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위의 응급실, 남궁인 의사의 헌신

이형기 | 기사입력 2024/12/02 [12:55]

하늘 위의 응급실, 남궁인 의사의 헌신

이형기 | 입력 : 2024/12/02 [12:55]

붕괴된 의료 현실 속에서 빛난 헌신의 본보기

▲ 남궁인 의사(이화여대부속목동병원 응급의학과)/페이스북 캡쳐     ©

최근 의료계와 정부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의료 현장은 붕괴 직전에 놓였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불합리한 의료정책 강행으로 의료 현장은 붕괴 직전에 놓이고, 의료진의 사기가 꺾인 상황 속에서, 서울 이화여대 부속 목동병원 응급의학과에 근무하는 남궁인 의사의 이야기는 진정한 헌신과 봉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삿포로행 비행기에서 벌어진 한 응급 상황 속, 남궁인 의사는 피로에 지친 몸을 이끌고도 환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나섰습니다. 그는 당직을 마친 지 불과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지만, "환자를 외면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안전벨트를 풀고 복도로 걸어나갔습니다. 제한된 기내 환경 속에서도 그는 응급의학과 의사로서의 전문성을 발휘하며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고 승무원들과 협력해 상황을 안정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하늘 위의 응급실, 의사의 사명감이 빛나다

환자는 협심증 증세를 보이며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심한 구토를 하며 창백한 얼굴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기내라는 환경적 제약 속에서, 남궁인 의사는 낡고 철 지난 최소한의 의료 장비로, 환자의 상태를 진단하고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환자를 살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오래된 수은 혈압계와 '병원놀이용'으로 썻을 법한 낡은 플라스틱 청진기를 사용하며, 환자의 혈압을 확인하려 애쓰는 모습은 열악한 의료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사의 사명감을 보여줍니다.

남궁인 의사의 헌신은 단순히 한 환자를 돕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승무원들과 함께한 그의 노력은 의료진이 처한 현실 속에서도 책임감을 다하는 의료인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까지 환자의 상태를 주시하며,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는 그의 태도는 "환자를 외면할 수 없다"는 그의 철학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붕괴된 의료 현실 속 희망의 빛, 남궁인 의사의 헌신

남궁인 의사의 이야기는 단순한 감동을 넘어, 오늘날 의료 현실에 대한 심각한 성찰을 불러일으킵니다. 정부의 무책임한 의료 정책과 의료진과의 갈등은 이미 의료 현장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장시간의 과도한 근무와 충분한 보상 없는 희생이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 남궁인 의사는 자신의 사명과 헌신으로 이 시스템의 무책임함을 넘어서는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남궁인 의사는 사건 후 항공사로부터 감사의 표시로 작은 비행기 모형과 감사 편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보상도 그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에 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남궁인 의사가 보여준 놀라운 봉사 정신은, 불신과 혐오로 일그러지고 있는 우리 사회에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아래는 남궁인 의사가 직접 작성한 글의 전문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의료진의 헌신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의사 (이화여대부속 목동병원)-페이스 북 켑쳐

