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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단재 신채호 선생 재조명.

근대 가장 뛰어난 역사학자 및 행동주의 항일투쟁가

강욱규 기자 | 기사입력 2013/05/31 [12:57]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단재 신채호 선생 재조명.

근대 가장 뛰어난 역사학자 및 행동주의 항일투쟁가

강욱규 기자 | 입력 : 2013/05/31 [12:57]
 
[플러스코리아] 강욱규 기자= 단재 선생만큼 독학으로 학습하여 근대사학의 기초를 마련한 분도 드물며, 또 역사학자가 항일무장투쟁의 전면에서 행동으로 기개를 보여준 분도 드물다는 생각이다.
 
어릴적 한자공부에 능해 신동소리를 들은 선생은 호도 많고, 가명이 많을만큼 항일투쟁의 전면에서 행동한 민족주의 사학자이자 무장항일운동가였다.
 
올바른 역사의식에서 애국애족정신이 발현된다 하였고, 많은 논문을 기고하신 언론인이기도 하다.
 
국치 이후 만주에서 임정에 참여하였으나 이승만의 국제연합신탁통치 찬성에 반대하였고 몸소 이승만의 임정 퇴출에 앞장선 관계로 그분의 둘째 아들은 이승만정권 수립이후 숨어 지내며 목숨을 연명해야 했다.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무정부주의를 지향하신 선생은 무장운동의 자금을 마련하고자 위폐를 만들다가 체포되어 재판장의 마지막 할 말 물음에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일에는 어떠한 수단도 가능하다는 취지의 명언을 남겼으며, 10년형을 언도받고 독방복역중 병세가 심해 금전을 납부하고 가석방을 해주겠다는 일제의 말과 부유한 친척이 자금을 대려 하였으나 친일파가 주는 돈은 받을 수 없다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수감중 나라의 독립을 끝내 보지 못하고 옥사하셨다.
 
일제의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선생 사후에도 무국적자로 남았다가 독립운동가에 대한 취적 등의 법률로 사후에서나마 한국국민이 되었다.
 
건국후 건국훈장이 선생께 추서되었다.
 
그분이 기고하신 글을 바탕으로 조선상고사 등이 편찬되었고 을지문덕장군전 최영장군전 이순신장군전등 위인전기도 남겼다.
 
역사를 아와 비아의 싸움이라 정의하였고 묘청의 의거를 이천년래 제일의 사건이라 하였으며, 묘청을 진취적 기상의 승려로 높이 평가하셨으며, 의거를 토벌하고 김부식이 남긴 삼국사기를 통렬히 비판하셨다.
 
교분의 지인에게 1년 동안 배운 영어실력으로 영문서적의 독해도 가능할 만큼 영특하신 분으로 필자가 이런 훌륭하신 분을 평하는 것이 옳지 않다 하겠으나, 미력하나마 선생의 평을 곁들이자면 말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에서 스스로 연구하신 민족주의 사학의 근대 가장 뛰어난 분이셨고,  그 역사의식에서의 애국애족의 정신을 항일투쟁으로 몸소 실천하신 드문 근대의 국가적항일운동 인재 분이라고 모시고 싶다.
 
그분께 훈장이 추서됨은 지극히 당연하나, 천안함 사건의 논란과는 상관없이 전투에 패한 군인에게 무공훈장 중 등급이 높은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되었음은 참으로 해괴하고 불순한 의도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시(詩)와 칼럼 등으로 올바르고, 따뜻하고 바른 사회로 바꾸기 위해 분골쇄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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