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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등불-(1)]제1장 나의 꿈과 집념, 그리고 보람

하루 14시간 외 야간작업, 초봉 20전(호떡1개 5전). 일제 식민노동착취

박종호 고문 | 기사입력 2015/05/14 [10:01]

[고조선의 등불-(1)]제1장 나의 꿈과 집념, 그리고 보람

하루 14시간 외 야간작업, 초봉 20전(호떡1개 5전). 일제 식민노동착취

박종호 고문 | 입력 : 2015/05/14 [10:01]
▲ 식민지배시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모습. 자료사진     © 편집부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박종호] 제1장 나의 꿈과 집념, 그리고 보람. 1). 8·15 해방 이전. 필자는 1922년생으로 90평생 오늘에 이르기까지 ‘8·15’ 광복이후 분단된 조국을 항상 잊은 적이 없다. 그것은 과거 나의 청소년 시절, 일제(日帝)의 사슬아래 겪은 희망 없고 무자비하고 혹독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소이라고 생각한다.

해방 전, 우리가 자랄 때엔 형편없는 빈곤과 모진 가난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또한 일제의 악랄(惡辣)한 징병(徵兵), 학병, 징용(徵用) 그리고 젊은 여인들은 정신대(挺身隊)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느라 전전긍긍하며 방방곳곳으로 피해서들 다녔다. 그리고 일부 뜻있는 젊은이들은 해외로 빠져 나갔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고 국경을 넘나들며 암암리에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활동하는 독립투사가 많았다. 그들은 감옥소(監獄所)에 드나드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필자도 한때 그리 생각 했다. (그러나 당시 일제의 앞잡이나 친일 부역자들은 그러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도 그들은 그 당시를 그리워하며 동경할는지도 모른다.)

일제(日帝) 식민지시대에, 나는 17세 때부터 일인들이 운영하는 ‘조선인쇄회사(朝鮮印刷株式會社)’(일제 총독부의 전속기관이나 다름없었다.)의 제본공(製本工)으로 취직하였다. 당시 일제 통치하에서는 인쇄공이면 높은 직업으로 아라 주는 직업이었다. 조선인쇄주식회사(서울 만리동에 있던 4층 건물로 아주 큰 건물. 현재는 광명인쇄주식회사)는 조선총독부 또는 중요 공문서와 책자를 인쇄, 제작하는 회사였다. 그 곳은 일제 치하 조선총독부 관활 내에서 일어나는 중요 공문서들을 인쇄, 재본 하였던 회사인데, 중요 문서들은 따로 철망으로 막아놓은 칸막이 칸 안에서 취급했다. 그 작업장은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였다.

작업시간은 평일(오전 8시에서 오후 6시, 야간작업 4시간) (하루 14시간X28일= 월392시간 + 추가 밤샘시간 56시간) 합계 총 월 450여 시간. 일당은 10시간 초봉은 20전(당시호떡 하나에 5전, 일당 20전이면 호떡4개분), 5년 근속자 70~80전, 10년 근속기술공 1원에서 1원50전 최고 2원정도. 소학교 방학 책을 제작할 때에는 (6월, 11월 달에는) 철야작업을 하루걸러 보름식이나 근무한다. 이렇게 일제의 혹독한 노동착취를 경험하였다.
[참고: 위의 임금액은 이승만 정권 때나 군사정부 때의 화폐개혁( 1000 대 1) 이전의 화폐가치 기준임.]

그런데 당시 조선인쇄주식회사에 다니는 노무자들은 정보기관의 요시찰(要視察) 대상이었지만 놀랍게도 그 직장은 독립운동가들의 소굴이었으며 작업 중에도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끌려가는 일이 흔했다. 이를 눈으로 직접 본 직원들은 오히려 그들을 존경하는 눈으로 보았으며 그때 마다 저렇게 말없이 조용한 사람들이 조국독립운동가들이었구나! 하고 식사시간이면 모여서 수군수군 소리죽여 말하곤 하였다.

조선인쇄주식회사에 처음 입사할 때 초봉이 20전, 5년을 다니고 보니깐 70전이되었다. 그런대 다른 직장에서 1원40전을 준다기에 직장을 옮기었다. 직장은 옮길 적마다 조금 식 일당이 올랐다. 그런데 어느 날 돈보다도 꿈이 있어야 된다는 깨우침이 있었다.

