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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플러스코리아 김순영 대표-발행인

“'민족-역사-통일' 3대 기조로, ‘진실을 밝히는 뉴스’로, 올바로 가겠다"

이옥선 기자 | 기사입력 2013/05/01 [11:30]

인터뷰,플러스코리아 김순영 대표-발행인

“'민족-역사-통일' 3대 기조로, ‘진실을 밝히는 뉴스’로, 올바로 가겠다"

이옥선 기자 | 입력 : 2013/05/01 [11:30]
▲ 본지 발행인 및 대표이사 김순영 교수     ⓒ 이옥선 기자
[서울 플러스코리아]이옥선기자= 화창한 봄날인 4월 30일 서울 인사동에서 민족정론지 플러스코리아 대표이사 및 발행인을 맡은 김순영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 대표는 교수로 재직하면서 24개국의 언어로 시낭송을 하는 국제 시 낭송가 이기도 하다. 그런 인물이 언론에 그것도 ‘민족 역사 통일’로 기조를 둔 ‘진실을 밝히는 뉴스’인 플러스코리아에 몸담은 점은 이례적이라 하지 아닐 수 없다.

그는 첫 인상부터 남달랐다. 여성의 상징인 아름답고 온화한 자태와 후덕하면서도 센스 있는 순발력으로 인터뷰를 진행해 가는 맵시도 뛰어 났다. 여고시절부터 하이네(독일어판) 시집을 끼고 다닐 정도로 시에 대한 애착을 가졌다고 운을 뗐다. 또한 부친이 지방법원장을 지내면서 이런 그를 시 세계에 인도했다고 한다.

플러스코리아 신문사에 대해서도 그는 “저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신문은 독자 입장에서 살아왔으니 잘 모른다”면서도 “민족-역사-통일이라는 3대 기조로 ‘진실을 밝히는 뉴스’로서 올바로 가도록, 또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정립할 수 있도록 유능한 필진과 기자, 또 풀러스코리아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이 함께하는 언론으로서 모든 분들이 뜻을 모으고 힘이 되어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린다”고 답변했다.

다음은 김 대표와 인터뷰한 전문을 소개한다. 
 
▲ 인터뷰 중 잠시 쉬는 중에도 시집을 놓지 않는 김순영 대표     ⓒ 이옥선 기자

 
이옥선 기자= 언제부터 시 낭송을 하였고 시낭송을 한 계기가 있다면...
 
김순영 대표=여고시절 시가 뭔지 모르면서 감상에 젖어 하이네 시집(독일어)을 끼고 다녔어요. 아버님이 법조계에 계실 때 사택에서 자랐고, 그분은 어릴 때부터 저에게 감성을 끼워 주셨지요. 괴테의 들장미(독어, 국어)를 외운 기억은 없는데 문득 생각나서 읊어보니 정확히 맞았어요. 물론 소월, 윤동주~등 시인의 시를 읊으며 자연스럽게 시낭송을 해왔지요.
1999년 제가 사는 아파트에서 시낭송 프랭카드를 보고 신청하여 김춘수 꽃을 낭송하게 되었어요. 그후 12편의 시를 암기하여 시낭송을 하는데 강남 문협에서 시낭송 강의 요청이 있어 강의 시작하여 문협, 교사 연수, 대학, 대학원 CEO 과정, 기업체에서 시낭송 요령과 감성 리더십, 감성 이미지 강의를 하며 오늘에 이르렀지요.
 
이옥선 기자= 요즘 사람들은 감성이 메마르다고 생각하는 데, 어떻게 하면 감성적으로 낭송하기에 좋은 시를 추천해 주세요.
 
김순영 대표= 자기가 좋아하는 시를 낭송 하는게 좋겠지만 시간, 장소, 대상에 따라 적절한 시를 읊는게 효과적이지요.
어르신- 향수,그 먼나라를 아십니까, 나그네 등-서정시
어린이- 어머니, 아빠. 내 동생, 고마우신 선생님 등-동시
봄-남으로 창을 내겠소.
바닷가-그리움(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비 오는 날 -빗소리
가을 밤-별 헤는 밤
눈 오는 날 -눈은 내리네
개소식, 출판 기념행사- 해
 
변산 해수욕장 교수 연수 특강할 때 ‘그리움’시낭송하고 사진 촬영하러 나오니 파도가 밀려오는걸 보고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하며 감격하니 흐뭇하였어요.
겨울 연수원 강의 시  ‘눈은 내리네’ 시낭송 하는데 마침 하얀 눈이 내리니 강의 듣는 분들이 창밖의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감동하니 너무 감사하였지요.
출판 기념식에서 해를 낭송하고 세종 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축시 낭송하게 되었어요.
감성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옥선 기자= 참 듣기도 좋고 조국애와 민족사랑이 느껴지는 시라고 생각합니다. 기억에 남는 시 낭송 행사가 있으시다면...
 
