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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인식개선에 대한 단상.

장애인과는 동정이 아닌 동행을 해야

강욱규 시인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06/27 [14:39]

장애인의 인식개선에 대한 단상.

장애인과는 동정이 아닌 동행을 해야

강욱규 시인칼럼니스트 | 입력 : 2017/06/27 [14:39]

 [플러스코리아타임즈=강욱규시인칼럼니스트]

▲ 영화 '어둠속의 댄서' 포스터 광경     ©강욱규 시인칼럼니스트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보면서 지나치게 많은 공장노동으로 인해 시력을 잃었음에도 뮤지컬 여배우라는 자신의 꿈을 위해 강인하게 살아가는 여주인공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 여주인공이 음모에 빠져 시각을 자신처럼 잃어가는 아들을 위해 변호사선임비용까지 포기하면서 아들의 치료비를 대며 자신은 사형을 선고받는다는 내용이다.

 

모성애가 애잔하면서도 강인한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영화였다. 필자는 이 글의 원래 주제가 장애인의 인식에 관한 내용이었음에도 이 영화를 보며 간간이 보여 느꼈던 장애인에 대한 일반인, 즉 정상인들의 태도나 인식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따라서 그 연장선상에서 어떻게 하면 장애인들의 삶이, 정상인들의 그 인식을 바꿈을 넘어, 개선될까 하는 점에서 몇 자 언급하고자 한다.

 

1. 장애인들은 동정심을 바라지 않는다. 장애인들이, 예를 들어 휠체어를 타고 경사로를 오르지 못하고 고생하는 경우를 본다면 일반인들은 누구나 다리가 저모양이라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불쌍하다는 감정은 불행한 사람에게 느껴지는 감정이라 장애인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장애인들은 불행하다 라고 단정지어 버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장애인들은 그런 사회적 편견아닌 편견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인과 같은 존재로써 단지 약간 불편할 뿐이라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이 인식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장애인들은 더더욱 불행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다. 동정심은 불행한 일을 겪어 마음이 사경을 헤매고 어떤 끝없는 바닥으로 추락한 사람에게나 쓰는 것이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고 있는 장애인들에게 대입해서는 안되는 감정이다.

 

2. 우리나라의 장애인의 인식수준은 선진국보다 매우 열등하다. 선진국에서는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가 눈부실 정도로 거리나 도로, 사회문화 전반에 있어서 공을 들인 흔적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수준이야 말로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와 밀접한 연관성의 고리가 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이나 시설물의 설치나 보수 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물질적인 것이나 경제적인 예산의 편성까지도 그들을 외면하게 되어 있다.

 

지난 이명박 정부당시 노무현 정권에서 장애인들에 대한 높은 예산 참여비중을 현격하게 낮춘 바 있다.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선진국에서는 보행이나 거리 신호등 조차도 장애인이 우선이며,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 조금이라도 나은 터를 제공해주려고 노력하는데 우리는 장애인들을 불쌍하다 라는 동정심에 근거하여 그들의 기본권이나 그들이 삶을 영위하는 기초적인 생활시설조차 열악함에도 그들이 조금이라도 그것에 대해 불평하면 그들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3. 위 영화에서 드문드문 보이는 장면들은 그래도 장애인의 삶의 의지가 도드라진다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상인이 할 수 없는, 할 수 없다기보다 하기 어려운 일들을 더 잘 해내며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들이 도처에서 많이 보인다.

 

그것을 혹자는 기적이라 말하지만 그것은 강인하고도 아름다운 일이다. 두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고, 발가락으로 컴퓨터 자판을 맘껏 두들기거나 이 영화와 같이 시각장애인이면서 정상인보다 더 훌륭하게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나 연주가들도 생겨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소수다. 그리고 약자다. 소수의 약자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이 정의가 아니던가? 이 나라, 한국에 정의가 많이 실종된 탓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되지 않는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적인 정의가 올바로 서야 한다. 그래야 장애인들도 떳떳하게 어엿한 한 민주국가 시민이자 국민으로써 정당한 삶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많은 기적(?)이 일어날 것이며, 국민들의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는 1.에서처럼 불쌍한 존재에서 조금 불편한 존재로 바뀔 것이다.

 

4. 우리 사회는 너무 이기적이다. 저만 잘 살면, 저 가족만 잘 살면, 그냥 자신만 배가 부르고 등 따시면 남이야 죽던말던 아무 상관없다라는 식이 되는 사회적인 모습들을 보며 우리나라의 이기주의가 너무 팽배한 현실이 매우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런 이기주의 하에서 장애인들은 더욱더 살아가기 힘들게 된다. 물론 3.에서처럼 사회적인 정의가 올바르게 서야 이기주의도 줄어들게 마련이다. 열심히 살면 그 댓가가 온다. 그리고 바르게 살면 바르게 산 아름다운 모습이 보여지게 된다. 이런 사회적인 구조가 되지 않기 때문에 각종 비리가 출몰하고 또 그것이 악순환되고 부자들에 대한 원망은 서민들의 절망과 자포자기 그리고 그것은 자신밖에 모르는 대다수의 악마만 늘어나게 하는 그야말로 악순환의 구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참정권을 잘 행사해야한다. 일반인, 장애인을 비롯하여 모든 국민들이 대다수 가진 투표권을 바르게 행사하느냐 못하느냐는 많은 파생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또 이런 이기주의 국민, 정의 없는 나라를 잉태하고야 말았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안전망은 없고 그렇다보니 장애인들은 기본권을 누릴 기초적인 삶도 되지 않으며, 쥐꼬리만한 예산들은 날름날름 파리를 도마뱀이 낚아채듯 사라지고 축소되지 않았던가?