나는 나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 시중에서 1원40전을 받다가 오히려 낮게 70전을 받고서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朝鮮書籍印刷株式會社 :해방 후 국정교과서주식회사; 대전으로 내려간 조폐공사의 전신)내의 관보실(官報室)에 의도적으로 입사하였었다. 그런데 그곳의 작업은 2~3시간만하면 끝이 나고 여유시간이 많은 곳이다. 그곳은 공부하기가 좋은 환경이고 그곳에서 좋은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관보실의 직원은 조병호란 친구와 단둘이었는데 둘이서 이와나미문고(岩波文庫)를 교환해 보면서 독후감을 토론하고 특히 데·깐·쇼(데까르트, 깐트, 쇼펜하워)의 철학 등을 토론하며, 꿈과 의식과 의지를 키우며 성숙해져 나갔다.

때로는 아나키스트(지배권력 배격, 자율정부 지지) 박열(朴烈) 열사의 행적 등 애국지사들에 대한 소식을 알게 되기도 하였다. [박렬은 일왕 히로히토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일본 법정에서 재판 심의를 거절하여 일본사회를 분노와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갔으며, 사형수로서 수감 중에 있을 때 일본여자 가네고문자와의 옥중결혼 등등, 그의 행적을 알게 되는 등의 시야가 넓어지면서 조선청년으로서의 기개와 포부를 키우기도 하였다.] 한번은 독립운동가 들이 많이 찾아가는 독립운동 본거지의 한 곳인 연안(延安) [중공군 8로군이 있다는 연안]까지 갈려고 결심하였으나 참아 어머니와 식구들을 떼어놓고 갈수가 없어서 포기한 일도 있었다.

나는 그곳 조선서적인쇄회사 지하 관보실에서 1943~1945년 봄까지 2년간 근무하였다. 그곳에서는 총독부관보 및 문서의 발송 작업을 하는 곳인데 (총독부 관보 및 중요문서는 그것을 취급하는 전국 요직에 있는 일인들에게만 발송) 그런 발송 작업을 통하여 해외의 임시정부의 존재와 동향, 이승만 박사의 활동 등도 숙지하게 되었다. 오늘의 천부경(天符經)에 관한 이야기도 당시 양심적인 일본인 하야시(日人 林)과장 과의 대화를 통해서 어설프게나마 알게 되었다. 해방 전 1943년경부터는 일제의 패망과 광복을 미리 알게 되었고 지하운동을 하는 독립운동가 들을 찾아다니었다. 그러한 중에 내 깐에는 민족과 나라를 사랑 한다는 소위 애국심이 남달리 굳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관보실에서 같이 근무하던 조병호 동지와 함께 꿈을 키우고 있던 중 어느 날 어느 인사의 천거로 제일프린트사(일제말기의 해외정보의 아지트)에 입사 근무하게 되었다. 이는 큰모험이요 또한 긍지와 보람이었다.

2). 1945년 8. 15 광복의 그날 

8.15 해방이 되던 날, 시청 앞 광장에서 사각모를 쓴 전문학교 학생 세 명이 조국광복의 감격으로 태극기를 앞세우며 왜놈헌병 앞에 맞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당당하게 잡혀가는 그 늠름한 현장을 보았다. 그 후 그들이 어찌되었는지 궁금하다.

해마다 그날이 오면 그들이 생각이 난다. 당시 일제의 패망을 먼저 알도 있었던 왜놈헌병들은 을지로 충무로 시청 앞 광장 등에서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왜놈헌병들은 서슬이 시퍼런 긴 칼을 빼들고 허리에는 권총까지 차고 민중을 위협하고 있을 때었다. 그때 학생들은 흰 와이셔츠에 검정색 학생복 차림 맨몸 그대로였다.