김순영 대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3,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심포니 오케스트라 배경음악에 맞추어 시낭송을 한 것입니다.
또한 독도에 직접 가서 ‘독도 코리아 시사랑’행사를 가졌습니다. 장마 예보에도 불구하고 강행군을 하였는데, 다행히 독도 코리아 시낭송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또한 KBS 월드컵 축시낭송은 방송에서 약1000회 정도 방영 될 정도로 유명하였습니다.
특히 이복재 시인의 ‘우러러 모실 백정기 의사여’라는 시와 ‘한겨레 하나 되는 날’이란 시 낭송 행사를 가졌습니다. ‘우러러 모실 백정기 의사여’는 2012년 8월 15일 전북 정읍시에 위치한 백정기 의사 기념관에서 500여명이 참석한 정읍시 기관장과 내외 귀빈들 앞에서 낭송해 뜨거운 환대를 받았으며, 또 리복재(고유성씨를 써야 한다고 매번 강조함) 시인이 지은 ‘한겨레 하나 되는 날’은 같은 해 9월 22일 반민족행위자특별법제정 기념식이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개최되었는데, 낭송한 때가 기억에 남습니다
 
이옥선 기자= 김 순영 교수님의 시낭송 전문가 과정의 강의가 궁금해집니다. 어디에서 얼마나 하였는지요?
 
김순영 대표= 시낭송 강의횟수는 약 1000여회 됩니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시낭송 지도사 자격과정 국내최초 주임교수로 4년간 하였고, 건국대학교 미래지식 교육원 시낭송 지도사 과정 주임교수로 6년을 하였습니다. 동국대학교 시낭송 전문가과정 주임교수를 2012년까지 역임했습니다.
그 외에도 명강사협회 명강사 양성과정. 강남. 광명 문협 외 다수와 고대 교육대학원 CEO 과정. 금오공대 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 연세대 시학 학회. 순천향대 커뮤니케이션 센타, 동덕여대 공연 예술대. 동원대 미디어 창작과. GM 대우 등 다수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옥선 기자= 그럼 교수님이 시를 좋아할 때가 언제인가요?
 
김순영 대표= 여고 시절부터 시를 동경하여 시집을 끼고 다녔어요. 혼자 조용히 있을 때, 장거리 여행시 버스나 기차안, 지하철, 대자연과 접할 때 시가 저절로 나오지요.
 
이옥선 기자= 시 낭송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는요?
 
김순영 대표= 유현종(소설가) 강남문인협회 회장께서 강남 문협 강의를 요청하여서 처음 시낭송 강의(2001년4월)하였습니다. 그때 좋은 반응을 얻어 세종문화회관 축시낭송(2005년~)을 시작으로 행사, 콘서트 시낭송과 문협, 교육청 학교 기업체 등에서 계속 강의(감성리더십& 감성이미지, 시낭송 요령)를 하게 되었어요.

이옥선 기자= 24개국 원어로 시낭송을 하시고 계신데,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다면, 또 더 많은 나라 언어로 낭송할 계획이 있으신지요?
 
김순영 대표= 시낭송 &감성리더십 강의 하면서 시를 통 해 성공한 사례- 92세에 시인 등단하여 98세에 시집 ‘약해지지마’ 발간하여 백세에 백만부돌파한 일본의 시바다토요, G20 서울 정상회의 핵심 의제 조율차 유럽 5개국 순방중인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한-러 공동위원회에서 마이크 잡자 바로 러시아 대문호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낭송하여 박수 갈채를 받고 러시아의 빅토르 바사르긴 지역 개발 장관이 러시아 문학에 대한 식견에 놀랐다며 한국에 흔쾌히 협력하겠다는 뜻을 밝힌 사례 등을 소개하면서 원어 영어 국어로 암송하다보니 12개국 외국어 시낭송하게 되어 충무로 소극장에서 7개국 시낭송 콘서트하였어요.
여수 엑스포 세계 선교대회에서 17개국 외국어 시낭송하여 좋은 반응을 얻고 17개국 외국어 시낭송 도전 한국인 상도 받았지요.이제 시작입니다. 양보다 질도 중요하니 차분히 해야지요. 금년 목표는 33개국인데 쉽지 않지만 묵묵히 한 걸음씩 나가렵니다.
 
