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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등불-(2)]광복 후 장준하선생 사상계와의 인연

박종호 고문 | 기사입력 2015/05/20 [09:09]

[고조선의 등불-(2)]광복 후 장준하선생 사상계와의 인연

박종호 고문 | 입력 : 2015/05/20 [09:09]
▲ 시베리아 샤만니즘의 성지‘성스러운 바다’ 바이칼호 흐르벳산맥을 배경으로 한 박종호 고문. 신들의 22위의석상 위상. 현지어로 척추, 용마루의 뜻’     © 편집부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박종호] 3). 8.15직후, 나의 꿈과 집념. 나는 8.15 전이나 그 후나 꿈이 있었다. 그 꿈을 이루는 데에는 알아야 되고 알고 싶으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어려서 일찍이 서당에서 한학을 자치통감까지 익히는 것 외에, 명동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계성보통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를 교육을 통해 키우려고 운영하는 청산학원(靑山學院)에 입학하여 다니면서 교육을 받고 길들여졌다. 어린 나이인대도 나라가 있고 없고를 알게 되었다.
 
[한번은 교무실 앞에 한 뼘이나 되는 큰 지네를 잡아 매달아 말린 것을 보고 교장(이명용 옹, 구레 나루 수염이 한 뼘이 넘는 분이다.) 선생님에게 왜 지네를 말리냐고 학생들이 물어보면 왜놈을 저렇게 말려야 나라를 되찾는 다고 대답하시었다.] 이렇게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필자는 이러한 민족주의자로 가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8.15 후에는 더욱 나라를 바로세우고 지도자가 되려면 책을 많이 보고 최소한 대학 학부까지는 공부를 해야 된다고 독서열이 강했다. 해방직후 한글학회주관 한글강습소(강사 이희승, 최현배, 이극로)를 비롯해 대성영수학원 영어 수학 속성과를 수료하고, 야간대학 한국대학 전문부 문과2학연에 편입한 후 야간대학을 다녔다.

야간대학을 다니면서도 일요일이면 각 대학의 학생친구들을 모아 우리 집에서 독서회를 주관하였다. 즉 이주주의독서회(二主主義讀書會)라 하였다. 동국대 학생이며 남로당 전국평의원회의 부장이기도 한 박님, 미군 통역관인 허님, 교회 전도사인 공(孔)님을 비롯하여 건대·국민대·단국대·한국대 등의 학생들 8명이 매주모여 각자 분담한 주제내용과 이념을 발제토론하고 과제의 내용이 상호 이해하고 이론이 정립될 때까지 몇 번이고 토론에 붙여 결론이 날 때 까지 지속하였다. 예를 들면, 동국대 박님은 칼 마르크스의 유물론 및 자본론, 단국대 김님은 헤겔의 정·반·합의 변증법, 전도사 孔님은 신학론, 필자는 이주주의 생산론 등을 발제하고 토론하였다.

당초 이주주의독서회를 조직하게된 것은 미·소에 의해 분단된 조국은 장차 이념적 문제로서 유심론과 유물론의 변증법적 역사발전에 대한 이론적 무장을 통합 개발하고 다가오는 미래의 이론을 갖추지 않는 한 좌우 합작은 물론이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갈등과 모순을 해결 할 수 없다고 생각되어 20세기의 인류사의 새로운 철학과 이념을 창출해 내야 한다는 당위성은 우리의 역사적과제라고들 생각하였다.

우리들은 조국이 두 동강이 나고 민족적 불행에 직면한 젊은 학생들로서 주어진 역사적 사명과 소명감을 갖은 학생들이 각자 학교에서 배우고 익힌 학문적 이론과 과제를 이주주의(二主主義) 이념과 사상에 맞도록 정립해나가려는 애국청년들이었다. 회원가입 필수조건은 초당적이며 정치의 가입하지 않는 조건과 당시 어는 직분이나 사상을 가지고 있든 이주주의 생산론 (生産論, 800여 페이지)책을 독파하고 난후 그를 이해하고 그 실천을 추구하겠다는 동지들로 독서열이 대단한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아쉽게도 정리해서 엮어놓은 책은 깨알 같은 글씨로 100여 쪽이나 되었는데 1.4 후퇴 시 (군에 있을 때에) 많은 책과 함께 인민군 정치위원과 인민위원이 수거해가 분실되었다.

