조선이 결코 취할 수 없는 바였다. 그대신 조선의 군자들은 섬구석의 철모르는 야만인들에게 올바른 인간의 길을 가르쳐서 근본적으로 침략야욕자체를 소멸시켜버림으로써 선린우호의 영원한 관계를 유지하고 동아시아의 태평성세를 함께 누리고자 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는 이른바 ‘조선통신사’라는 형태로 실현되었다.

 

 

  세계 최대의 정례적 문화사절단이기도 했던 조선통신사 일행은 대마도로부터 구주북부를 거쳐서 저들의 도읍지인 강호(江戶:에도)까지 가는 동안에 곳곳에 머물면서, 그 지방마다의 유력한 지도자들이나 학자들에게 바른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들 조선 통신사 일행의 한번 여정에는 대체로 6개월 이상이나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 이유는 단순한 친선방문이 아닌 이러한 학문전수의 기능을 수행하는 대단히 중요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통신사 일행의 인기는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들로부터 글씨 하나라도 얻어가려고 일본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곤 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오고 있기도 하다. 인류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도되었던 이러한 조선인들의 노력으로 인하여 마침내 동아시아, 아니 전 아시아에는 평화가 도래하는가 - 하는 순간에 서양오랑캐들이 들이닥쳐 온 것이다.

 

   서양오랑캐들의 피해를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입은 것은 지리적인 관계로 인하여 청나라였다. 영국섬의 오랑캐들은(차후로 영구:英寇로 표기) 인도지방의 무갈왕국을 장악하게 된 후에 그곳에서 다량 재배한 아편을 팔아먹지 못해서 애를 태우다가, 그 판로를 엉뚱한 청나라에서 찾게 되었다. 이 국제마약조직 폭력배들은 청나라의 강직한 관리인 임칙서가 도광황제의 명에 따라서 영국제 아편을 모두 폐기처분해 버리자 그것을 구차한 구실거리로 삼아서 논리부재의 전쟁을 일으켰으니, 그것이 소위 아편전쟁이었다.

 

   그 날강도적인 전쟁에서 무지막지한 최첨단 파괴무기들을 앞세운 영구들은 청나라를 굴복시키고 말았고, 그에 따라서 청나라에는 영국제의 아편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동아시아의 민심은 흉흉해지고 말았다. 영구들을 비롯한 서구(西寇)들은 하나같이 선교사들을 대동하고 다니면서 복음(福音)을 전파하겠다고 허풍치고 다녔는데, 그처럼 작태에 신물이 난 동아시아의 오랜 문명인들은 그러한 엉터리 선교사들을 경계하게 되었다. 아편전쟁의 위세를 업고 선교사들이 더욱 많이 동아시아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조선을 위하여서는 불행한 일이었다.

 

   아편전쟁의 참담한 결과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조선인들은 서양인들의 왕래를 결코 환영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저들이 퍼뜨리고 있던 복음이라는 것이 황당한 내세의 천국 따위나 주장하고 있었던 점은 선교사들에 대한 경계심을 한층 드높일 수밖에 없었다.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천당에 간다고 그처럼 떠들고 다니는 서구들이 정작하고 있는 일이란 노략질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구에 대한 민중의 불안감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져갔고, 그러한 말세적인 분위기가 일단 형성되자 이번에는 내세를 논하는 소위 ‘복음’에 관심을 가지는 무리들도 늘어만 갔다.

 