지지난주 나는 삿포로에 갔다.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었고 다만 혼자 원고를 쓰러 갔다. 병원은 공항과 가깝기 때문에 출국하려면 당직을 마치고 바로 가는 편이 좋다. 또 오프를 길게 받으려면 근무를 몰아서야 한다. 그래서 평소처럼 연속으로 며칠 근무하다가 밤샘 당직을 섰다. 응급실의 새벽은 유독 힘들었다. 아침 버스에서 잠시 잠들고 공항에서 대기하다가 삿포로행 비행기를 탔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일단 현지에 가서 쉬는 편이 나았다.
​ 기내 좌석에 앉아 안대와 귀마개를 하고 눈을 붙였다. 비행기는 곧 이륙했다. 기면 상태에서는 아직 응급실에 있는 듯 했다. 순간, 방송이 울렸다. "기내에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승객 중 의료인이 계시면 나와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기내에..."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런 경험을 물었지만 왜인지 없었다. 그래서 언젠가 한 번쯤 이런 상황을 기대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허나 지금처럼은 아니었다. 퇴근한지 불과 네 시간쯤 되었다. "나는 지금 보통 승객이고, 간밤에 열한 시간 동안 환자를 봤고, 현재 환자를 더 보고 싶지는 않..."
​ 그럼에도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료인에도 종류가 많았다.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간호사, 조산사였다. 그중 치과의사나 한의사나 조산사는 응급 환자를 진료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이었다. 의료인으로서 충분한 자격과 별개로 법적인 책임을 고려하면 나서기 힘들 것이다. 평소에 '진단' 업무를 하지 않는 간호사도 비슷할 것이었다. 의사도 전공 분야가 다양하다. 평소 피부나 안구만 보는 의사도 많았다. 하지만 대학병원 응급의학과가 눈을 감고 환자를 외면하기는 불가능했다. 퇴근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결정이 쉽기도 했다. 몇 시간 전까지 하던 일을 그대로 하면 되었다.
​ 안전벨트를 풀고 기내 복도를 걸어 환자에게로 갔다. 환자는 좌석에서 맹렬히 구토하고 있었다. 협심증이 있었다고 했고 얼굴이 창백했다. 흉통은 없었지만 소화기계 증상이 심했다. 앉은 자세에서는 압통이 없었다. 노년의 남성이라 심근경색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하지만 기내에서는 진단할 방법이 없었다. 몇 가지 문진을 하자 옆에서 내 소속과 신분을 물었다. "맞다,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 하던 일을 너무 그대로 했군." 나는 반사적으로 소속을 답한 뒤 일단 환자를 눕히자고 했다.
​ 환자를 부축해 지정된 통로에 눕히자 창백함은 나아졌지만 손발이 찼고 식은땀을 흘렸다. 이마를 짚어보자 한기가 돌았다. 순환 부전은 확실했지만, 체한 증상과 심근경색은 구분되지 않는다. 가능한 신체검진을 전부 시행했지만 특이소견이 없었고 내 손은 심전도가 아니었다. 갈비탕이 체한 것 같다고 했지만 심근경색 환자도 오기 전에 무언가를 먹는다. 나는 뭐라도 할 방법이 없냐고 승무원에게 물었다. 승무원은 구급박스를 들고 왔다. 설명서에는 체온과 혈압을 잴 수 있고 몇 가지 의료 장비를 쓸 수 있으며 경구약을 투여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일단 바이탈을 확인해보자고 했다.
​ 그러자 승무원이 내게 물었다. "박스를 열려면 선생님의 신원이 확실해야 합니다. 정말 의료인이 맞으신지요. 나중에 기록해둬야 합니다.", "저 응급실에서 일합니다. 제가 책임질테니까 일단 열어주세요." 봉인을 뜯자 드디어 상자가 열렸다. 내용물은 전반적으로 낡았다. 붕대, 소독약 등의 외상 처치는 현재 전혀 쓸모가 없었다. 알러지약, 진통제, 소화제 등이 있었지만 환자가 구토하고 있는데 먹일 수 없었다. 그나마 도움이 될만한 것은 체온계와 혈압계였다. 그래서 나는 체온과 혈압을 재보자고 했다.
​ 그러자 그 자리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방금 너무 병원에서 하던대로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료인은 나뿐이니 체온과 혈압은 내가 직접 재야했다. 그래서 체온계를 가져다가 환자의 귀에 넣고 눌렀다. 체온이 낮았다. 이미 알고 있던 정보였다. 이제 혈압을 재야했는데, 수은 혈압계였다. 환자 팔에 커프 감고 수류탄으로 공기 채워서 수은주를 올리고 청진기로 듣는 방식이었다. "나 병원 처음 들어왔을 때 수은 혈압계로도 혈압 재고 막 그랬어." "아니 선생님 언제 적 얘기를 하십니까." 할 때, 그 혈압계였다. 이십 이 년 전 의료봉사 동아리에서 재본 뒤에는 다시 만져보지 않은 혈압계였다. 반가웠다. 지금은 사만 원이면 자동 혈압계를 살 수 있는 시대였으므로 귀한 물품이었다. 게다가 청진기는 우리가 '병원놀이용'이라고 부르는 플라스틱 청진기였다.