 

왜 그런가하면 우리 사회는 민주사회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글을 쓰면서도 강한 분노를 가지게 된다. 북한만 들먹거리면서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국가의 예산을 쓰면 그게 빨갱이인가? 아니면 그 행위는 포퓰리즘인가?

 

한 칼럼니스트가 쓴 포퓰리즘에 대한 글을 인용해본다. 인터넷 기사를 링크하겠다.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33440)

 

사회적 정의가 올바르지 못하다보니 이기주의는 극도로 높아져가고 그럴수록 장애인들은 더욱 사각지대로 몰리게 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일 예를 들어볼까? 선진국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며, 극도의 뉴스회자감이었을 것이다.

 

한 공공기관 입구에 장애인을 위한 경사턱이 있었는데, 일반인들의 보행에 지장을 초래한다면서 철거해달라고 민원을 제기된 일이 있었다.

 

이게 어찌 말이나 되는가?

 

그 턱을 더욱더 경사가 낮도록 더 잘 만들어라 해도 장애인들의 휠체어는 타기 힘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턱이 정상인들의 보행에 장애가 돼서 철거?

 

이게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처우 및 인식을 대변하는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위 영화에서 장애인인 주인공이 살인모함에 빠진 경우와 별로 차이가 없어보인다고 해야할 정도가 아니던가?

 

5. 공동체 의식이 부족하다. 사회가 분열되고 화합되어 있지 않다보니 끼리끼리 문화가 성행하고 이타적인 모습과 함께 그것은 정상인과 장애인을 나누고 또 달리 대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 우리 한국의 모토는 홍익인간이다.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 조상의 진리요 조상님들의 모토였다.

 

함께 잘 살자, 단지 이것이다. 너도 나도 조상님들의 후예이고 단군의 피를 같이 타고난 같인 사람들이며, 나아가 같은 지구인들이 아니던가?

 

굳이 나누고 쪼개가 너는 내편, 너는 아닌 편, 그러므로 너는 모조건 도와야 하고 너는 무조건 나몰라야 한다는 식, 이제 그것을 버려야 한다.

 

우리 사회는 나쁜 정치인들과 나쁜 언론들로 인해 사분오열되어 있다. 각종 선거에 나오는 정치인들은 입으로만 화합을 강조하면서 뒤돌아서서는 사리사욕만 챙겨왔으며, 장애인을 비록한 사회적 약자들의 예산은 도려내면서, 괴상한 정책이나 펴거나 비리나 저질러 왔다.

 

서양철학의 아버지 플라톤은 말했다. 정치에 무관심한 댓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자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나라는 민주국가임에도 대통령제라서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하여 그가 올바른 정치를 펴지 않으면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들은 고통속의 정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떻게 보면 장애인의 인식이 달라지는 것도 언론의 몫이 크고 정치인의 몫이 매우 크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에서 예를 들어 시청률이 높은 지상파 방송에서 장애인들에 대한 프로그램이나 그들의 처우인식에 대한 계몽이나 그와 관련된 방송을 많이 한다면 당연히 국민들의 장애인의 인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언론을 쥐락펴락하는 사람들이 정치인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참여를 올바르고 똑부러지게 한다면 장애인들의 삶을 보다 낫게 할 수 있다는 평범한 계산이 나온다.

 

말로만 화합을 강조하지 않는 정치인,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누구나 잘 살 수 있는 것을 누가 잘 만들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덜 나쁜 사람에게 소중한 참정권을 행사한다면 우리 장애인들은 조금더 조금더 진일보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또 사회정의는 바로서고 사회적 약자들은 보호받으며 장애인들은 불행한 존재가 아닌 불편이 조금 있는 존재가 될 것이며, 사회적 이기주의는 줄어들고, 또 인식구조 또한 많은 개선이 이루어질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다섯가지들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존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구조가 더 심하다. 모두 다른 것들이지만 모두 같은 것들인 셈이다.

 

한 편의 감동적인 영화가 이렇게까지 언설의 형용을 낳을 수가 있었다. 비록 필자의 과제물이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영화는 새드엔딩으로 끝났지만, 우리의 삶, 장애인들의 삶은 앞으로 계속 해피엔딩으로 발전하고 개선되고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필자가 영화를 보며 느꼈던 작은 미세한 것들이 나아지는 세상을 꿈꾸며, 오늘 ‘어둠 속의 댄서’ 영화를 다른 사람들도 보면서 필자와 같은 생각을 해보기를 바란다.

 

영화가 막을 내렸들이 필자는 졸필을 줄인다.

시인, 칼럼니스트, 공인중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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