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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극-윤치호··· 묻혀 '독립지사' 서훈도 못받은 '김가진'은 누구?

대한제국 최고대신 김가진, 아직도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해

오주르디 칼럼 | 기사입력 2014/06/18 [20:41]

문창극-윤치호··· 묻혀 '독립지사' 서훈도 못받은 '김가진'은 누구?

대한제국 최고대신 김가진, 아직도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해

오주르디 칼럼 | 입력 : 2014/06/18 [20:41]



[민족/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오주르디] 일제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발언으로 일본극우들과 일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는 대한민국 국무총리 후보자 문창극. 그가 존경하는 인물로 친일인사의 대표 격인 윤치호를 꼽았다. 친일의 대가로 얻게 된 부귀를 밑천삼아 해방 이후에도 승승장구해 최고의 ‘명문가’가 된 해평 윤씨 가문을 흠모한단다.  

윤치호 가문, 친일의 대가로 얻은 부와 명예, 세도 대물림 

윤치호 집안의 친일 전력은 매우 화려하다. 아버지 윤웅렬은 조선말 군부대신과 법무대신을 지낸 뒤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장남이 중추원 고문을 지낸 윤치호이고, 차남은 영국으로 유학을 가 의사가 된 뒤 세브란스 병원장을 역임한 윤치왕이며, 3남은 미국 시카고대를 나와 초대 주영공사를 지낸 윤지창이다.  

일제 때 거머쥔 재력과 인맥은 대물림됐고 자손들은 이 덕을 톡톡히 봤다. 윤치호의 장남 윤영선은 이승만 정권 때 농림장관을, 손자는 교통부 고위관리를 지냈으며 증손녀 윤순명은 또 다른 ‘친일명문가’인 조선일보 방상훈 회장과 결혼했다.  

윤치호의 작은아버지 윤영렬은 육군참장 출신이다. 그의 네 아들의 이름이 친일인면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집안 전체가 친일정신으로 무장돼 있었다. 장남 윤치오와 차남 윤치소는 각각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와 참의를 지냈다. 윤치오의 장남 윤일선은 서울대 총장을 역임했으며, 차남은 일제 만주국 간도성 차장이었다.

 

대표적 민족반역자요 일제부역자들, 한국사회 최고 지배층으로 

둘째 아들 윤치소의 장남이 대한민국 두 번째 대통령인 윤보선이다. 3남 윤치성은 일본 육사를 나온 군장교 출신이었으며, 6남 윤치영은 일제 말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으로 일제에 충성하다가 해방 된 이후 서울시장과 공화당 의장, 국회 부의장 등 출세의 길을 달렸다.  

일제에 충성한 대가로 얻은 부귀와 인맥을 활용해 일본과 유럽,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엘리트 대접을 받으며 한국사회의 지배층으로 입지를 굳힌 것이다. 해방 전에는 일제에 빌붙어 입신양명을 꾀하다가, 해방 후에는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에 충성하며 출세를 도모했다.

 

윤치호 부자가 친일로 부를 축적하며 세도를 부릴 무렵, 동시대를 살았지만 윤치호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 사람이 있다. 대한제국의 고위 대신이었던 김가진 선생이 바로 그다. 독립협회 창설 등 애국계몽운동에 매진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한일합방은 친일용어) 직전 대한협회회장을 맡아 일제에 충성하는 일진회와 맞선 인물이다.  

윤치호와 동시대를 살았던 김가진, 길은 완전히 달랐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조선민족대동단의 총재가 돼 독립투쟁에 앞장선다. 아들, 며느리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해로 망명을 해 임시정부 및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고문이 된다. 대한제국 대신으로서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해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김가진 선생이 유일하다.  

그의 망명은 상해 임시정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대한제국의 최고 대신이 모든 것을 내던지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망명했다는 소식은 현지 교민사회 뿐 아니라 중국과 영국 등 여러 나라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독립운동가이지 언론인인 우승규 선생은 이 부분을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김옹(김가진)이 상해에 도착하자 임시정부나 한인사회에서는 환영이 대단했다...그의 망명 사실은 상해 영자지 ‘차이나프레스’를 비롯해 ‘신문보’ ‘신보’ 등에 대대적으로 보도됐으며 중국의 정치가도 경의를 표하러 (김가진 선생을) 예방한 것을 봤다.”



당시 ‘동아일보’도 김 선생의 망명 소식을 기사로 다루며 “한일합병 당시 귀족 작위를 받은 사람 가운데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김윤식, 이용직 등 2명 있었지만 해외에 나가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을 벌인 이는 오직 동농(김가진의 아호) 한 사람뿐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독립운동 위해 상해 임정으로 망명한 유일한 대한제국 대신 

김가진 선생이 상해에 도착했을 때 나이는 74세. 도착하자마자 고종황제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망명시키려다 실패하고 만다. 도착 2년 후인 1921년에는 무장투쟁을 지지하며 북로군정서의 고문이 돼 만주행을 계획한다. 하지만 건강 악화가 길을 막았다. 1922년 7월 4일 상해에서 임종을 맞는다. 상해 시자후이 만국공묘에 안장됐다.  