이옥선 기자= 얼마 전 민족정론지 플러스코리아 대표이사 및 발행인이 되셨는데, 계기가 있었나요?
 
김순영 대표= 제가 동국대학교에서 시낭송전문가과정을 강의하는데 리복재 시인이 2년 간 강의를 받은 저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언론계에 몸담을 의향이 있냐고 물어 오더군요.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었지요. 저는 언론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인을 10여년간 지켜봐 왔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올바르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그야말로 어려운 길을 걸어 온 사람이다‘라는 걸 잘 알고 있고, 또 순수하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차차 언론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4년전부터 저를 어머니로 모시고 싶다고 하여 지금까지 모자(母子) 지간 사이로 지내고 있는데, 언론사 대표이사 및 발행인을 맡으면, 자신이 적극 돕겠다고 하여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이옥선 기자= 리복재 전 대표이사 및 편집발행인에 대해 평가라 할까요, 덕담 한 말씀 해주세요.
 
김순영 대표= 이 시대에 보기 드문 강직한 민족주의자지요. 지금 이 나라의 세태를 보세요. 자신의 조상도 무시한 채 정치와 종교에 함몰돼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그는 우리 조상들의 역사에 대해 진실을 밝혀 올바르게 정립하려는 이 시대의 진정한 독립군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유성씨인 리복재로 쓰고 있는 걸 봐서도 알 수 있어요. 본인의 불이익을 감수하며 너무 어렵고 힘든 길을 가고 있으니 보기가 딱할 때도 있어요. 민족정론지 플러스코리아와 더불어 몇 개 신문사를 맡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 중, 모든 걸 민족정론지에 올인하고 있으면서 재정적으로나 여러 면에서 굉장히 어렵게 이끌어 오고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어서 인지 잘 극복하고 있으며, 특히 감성이 풍부해 시낭송을 할 때 제가 깜짝 놀랄 때가 많았어요. 그렇다고 아무데서나 시 낭송을 하지 않더군요. 즉 남에게 자랑하지 않는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특히 소설가로 등단했는데, 등단작품인 <대로>를 발표하고 이어 연작소설 <하늘자손> 초고를 탈고해 제게 시놉시스를 보내주어 봤는데, 기성 작가에 버금가는 작품성과 스케일이 굉장하더라구요. 어찌 보면 리복재라는 작가의 심성을 잘 알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니 좋은 결과를 기대한답니다.
 
이옥선 기자= 이제 신문사 대표로서 하실 일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신문사를 어떻게 운영할 계획이며, 발전방향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김순영 대표= 저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신문은 독자 입장에서 살아왔으니 잘 모르지요. 다만 민족-역사-통일이라는 3대 기조로 ‘진실을 밝히는 뉴스’로서 올바로 가도록, 또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정립할 수 있도록 유능한 필진과 기자, 또 풀러스코리아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이 함께하는 언론으로서 모든 분들이 뜻을 모으고 힘이 되어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은 2012년 8월 15일 백정기 의사 기념관에서 거행된 8.15광복절에서 동국대 시낭송학과 김순영 교수가 '우러러 모실 백정기 의사여'를 낭송해 참석한 500여 인사들에게 감동과 감명을 주었다는 후문이다. 그 시를 소개한다.

▲ 백정기 의사 기념관 사진     ⓒ 이옥선 기자
▲ 백의사에게 바치는 서사시 <우러러 모실 백정기 의사여>를 낭송하는 김순영 국제 시낭송가     ⓒ 이옥선 기자