4). 왕성한 학구열과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취직

먹고 살자니깐 취업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생활권문제이고 생존의 문제이다. 나는 월급을 한 푼이라도 더 받고자 식량배급도 잘 나온다고 하는 조선정판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에 대응한 공부도 할 겸(좌익 붉은 서적, 꽁 먹고 알 먹는 생각으로) 김춘용 선배의 소개로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에 취직하였던 것이다. 다만 오후 5시면 특별이 야간대학에 다닐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는 조건으로 입사하였다. 주경야독,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저녁이면 한국대학에 다니고 토요일 오후가 되면 대동신문사 정치연수원생으로 열심이 다녔다. 일요일이면 이주독서회(二主讀書會)를 주관하면서 꿈과 포부를 나름대로 품고 학구열을 불태웠다. 특별한 목적은 별로 없었다. 오직 출세하려면 남 보다 앞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허나 조선정판사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위조지폐사건으로 유명하였고 더욱 주목받는 것은 미군정 당시 좌익신문인 해방일보사가 함께 있는지도 모르고, 겁도 없이 자신의 신념과 양심만 믿고 빨갱이 소굴이라 하는 정판사에 취직하였다. 물론 그 당시에는 전국의 출판사나 인쇄계에 종사하는 사무직이나 노무자들은 거의 출판노조에 가입한 사람이 많았다. 정판사는 전국(남·북) 각종 좌익 서적책자를 인쇄 발행하는 공장이다. 나는 그 곳에서 제작되는 책들을 돈 안들이고 먼저 볼 수 있었고 견본 책은 대개 내손으로 만들기 때문에 한권 더 만들어 집에 가지고가 보곤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좌, 우익의 선전물이나 책자를 통해 이론과 이념 등 미군정 당시 남보다 앞서 이론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직장 내의 출판노조나 그 밖 단체에서 나를 설득하려다 오히려 설득 당하는 일이 많았다. 정판사의 직원이 200여명이 넘어 전부다 빨갱이로 보였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그중에 비당원이고 비조합원은 나 하나뿐이어서 상부조직과 내부 조직에서도 큰 문제가 되어 크게 주목 받았었다. 그래도 그들은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다. 내가 열심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 준 것에 대하여 나는 그를 고맙게 생각하였다. 더구나 정판사내의 각 직장 부서 내에서는 분과별로 세포조직이 되어있고 회의를 통해 당면문제들을 논의 하는 회의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비당원 비조합원이어서 참석하지 않아도 되어 참석하지 않았다.

8.15 광복 후, 당시 미군정아래에서는 시국이 혼란스럽고 정당 사회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우익신문이 미처 나오기 전에 좌익신문 인민일보와 해방일보만 있을 때다.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나오기 전에 좌익에게 크게 주목을 받은 극우신문인 대동신문이 발행되었다.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을 먹으며 여봐라 하는 뜻으로 일하던 작업대 상위에다 대동신문을 크게 펼쳐놓고 신문을 보면서 밥을 먹었었다. 기사내용은 좌익으로선 참을 수 없는 기사들로 남노당의 불법적인 선동행위 전평노동운동이라든가 좌익을 지탄하는 기사들뿐이었다. 우익을 대표하는 신문으로서 크게 주목을 받았던 신문이다.

그 당시는 좌, 우익의 테러가 극심할 때였는데 조선정판사와 해방일보사 내에서 감히 대동신문을 펼쳐본다니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힐 일이었다. 어떤 때는 신광범, 유도명, 김재선 등 책임자들(나중의 신문기사를 보고 알게 된, 위폐사건 때에 사형 선고를 받고 6.25 때 출옥한 사람들)이 그 광경을 확인해보고 가기도하였다. (이제와 생각하니 아마 겁도 없는 젊은 혈기로 보아 준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나에 대한 포섭작전은 꾸준하고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한 예로 아침 출근 때에는 내가 지내가는 동네골목 어구에서 김재선 동무(당시 사실을 실감나게 부르기 위해 동무지칭)가 지키다가 함께 출근했다. 그 이유는 출근길에 같이 동행하면서 친분을 통해서 상대를 설득하고 포섭하기위한 것으로 직장 내 조직위원위에서 특별한 지시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된다.