​ 어떻게든 환자 팔에 커프 감고 청진기를 밀어 넣고 수류탄을 짰다. 비행기의 소음과 귀를 찌르는 플라스틱과 침대가 아닌 바닥에 누운 환자와 이십 년만에 만져보는 커프까지, 혈압이 제대로 측정될 리가 없었다. 적당히 땀을 흘리면서 노력했는데, 들리는 것 같기도 해서, 그냥 들은 것으로 치기로 했다. 그러자 이제 환자는 갑자기 화장실에 가겠다고 했다. 체한 것 같이 명치가 쥐어트는데, 변이 마렵다고 했다. 나는 또 나쁜 생각이 났다. 심장 쪽 문제가 있는 환자는 갑자기 변이 마렵다고 호소하다가 심정지로 쓰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위장으로의 혈행이 갑자기 줄어들기 때문이다.
​ 어차피 환자를 말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환자는 문을 열어놓고 변을 보셨다. 나는 그 앞에서 혹여나 심정지가 올까봐 지키고 있었다. 환자한테 아무것도 해준게 없었고 환자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승무원들은 옆에서 최선을 다하고 계셨다. 이런 방송을 하면 의료인이 좀처럼 안 나오는데 기꺼이 나와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셨다. 왜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아침에 퇴근했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근무하기 힘든데 이렇게 환자까지 봐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셨다. 공감해주셔서 감사했다. 아마도 내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야간당직을 마치고 탑승했다고 얼굴에 쓰여있었을 수도 있었다.
​ 환자는 화장실에 앉아 있다가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면서 자리로 돌아가셨다. 이제는 조금 덜 아파졌다고 하셨다. 실제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으니, 일반적 소화기계 증상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나는 한 게 없었다. 환자 곁에서 치유 토템의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래서 다시 증상이 있으면 호출을 달라고 하고, 증상이 가라앉지 않으면 착륙 후에 병원에 가야한다고 말씀드리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승무원님이 내게 감사를 표하며 물과 간식을 가져다주셨다. 환자의 지인분도 오셔서 내게 약과를 주셨다. 모두가 따뜻하고 감사했다.
​ 다시 안대를 끼고 잠을 청했지만, 언제 호출이 올지 몰랐다. 병원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러자 승무원님이 내게 서류와 볼펜을 들고 왔다. 내 직장과 면허 종류와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서 내야 한다고 했다. 이것도 이들의 일일 것이다. 그래서 써드렸다. 그러자 이제는 수기 차트를 써야 한다고 했다. 병원에서도 차트는 전산으로 요약해서만 적었으니 마지막 수기 차트는 십 년 전쯤 적어본 것 같았다. 이것도 이들에겐 일이니까, 하면서 썼다. 그러자 이제는 의료인임을 입증할만한 증거를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스마트폰에 병원 신분증이 들어있지 않으므로, 인터넷에 연결되면 입증할 수 있다고 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승무원님은 스마트폰을 가져와 인터넷에 내 이름을 검색하고 그 내용을 적어가셨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도 환자가 불편감 없이 잘 걷고 있는지 곁눈질을 해서 보았다. 다행히 증상이 호전되어 보였다. 이것으로 내 일은 끝이었다.

 

​ 나는 삿포로에서 글을 세 편 쓰고 귀국했다가 돌아와 다시 근무를 몰아서 섰다. 비행기에서의 소동을 잊어갈 즈음, 메시지가 하나 왔다. 김민지씨가 택배를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뉴진스는 아닐 것이었다. 퇴근해서 받아보자 항공사에서 보낸 상자였다. 환자가 호전되었다는 감사 편지가 A4 용지에 인쇄되어 있었고 1:300으로 축소된 비행기 모형이 같이 들어 있었다. 이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나는 진료 행위의 대가로 공식 홈페이지에서 39,900원 하는 비행기를 하나 얻었다. 내 첫 경험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물론 다음에 호출이 울려도 다시 안전벨트를 풀고 복도를 걸어 나갈 것이다. 환자를 외면할 수는 없으니까.

원본 기사 보기:뉴스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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