<서사시>

우러러 모실 백정기 의사여

 
작: 笑山 / 李 複宰

낭송: 김순영 교수/국제 시 낭송가

 
하늘도 슬퍼하고 산도 메아리쳐

얼마나 울었을까아

억조창생億兆蒼生 배달민족 서러워

얼마나 울었을까아

원수의 담장 안에서 붉은 핏물 쏟으며

깨인 혼 빛 배인 고운님

그렇게 가시었다

 
한겨레여! 슬프다 마라

반역의 무리, 열강의 외세 물리치고자 떨쳐 일어난

삼십만 혁명군의 붉은 핏물

하늘로 높이 솟아올라

온 산하에 아낌없이 뿌려지고 백골이 진토塵土 된

민족주권, 민주의 동학혁명이 있었지 않은가

 
어찌 슬프기만 하랴

안중근으로 하여금 침략괴수 이등박문 척살하고

독립의 횃불 높이 든 3.1만세혁명

거국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우고

4.19혁명 정신으로 되살아 나

광주 5.18민주화혁명으로 활활 타오른 것은

그때, 고부古阜에서 시작된 삼십만 혁명군의 넋이

조국의 자주와 민주의 꽃으로 피어나지 않았던가

 
천년만년 이어져 온

그 이름 찬연한 한겨레 터전

‘백산’에 올라 백두대간 호령하고

‘천태산’에 올라 호연지기 키우니

이 강산 겨레의 꽃들은 미학美鶴처럼 나래펴고

녹두장군의 후예 백정기白貞基를 맞았다

 
조국의 독립 위해

자율정부 지지하고 지배권력 배격한 ‘아나키스트’

원수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흑색공포단’

침략원흉 일왕의 목줄 쥐었다 놓은 염라대왕

항일투쟁의 선봉자 백정기 의사여

  
병든 동지 구환하다 얻은 폐결핵 병마도

조국 독립과 겨레 사랑에 무릎 꿇어

군수물자 실은 일제 수송선에 폭탄 던져 파괴하고

일왕생일 기념한 ‘천장절’에 폭탄투척 결행하고

간악한 일제의 대륙침략 음모를 폭로한 ‘육삼정’ 거사

 
조국 잃은 서러움과 울분으로 통탄하며

원수의 핍박과 겨레의 한으로 지샌

서른아홉 해 눈물의 성상이라 

 
온 몸에서 뿜어져 올라 온 붉은 핏물, 고통 속에서도

조국 독립 꿈꾸던 정읍 고사부리군 떠올리고

백의의 겨레 환한 웃음 그리던

아! 구파 백정기 의사....

동학혁명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의 후예답게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강제권력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온 몸으로 실천하시었다

 
아! 님은 뜨거운 피 토하며 외치셨다

“한겨레여! 나의 구국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는 전 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평화위에

세계 일가一家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삼십억명 아시아인도 하지 못한

의로운 항거여!

구국의 절개여!

독립의 꽃이여!

 
아! 그 이름 찬연한 구파 백정기 의사여!

민족 혼, 민족의 등불이 되어

오늘의 우리에게

뛰는 심장, 성화의 불씨 지펴

촛불처럼 스스로 밝히며 타오르고

완전한 조국 독립의 기둥이요

온전한 조국 주권의 꿈이요

분단극복의 희망이요

조국의 동량이자 영걸이 되게 하시었다 

 
아! 그 이름 찬연한 구파 백정기 의사여!

하늘의 기운이 용솟음치게 하고

하늘의 뜻이 인간본성으로 물들게 하여

한겨레 하나 되는 날

한국해에서 백두산에서

서로서로 껴안아 춤을 추고 기쁨을 노래하며

우러러 모실 어른이시다

 
아! 그 이름 찬연한 구파 백정기 의사여!

천구백삼십사년 유월 오일, 오늘

우리가 선생의 이름을 부르는 까닭은

날마다 유월 오일을 기리고

날마다 유월 오일로 살기 위해서이고

조국과 민족을 위한 거룩하고 숭고하신 뜻,

우러러 공경하며 살기 위한 까닭이다


*백산(白山): 백산은 전북 부안군 백산면에 위치해 있으며 죽산(竹山)이란 애칭을 가진 산이다. 1894년 4월26일 동학혁명군이 전북 부안군 백산면에 위치한 백산성터에서 죽도(竹刀)를 가지고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든 장소로서, 혁명군이 일어서면 하얀 옷만 보인다 해서 백산(白山)이며, 혁명군이 앉으면 대나무창만 보인다 해서 죽산(竹山)이라 애칭이 붙은 것.

*영원면 천태산(天太山): 동진강 유역에 위치한 전북 정읍시 영원면 동남부에 위치한 천태산(182m)이다. 은선(隱仙)·후지(後池)·장재(長才)·앵성(鶯成)·운학(雲鶴)·풍월(豊月)·신영(新永) 등 7개 동리가 있다. 유물·유적으로 은선리3층석탑(보물 제167호)·은선리토성터(전라북도 기념물 제56호) 등이 있다. 특히 천태산 주변은 ‘백제고분군(돌방무덤)’이 많이 산재해 있어 ‘경주고분군’과 나주 ‘반남고분군’과 함께 정읍 ‘영원고분군’으로 역사 문화적 가치를 지닌 소중한 문화재가 있는 산이다.