그곳 작업장에서는 작업을 하기 전에 조회를 하고 작업에 들어간다. 조회는 당시의 시국문제라든가 특히 노동문제에 대해 노동자 권익보호와 파업운동 등 선동연설로 시작과 끝을 맺었었다. 또한 적기가(赤旗歌)와 해방의 노래는 필수조건이다. 그러하지만 나로서는 주변이 없어 생활권과 생존권 문제로 도리 없이 묵묵히 다니었다. 그러나 나는 6.25가 발생한 후에도 9.28 서울수도 탈환 회복될 때 까지 다니기 어려운 직장을 위험을 무릅쓰고 다니게 되었다. 6.25가 난 후에도 9.28 직전까지 다니게 된 것도 정판사가 위폐문제로 해체된 뒤나 전에도 정당 사회단체 및 노동조합에도 가입 협력한 일이 없이 꾸준히 근면하게 일하고 공부에만 열중한 덕분 때문이라고 본다.

5). 6.25 전란 그리고 9.28 수복 이전

미군정 때 [6.25전] 조선정판사가 위조지폐사건으로 폐쇄된 뒤에는 천주교 소속 대건인쇄사가 그 곳을 접수, 운영하다가 경향신문사로 관리자가 바뀌면서 계속 운영되었고 그래서 모든 종업원들은 경향신문사 직원으로 계속근무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6.25 전쟁이 터져서 경향신문사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인민군 6625부대가 들어와 그곳을 접수하였다. 그래도 경향신문사는 공식으로 아직 해산되지 않았고, 노무자들 200여명이 남아있어 자체 운영하게 되는 상항이었다. 자체 운영을 하는 데에도 회사로서의 대표가 필요했다. 그들은 직장 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회 주관으로 경향신문사 관리위원장으로 나를 선출한 것이다.(즉 신문사 사장이 된 것이다). 나는 누가 주동을 하고 어디서 몇 사람이 모여서 선출하였는지 알지도 못하고 참석도 않고 한구석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은 일이다. 나는 그것을 거절하고 위원회의 조직도 기피하였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에 옥중에서 풀려나온 유도명, 김재선 간부에게 그 관리직 직책을 넘겨주었다. 그들은 긍정적이고 나의 행동에 대해 그동안 10여 일간 무사히 넘어간데 대해서 고맙다고 하였다.

6.25때 경향신문사를 접수한 인민군 6625부대는 인민군의 선전 인쇄물을 관장 관할하는 부대인 것 같다. 경향신문사 건물은 원래 조선정판사· 해방일보사· 남로당이 각각 나누어 함께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그들로서는 상당이 중요한 기관의 관할이었기 때문의 인민군부대가 주둔 배치되어 있었고 그곳에서는 전쟁수행과 각종 인쇄물을 인쇄하는 데에 역시 많은 인력이 필요해 전 노무자를 계속 활용하여 밤샘 작업을 하는 수가 빈번하였다. 또한 인민군이 포항까지 밀고 내려가 대한민국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있고 인민군은 승승장구로 자신 만만할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밤샘작업을 하고 있는데 신광범간부가 와서 누구를 존경합니까? 물으며 답을 독촉을 하기에 나는 조소앙선생을 존경합니다(당시 조소앙선생이 마침 서울에 와있었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나의 등을 탁 치면서 “동무 아직도 멀었구먼.” 하더니 새벽3시경에 나를 사무실로 불러서 몇 마디 이야기가 오고가더니 남로당 당원가입 원서를 밀어주면서 단도직입적으로 가입하라는 것이었다. 현관에는 인민군초병이 있고 밤은 고요한데 그 순간은 누구도 당해보지 않고서는 실감 할 수가 없다. “이젠 끝났구나.” 하면서도 무엇인가? 기지(機智)가 떠올랐다. 마침 몇 일전에 그곳에 근무하는 노무자들에 대해 신분증 발행용으로 사진을 주었는데 일간 신분증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생각이 나서 얼핏 말하기를 “여직 것 가입을 못했는데 일주일만 참아 달라” 고 말 했더니 그렇게 하라고 쉽게 대답을 받았다. 당시 신광범 간부 생각으로는 독안에 든 쥐인데 제가 어찌하랴 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다음 이틀 후에 인민군 6625부대 근무 직원의 신분증을 받고 그 다음날 즉시 시골로 피신하고 있다가 9.28 때에 다시 서울로 되돌아 왔다.