동농 선생의 아들(김의한)과 며느리(정정화)도 함께 상해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며느리 정정화는 시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사실상 굶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회고했다.  

김 선생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조국의 독립에 몸을 바친다. 3남 김의한은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라는 중책을 맡았으며, 그의 처 정정화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여섯 번이나 국내에 잠입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4남 김용한은 의열단 김상옥 열사와 함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에 가담해 모진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떴다. 김용한의 아들 김석동은 큰 아버지가 있는 상해로 건너가 최연소 광복군으로 활동했다.



<김가진 선생 말년 모습 / 상해로 함께 망명해 독립운동을 한 그의 장남 김의한-정정화 부부.>

김가진 선생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아직도 상해에 있다. 애당초 묻혔던 만국공묘가 중국정부에 의해 새롭게 조성돼 정부가 나서 외교적 교섭을 벌이지 않는 이상 유해를 모셔올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가진 선생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한 연유로 이런 절차를 밟을 수 없는 실정이다.  

정권에 미운털...독립유공자 서훈도 받지 못해 

왜 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을까. 1994년 손자 김자동씨가 국가보훈처에 서훈신청서를 냈지만 거절당했다. 김씨는 “정통성이 없는 박정희 정권에 독립유공사 심사를 맡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 신청하지 않다가 문민정부 들어서자 신청서를 냈지만 돌아온 답은 ‘서훈 대상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이유는 한일합방 당시 김가진 선생이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는 것. 하지만 작위는 일제가 조선의 지배층을 회유하기 위해 대한제국 고위관리 전원에게 내린 것에 불과했다. 김 선생은 작위를 받은 직후부터 상해로 가기 전까지 대외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다. 한국인명사전과 국사대사전, 우리민족문회대백과사전 등에는 “김가진 선생이 작위를 거절했다”거나 “작위를 받은 직후 반납했다” 혹은 “작위를 받지 않았다”고 기술돼 있다.  

서훈을 내리지 않은 진짜 이유가 있단다. 김자동씨는 그 이유로 “후손들이 복지부 서훈심사 문제점을 끊임없이 제기했으며, 또 반정부 활동을 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털어 놓았다. 실제로 김씨는 60년대 반정부 진보신문인 ‘민족일보’ 기자로 일한 바 있으며, 이후에도 통일운동에 참여하는 등 정부 쪽과는 거북한 관계였다. 또 광복군 출신인 김씨의 사촌 김석동씨도 “친일파에게 서훈이 주어진 것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펴 보훈처와 충돌을 빚어왔다.  

일제가 한반도를 침탈할 당시 조선의 지배층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시대에 순응하는 친일의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험하고도 험한 항일의 길이었다. 윤치호는 전자를, 김가진 선생은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전자를 선택한 이들에게는 따끔한 매를, 후자를 택한 이들에게는 최대한 경의를 표하는 게 후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임종 얼마 전 작성한 김가진 선생의 친필 편지 / 며느리 정정화가 쓴 독립운동 일대기 '장강일기'>

‘윤치호-문창극 부류’에 의해 묻혀 버린 독립애국지사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러지 않았다. 전자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다는 투로 너그러웠고, 후자의 경우에 대해서는 시대의 조류를 감지하지 못한 우둔한 짓으로 치부해 버리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크게 잘못됐다. 정말 반성해야 한다.  

김가진 선생도 윤치호 집안처럼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작위에 대한 두 집안의 반응과 행동은 천양지차였다. 윤치호 집안은 남작 작위를 십분 활용해 가문의 영달과 치부의 수단으로 활용한 반면, 김가진 선생은 편안한 삶이 보장된 작위를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일부러 어렵고 힘든 길을 택했다.  

누구를 존경해야 하고 누구에게 침을 뱉어야 하는지 너무나 선명하다. 그런데도 총리후보자 문창극은 기본적인 판단과 상식을 도외시한 채 침을 뱉어야 할 사람을 외려 흠모한다고 공개석상에서 떠들어댄다. 새누리당은 이런 문창극이 옳다고 두둔하며 ‘애국자’라고 추켜세운다. 다들 미쳤다.  

‘윤치호-문창극’ 부류가 유공자 서훈심사를 하나 보다. 친일파가 심사를 하지 않는 이상 김가진 선생이 대상에서 제외될 리 없다. 이런 부류에 의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한 독립애국지사가 서훈도 받지 못한 채 먼 이국땅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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