*아나키스트(anarchist): 지금까지 아나키즘(anarchism)을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한 사람이 일본 도쿄대학 게무리야마 센이치로서 그가 어떤 의도를 가졌거나 혹은 편의적으로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한 것이 마치 정부 조직이 없는 혼란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하에서 많은 오해와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명확한 것은 아나키스트는 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자율정부를 지지하고 지배권력을 배격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BTP(BLACK TERRORIST PARTY)): 독립운동단체. 항일구국연맹 산하에 조직된 무력 투쟁 단체로 일본 제국의 요인을 암살하고 기관을 파괴하며 친일분자를 살해하는 등의 활동을 계획하여 백정기 의사의 주거지에서 결성되었으며, 대표적인 친일파 왕징웨이 척살을 도모하고 일본 영사관에 폭탄을 여러 차례 투척하였고, 1933년에는 중국 주재 일본 대사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천장절: 일본 왕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날인 ‘천장절(天長節)’로서 1932년 4월 29일 천장절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함께 병행하여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당시 백정기 의사가 먼저 폭탄투척하기로 하였으나 중국인의 변절로 실패하자, 윤봉길 의사가 이어서 폭탄투척 하여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 등을 죽이고, 총영사 무라이,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에게 중상을 입혔다.

*육삼정(六三亭):1933년3월 상하이 훙커우(虹口)에서 정현섭, 원심창, 이강훈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와 친일파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인해 거사 당일 일경에게 체포되었으며, 일본 나가사키로 끌려가 백정기 의사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 중 순국한 사건.
▲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함께 3의사 중 한 분이며, 사진은 백정기 의사의 상하이 '육삼정' 의거 직후 일제에 체포 됐을때.     ⓒ이옥선 기자
 
[백정기 의사 소개]= 백 의사는 1896년(高宗 建陽) 1월 19일 부안군 남하면 내진리(扶安郡 南下面 內振里:現 扶安郡 扶安邑)에서 아버지 백사순(白士順)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일찍 부친을 여의고 정읍 영원면으로 이사하여 주경야독으로 사서삼경은 물론 신학문에도 능통하였다.

15세가 되던해 우리나라가 강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당하면서 비록 어리지만 소년의 가슴에도 일제에 대한 울분과 이에 대한 저항 의식 및 구국일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때 영원면 갑부인 함양조씨 문중의 팔락 낭자와 결혼하게 된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향리인 정읍으로 내려와 만세시위를 선도하였고, 동지들과 서울, 인천을 오가며 일제기관의 파괴와 방화, 요인암살 등을 계획하다 일경의 추격을 받고 그해 8월 중국 봉천(奉天)에 망명하였다.

중국을 근거지로 수차례 국내를 왕래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펴다 일시 일제 경찰에 구금되었으나, 의사의 기지로 무사히 나와 1922년에 북경(北京)으로 재차 망명한다.

1924년 일본 동경에 잠입하여 은신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여 침략 원흉인 일왕 처단과 수력발전소 파괴 등을 계획하였으나 갑자기 일어난  관동대지진으로 뜻을 못이루고 북경으로 다시 돌아왔다.

북경에 온 의사는 이회영(李會榮), 신채호(申采浩) 선생등과 함께 더 적극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고자 자율정부(민주정부)를 지지하고 개인권력을 배격하기 위해 1924년 6월 재중국조선아나키스트에 가입하였다.

의사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고 조국을 독립시키기 위하여 상해 임시정부 기치하에 통일 단합하고 중국, 미국, 영국, 러시아 등과 공동투쟁하여야 된다는 연대항쟁의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조직된 이 연맹에 가담 활동하였다.

여기서 의사는 중국동지들로 조직된 남화(南華) 청년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1925년 7월의 일본, 영국 두 나라 자본가들을 상대로 유명한 상해(上海)파업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더불어 10여만의 대노동조직을 동원하여 적극 투쟁하였다. 1927년 여름 농촌의 자치자위(自治自衛)운동을 한·중·일 3국동지 합작으로 일으키게 된다.