이제 생각하면 조상이 도왔고 하늘이 도와서 그야 말로 천우신조다. 참 나도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고 자문자답할 때가 있다. 그 후의 고생은 어찌 다 말하랴. 온 민족이 다 당하는 시련이거늘 시골에 피신하고 있으면서도 6625부대 신분증은 효력이 절대적이었다. 의용군이나 시골 촌 인민위원회의 검문은 쉽게 넘어갔다. 이제 이러한 민족적 수난과 비극은 다시 있어서는 아니 된다. 언젠가 한번 장준하선생은 이 사실은 듣고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였다.

6). 9.28 수복 이후

나는 9.28수복 후에 직장도 없이 뜨내기장사를 하면서 시국을 관망하던 중, 다시 1.4후퇴 때에 남하하게 되었으나 경산에서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1951년 1월 5일에 육군본부 고급부관실소속 531부대로 배치되어 근무하였다. 그 후에 1953년 4월 10일 육군 제15병원에서 의가사제대를 하였다.

1953년 4월에 육군에서 제대한 후, 대한교육연합회소속인 서울인쇄사에 입사하여 제본과장으로 취임하였다(1953년). 연합회소속 서울인쇄사의 제본과장으로서의 업무성적은 기대 이상이었다. 연합회소속 서울인쇄사의 직원이 200여명이나 되었고 운영체제는 전무, 상무이사, 공장장, 각부 과장 등으로 독립체제였는데, 나의 봉급은 전무 다음인 상무이사와 동급의 특별 대우였고 특별 보너스도 받았다. 이는 나의 근무성과로 사업의 큰 이익을 창출하게 되고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이미 일곱 식구의 가장으로 또한 이상의 여러 여건아래에서 주경야독하여, 낮 밤으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초인적인 노력으로 가정을 유지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사업까지 일으켰다. 이렇게 자수성가(自手成家) 할 수 있었으니 이는 다 일제 때의 혹독한 경험과 시련을 극복한 덕이라 생각된다. 나는 중소 기업인으로서 사업은 성취했지만, 자식들과 내자, 가정에 대해서는 마음을 늘 쓸 새가 없었다. 후회스럽고 미안하기 말할 수 없지만 맨손으로 맨바닥에서 일구어놓으랴, 먹을 것을 먹지도 못하고 남들같이 놀지도 못하며, 한시름 쉴 내야 쉴 수도 없어 몸과 마음은 항상 경색되어있었다. 이때까지의 있었던 일로 (13세 때 부친을 잃고 사업을 성취 할 때까지) 나는 가끔 긴장하는 버릇이 있다. 나는 중년까지 몸이 쇠약하고 얼굴은 광대뼈가 나오고 옷은 단벌 신사였었다. 어찌 이를 이해하랴. 나는 가끔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지만 남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다. 내 인생 내 지개에지고 살기가 힘겨웠다. 노숙자를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이재 나도 어느덧 90이 다 되어간다. 다만 만년에 건강이 회복되어 건강과 풍채가 좋아진 것은 꾸준한 운동과 수련의 덕으로 생각한다.