그날 왜놈 천황이 연합군에게 항복한다는 녹음방송을 듣고 군중들이 모이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때 나는 “일제패망과 조국해방의 뉴스”를 프린트(복사)한 유인물 1000여 매를 싸들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살포하려고 급히 가던 중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현장을 더 지켜볼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일이 따로 있었다. 나는 나대로 흥분된 마음으로 광화문을 지나 영천으로 가는 전차로 뛰어 올랐다. 나는 창문이 없는 전차의 출입구에서 내가 들고 간 유인물을 살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광화문에서 영천으로 서서히 움직이는 전차 안에서 밖에 군중들을 향하여 해방과 독립의 기쁜 소식이 담긴 유인물을 군중을 향하여 뿌리고 있었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그때 그 당시 그날을 위하여 얼마나 기다렸으며 참고 견디어 왔는가! 하늘은 우리 백의민족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었다. 이는 민족의 숙원이요 역사의 필연이다.

8·15 당시에, 나는 을지로 입구에 있는 제일프린트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내가 프린트사에 취직하게 된 것도 그 프린트사의 홍성하(洪性夏)사장이 당시 연희전문(延禧專門)학교의 경제학 교수라는 것보다도 그 프린트사가 일제말기에 해외임시정부와의 정보수집 관계로 모이는 비밀장소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홍교수가 일제의 요시찰인물(要視察人物)이란 것을 알고서도 그 제일프린트사에 입사근무하게 되었다. (해방 후 그분은 민주당 초대 산업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헌병 끄나풀과 고등계형사들이 자주 드나드는 일들이 자자졌음을 알 수 있었다. 심상치 않은 일들이라 짐작은 갔다. 당시 일제가 남양군도와 동남아에서 승승장구한다고 큰소리치고, 왜놈의 앞 자비들은 의기가 당당하여 하늘 높은 줄 모를 때였다. 때는 왔다. 1945년 8월 14일 왜놈헌병이 사복을 입고 홍성하 사장을 찾아 왔다. 무엇인가 정보를 살피려고 여러 번 다녀간 뒤였다. 헌데, 그동안 침울하고 말 한마디 없던 홍사장이 그날따라 희색이 만면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일찌감치 문을 닫고 프린트사내에서 막걸리 파티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이 지나고, 몇 잔 나눈 뒤에 쉬쉬하면서 은연중 중대한 뉴스가 나왔다. 일본천황이 내일이면 연합국에 대해 정식으로 항복한다는 크나큰 소식이었다. 이 얼마나 기쁘고 놀라운 일인가.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당연 한 귀결이었다. 일동중의 한사람이 필경을 들고 부르는 대로 써나갔다. 직원이라야 모두 3명뿐이었다. “백두산 뻗어나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 동산에 역사반만년 대대로 일어서는 우리 삼천만 ..... ”

이렇게 조국의 해방소식을 담은 유인물을 작성, 밤 세워 프린트 3000매를 등사하여 두었다가 다음날 8월 15일에 광화문에서 서대문으로 가는 전차 안에서 나는 그 유인물을 뿌리고 있었다. 군중들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따라 붙는다. 전차는 땡땡땡 서서히 움직이고 유인물은 공중을 향하여 솟구치면서 뿌려진다. 자유의 물결을 타고 군중들은 몰리면서 달리는 전차에 따라 붙는다. 땡땡땡 전차안의 승객들도 흥분의 도가니 속이었다. 만세! 만세! 유인물은 차창에서 바람을 타고 날라 가면서 그들에게 기쁨의 새 소식을 전하며 뉴스가 전파되어 나간다. 그 뉴스가 담겨진 삐라는 당시로선 처음 뿌려지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대한민국만세! 아! 아! 아! 그날의 감격!!! 잊을 수 없는 그날은 8·15 광복의 날이었다. (2000. 8. 15. 일손).

 

일손 박종호 선생 프로필

-일손 문집 둘러보기. 티스토리(http://pjh24.tistory.com/)

 

∆ 홍익통일역사 신문 플러스코리아 상임고문

∆ (社)杏村(李嵒)學術文化振興院 顧問

∆ 한 얼 역사정신선양연합 총재

∆ (社)統一建國民族會 顧問 ∆ 韓國統一文化振興會 顧問

∆ 민족비전 삼금법, 조식호흡법 소유자

∆ 민족정기 확립과 장기적 교육대책으로 역사교과서 검인정제도 개선에 공헌

∆ 한겨레대연합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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