의사는 이정규(李丁奎)와 정화암(鄭華岩) 동지와 더불어 복건성 천주시 민남 25현 민단편련처)(福建城 泉州市 民南 25縣 民團編練處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농촌계몽과 직화에 힘써 그 조직이 수천명으로 커지자 토비(土匪) 및 공비(共匪)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남경(南京)에서 동방아나키스트동맹이 조직되었는데 의사는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의사는 기관지 『동방(東方)』의 편찬위원으로 활동 중 폐결행을 앓고 있는 동지를 구환하다 폐결핵을 얻어 북경에서 잠시 요양을 하였다. 요양하는 중에도 동지들과 같이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고 또한 1930년 길림성 해림시(吉林城 海林市)로 가서 김종진(金宗鎭), 이강훈(李康勳)등과 같이 김좌진(金佐鎭), 이을규(李乙奎) 등이 조직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에 가담하여 재만한교(在滿韓僑)의 조직강화와 혁명사상 최고에 전략하는 한편 독립운동

전선을 분열시키려는 반동분자의 구축과 일제의 주구 색출에 적극 노력하였다.

1931년 9·18사변이 일어나자 의사는 북경을 거쳐 상해로 들어와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산하 단체로 남화구락부(南華俱樂部)를 두는 한편 중국인 동지들과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여 한중공동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의 실행을 위해 행동대를 편성하였는데 이른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 일명 BTP(BLACK TERRORIST PARTY)라고 불리었다.

흑색공포단은 토의 후 곧장 실력행사에 들어가 곳곳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여 방화, 파괴하였으며 특히 천진(天津)에서는 중국인과 백 의사, 이강훈, 원심창(元心昌) 등과 같이 일본의 군수물자를 싣고 들어온 일본군함 만톤급 1척을 대파시키는 대전과를 세워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었다.

1933년 의사는 상해 공동조계(共同租界)내의 육삼정(六三亨)이라는 고급일식점에서 일본 군부의 거물들이 중국의 군별들과 회합을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즉 일본 육군대신 황목정부(荒木貞夫)가 주중일본공사 유길명(有吉明)에게 미화 2천만불 상당의 거금을 주어 중국 국민정부내의 附日分子와 고급장성을 매수하여 항일유격대와 독립군을 탄압시키고자 그 회의를 1933년 3월 17일에 연다는 것이다.

연맹은 곧 회의를 소집하고 이에 참여할 대원을 뽑았는 바 의사는 강력히 요청하여 이강훈, 원심창 의사 등과 같이 3인이 육삼정에 폭탄을 던져 아수라장을 만들고 왜적을 처단한다는 계획을 만들었다.

폭탄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때 사용되었던 것과 동형으로 백범 김구(白凡 金九) 주석이 주고 간 것으로 사용하고 투척연습과 현장확인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워나갔다.

거사당일 육삼정 부근 송강춘(松江春)이라는 음식점에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중 이미 변절자에 의해 밀고되어 급히 밀어닥친 일·중 합동경찰에게 거사직전 체포되어 상해에서 취조를 받은 후 같은해 7월 5일 일본 장기(長岐)로 압송되었다.

백 의사 등은 장기지법(長岐地法)의 판결을 받았는데 백의사와 원심창 의사는 무기징역, 이강훈 의사는 15년 징역을 언도받았다. 백 의사는 1934년 6월 5일 적의 땅인 일본의 감옥에서 폐병이 악화되어 39세의 젊은 나이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 백정기 의사 직계가족     ⓒ 이옥선 기자
백산 13/05/02 [09:45] 수정 삭제  
  그렇습니다. 시가있어 낭송을 하시고 낭송이 있어서 감동이 배가가 되는 것일겁니다.
프러스 코리아의 발전과 대표님의 더 멋진 활동 기대합니다...^^
내부의 적 13/05/02 [10:19] 수정 삭제  
  반역의 무리, 열강의 외세 물리치고자 떨쳐 일어난

삼십만 혁명군의 붉은 핏물

하늘로 높이 솟아올라

온 산하에 아낌없이 뿌려지고 백골이 진토塵土 된

민족주권, 민주의 동학혁명이 있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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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군대를 동원하여 동학농민들의 봉기를 살륙 진압한 선비조선왕조와 흉노노론세력...외세보다 내부의 암덩이들이 권력을 장악하면 백성들이 얼마나 학살되고 고통당하는지를 잘 증명해 준 100년전의 역사적 교훈이다.
만정 13/05/04 [08:57] 수정 삭제  
  앞으로 자주 뵙고 많은 가름침을 받고자합니다
제가 원래 시낭송같은것을 듣기만 좋아하는사람입니다
저도 한때는 글을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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