7). 문정제책사(文政製冊社)의 창업과 사상계잡지와의 인연

문정제책사의 창립과 사업의 시작은 뜻하지 않게 이루어졌다. 필자와 함께 근무하던 대한교육연합회소속 인쇄사의 최상규 상무이사가 같이 동업할 것을 제안해와 중앙제책사란 이름으로 출발하였다. 그 후에 양동식이란 설지상(屑紙商)을 하는 분이 나의 근면함과 성실성을 보고 자금을 대준다고 하기에 단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공장 간판은 문정제책사로 정하였다. 그 이유는 나는 항상 책이란 지성인의 양식이요 학문의 그릇이요 문화 창출의 근원으로 나는 항상 내가하는 직업에 대해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정사(政事)와 인륜을 밝히는 일이란 글월문(文) 정사정(政)의 뜻을 펼치는 사업이라 생각해 문정제책(文政製冊)으로 사명(社名)을 정하고 사업자등록을 하였다. 남다른 뜻과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나의 제본사업의 대상(고객)은 잡지와 단행본을 내는 출판사가 거래의 중심이 되었다. 거래처는 대학교재서적 출판사도 있지만 주로 “월간 사상계(思想界)”와 시사영어사가 중심이 되었다. 월간 잡지 “사상계”의 제본을 맡아하게 된 것은 그 “사상계” 잡지사의 대표 장준하(張俊河) 사장의 매부인 이재경 선생을 알게 되어 거래가 비롯되었다. 이리하여 거래 관계로 “월간 사상계”의 장준하사장과의 만남은 또한 각별한 인연이다. 그것은 장사장의 언론사업의 목적(자유와 민권)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과 이념에 대한 각별한 이해와 동의, 신의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월간 사상계(月刊 思想界)는 4.19전 이승만정권의 장기집권을 노린 ‘마이(馬耳) 우이(牛耳)’를 동원한 자유당 독제정권의 부정부패를 지적하고 민권신장과 국민의 주권의식을 고취(鼓吹)시켜 사회정의와 민주화운동의 선구자로서 여론을 주도하였으며, 드디어 4.19혁명으로 자유당독제정권을 타도하여 최초로 민주세력이 집결된 장면정권의 내각책임제정권을 세우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4.19후 나타난 사회질서의 혼란, 사상의 갈등, 민중의 욕구불만 그리고 정계(政界)의 주도권쟁탈전은 급기야 장면정권을 무너지게 하고, 5.16 군사정권이 출현함으로 정국이 크게 변하고 모든 사회질서가 바뀌고 새로운 군사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5.16 이후 사상계잡지에 대한 핍박과 수난은 심각하였다. 이념의 갈등과 사회적 무질서를 회복한 후 민간에게 정권을 인양한 후 원대복귀를 하겠다던 군사정권이 약속을 파기하고 또한 군사정권이 군의 원대복귀를 어기고, 장기집권의 속내를 드러내어 더욱 군사장기집권의 체제로 착착 진행하였다. 장기군사독제체제로 전환을 기도하여 드디어 유신체제로 둔갑, 민의를 단일화하고 여론을 장악 정보화정치시대로 전환한 정국은 암담하고 불투명해저가고 있었다.

광복군 대위 출신인 “월간 사상계” 장준하사장은 일제 때의 독립투사답게 그 유신정권에 맞서 월간 사상계잡지의 시대적 사명과 역할을 더욱 선명하게 해야 했고 좌절 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양심 있는 지성인들의 원고를 모아 사회의 목탁으로 또한 어두운 사회의 횃불로서의 역할을 더욱 치열하게 수행해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상계잡지를 발행하는 데에는 편집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제작과정과 유통이 원활하고 순조로 와야 한다. 그래야 자금순환도 잘되고 경영이 원만하게 된다. 헌대 당시 군사정권아래에서는 무엇보다도 제작(인쇄 및 제책)과정이 문제였다. 당시 삼화인쇄주식회사와 문정제잭사의 대한 당국의 감시와 일선정보기관을 통한 직장 내의 내사 출입은 멈추지 아니하였다. 드디어는 당시의 인쇄업소나 제책업계에서는 사상계 월간잡지의 제작을 기피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사업체와 사운이 걸려있기 때문인데, 이유는 수시로 세무조사와 정보기관의 감시, 압력행사 등으로 영업활동을 못하게 한 것이다.

양심 있는 필자의 원고를 모으는 데서부터, 편집·인쇄·제책·출고·서점에 이르는 모든 유통과정과 정기독자들에게까지 우편으로 전달하는 온 과정은 산모가 산욕을 치루는 고통을 치루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장준하사장은 잡지가 편집·인쇄·제본하여 출고되기까지의 과정을 옥동자가 되어 어두운 사회의 횃불이 되고, 잠자는 사람들을 깨우치는 목탁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그 심정을 누가 알 것인가. 그분은 작업 현장을 들러보시고 작업의 열중하는 노무자들을 같은 산업전사로 위로함을 있지 않으셨다. 당시 직원들의 일하는 모습은 정말 정열적인 산업민주화의 열사와도 같았다.

8).『사상계』잡지와 장준하사장의 수난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일손 박종호 선생 프로필

-일손 문집 둘러보기. 티스토리(http://pjh24.tistory.com/)

 

∆ 홍익통일역사 신문 플러스코리아 상임고문

∆ (社)杏村(李嵒)學術文化振興院 顧問

∆ 한 얼 역사정신선양연합 총재

∆ (社)統一建國民族會 顧問 ∆ 韓國統一文化振興會 顧問

∆ 민족비전 삼금법, 조식호흡법 소유자

∆ 민족정기 확립과 장기적 교육대책으로 역사교과서 검인정제도 개선에 공헌

∆ 한겨레대연합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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