   서양인들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기독교의 교리가 이율배반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강직한 선비들은 그러한 서구와 서교의 침투를 문명사회의 자존심을 걸고서 막아내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렵고 동아시아 삼국이 굳게 뭉쳐서 해 내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린 조선인들은 더욱 선린우호에 힘을 기울였으나, 왜열도 안의 상황은 극히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조선통신사의 알찬 인간교육으로 인하여 거의 문명인에 가까와졌던 열도인들은 서구(西寇)들을 본받아서 자기들의 식민지를 만들려고 광분하는 광인집단화하고 있었던 것이니, 저들은 스승의 나라인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엉뚱한 야욕을 품고 되먹지 못한 정한론(征韓論)따위를 내세우면서 조선을 능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미 반역적인 군벌들이 판치는 난세가 되어버린 청나라로부터도 어떠한 협조도 얻어내기 힘들게 된 조선인들은 단 하나 남은 이웃이기도 했던 일본마저 조선을 배신하게 되자 절대절명의 사지(死地)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전 세계의 흉악한 침략세력이 조선을 총공격해 들어오는 위기상황이 초래되자 조선인들은 극도의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고, 서교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사상의 수립을 꾀하는 선비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경주의 최제우는 바로 그러한 사상을 정립하였으며 그 사상은 서학에 대하여 동학이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 동학은 동양의 정신적인 가치를 거의 집대성하면서도 실생활에 있어서의 실천적인 응용을 중요시한 매우 건전한 가르침이었으나, 유교이외의 어떠한 가르침도 사문난적으로 기피하던 조선조정은 이를 배격하였고, 그에 따라서 비밀결사화한 동학교도들은 탐관오리들의 학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민중의 앞장에 서서 전라도를 거점으로 하여 일대 봉기를 단행했다.

   동학도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켰던 갑오년의 농민대봉기(‘갑오농민운동’)는 한민족이 가진 유서깊은 자정작용의 일환으로서, 외세의 개입만 없었으면 조선은 충분히 새로운 생명력을 다시 얻어서 재중창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문제는 국제문제가 그렇게 편하게 돌아가지 않은 데 있었고, 훌륭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봉기의 시기가 적절치 못했던 것도 큰 결함이었다. 조선내부의 반정운동을 빌미 삼아서 청나라와 일본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말았으며, 그 전쟁마당이 된 것도, 그 피해를 가장 많이 보게된 것도 다름 아닌 조선국토와 조선인들이었던 것이다.

 

   청일 양국군이 조선땅에 진주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조정과의 합의하에 농민군은 일단 해산하여 외국군의 출병명분을 없애 버리고자 했다. 그러나 그 후 왜구들이 궁성을 장악하고 저들 구미에 맞게 모든 제도를 한꺼번에 변혁시키려고 소위 갑오경장을 통해서 심한 내정간섭을 강요하자 농민들은 왜구세력을 축출하려고 재봉기했다. 무기와 물자보급 등 모든 면에서 열악한 조건하에서 구국투쟁에 나섰던 농민군은 왜구들에 의하여 극도로 잔인하게 진압되었고,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제국주의일본의 조선에 대한 간섭은 완전히 노골적으로 자행되었다.

 

   왜구의 침략을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후원국으로 여겨진 러시아와의 유대강화를 추진하던 명성황후가 궁성에 침입한 왜구들에 의하여 처참하게 학살당하는 비운을 겪은 고종은 일시적으로 러시아공사관에 피난하는 등 갖은 우여곡절 끝에 조선의 정통성을 그대로 이은 대한제국을 세웠다. 그리하여 광무개혁 등 부국강병 정책을 정력적으로 실시해 갔으나, 한민족의 강대국 건설을 방관할 리 없는 왜구들은 노일전쟁을 도발하여 대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협조 가능성을 전면 봉쇄한 후 불법적인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대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함으로써 본격적인 침략정책을 굳혀 갔다. 고종을 위시하여 수많은 애국적 의병들과 밀사들은 목숨을 건 항쟁을 쉬지 않고 펼쳤으나, 국제적 무관심과 왜구들의 악랄한 탄압에 의하여 조선은 마침내 그 반만년의 유구한 정통적인 국권을 왜구들에게 잠시나마 빼앗기는 비운을 맞고 말았던 것이다.

 

   ‘암흑시대’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왜구들의 국권강점기에도 국권수복을 위한 조선인들의 투쟁은 세계사상 유례가 없는 많은 피를 흘리면서 부단히 계속되었다. 빈약한 장비와 병력에도 불구하고 광복군은 곳곳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왜구들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주기도 했으며, 상해에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국가적 정통성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대한국의 정통성을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대신에 공화주의에 입각한 ‘새나라’ 건국을 목표로 삼았던 각종 임시정부들의 성향은, 여러가지 공화주의가 난립함에 따라서 광복운동 노선에 심각한 분열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5년간에 걸친 꾸준한 항쟁이 애국자들에 의하여 수행되는 동안에 태평양에서 미국과 격돌했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하자 한민족에게는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렸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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