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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버금물 2009/02/20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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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넘 오버하는거 아닌가?
    한반도 신라가 중국에 있었다면 뻥까는 거 아닐까! 저런 내용을 학계가 인정해줄까? 성훈씨는 한문내용을 제대로 이해라도 할까? 그리고 여러 문헌적 비교분석이나 제대로 하면서 삼국을 논하는 것일까? 기초지식이 부족하면 고등지식도 어려운 법이다.
  • 한상훈 2009/02/2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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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긴 문무왕 묘지명에 새겨놓은 글도 안믿는 애들이니
    문무왕 묘지명에 분명히 흉노왕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새겨놓아도
    문무왕이 중국사관에 젖어서 새겨놓은 엉터리라고 우기는 인간들도 있더이다.
    세상에 아무리 중국사관이라도 묘지명에 거짓말을 적을 사람이 어딨단 말인가?
    어떠한 증거를 대놓아도 식민사관에 세뇌당한 사람들은 절대로 교화시킬수 없습니다.
    특히 40대에서 50대 60대로 갈수록 더 지독합니다.
    그들을 교화시키긴 거의 불가능합니다.
  • 선각자 2009/02/24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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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가 정말 알고 싶습니다.
    잘못 배운 역사가 몇십년이 지나도 바꾸어지지 않는 현실이 정말로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인간 식민 사학자 이병도가 잘못 뿌려 놓은 역사가 이토록 한국 고대 역사를 황폐 하게 만들었으니 ... 이를 어찌 하면 좋을지 .. 성훈 선생께서 열심히 자료를 준비 하여 글을 올리면 정말로 별별 소리가 다나오는것 같습니다. 선생께서는 그냥 한귀로 흘려 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전에 말씀을 드렸었는데 고려사에 대해서도 시간을 내 주셨으면 합니다. 정말로 귀한 자료 감사 합니다.
  • 김성겸 2009/03/10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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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당>유고의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래의 기록을 한 번 읽어보세요...
    <삼국사기>에서는 누군가가 쏙 빼버린 것으로 봅니다.
    국강상광태토경평안호태왕 비문에 나온 얘기를 곁들여서 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영락대제기>
    ● 五年乙未, 二月, 太后生子<談聦>于「溫湯」. 上, 以<卑離>漸違王化, 親征<叵山>・<冨山>・<負山>至<鹽水>, 破其部落七百余所, 獲牛馬羊豕万數. 二后亦騎馬而從上. 上, 以<吐>后有身止之, 而不聽. [歸]生女, 名以<三山>. 八月, <眞武>又乘虗入寇. 上, 以七千騎馳到<浿水>上, 虜獲八千余級. <末曷>侵<羅><悉直>. 十一月, <莘>, 欲雪<浿水>之恥, 將七千人過<漢水>至<靑木岺>, 遇大雪多凍死, 廻歸<漢城>而勞軍.
    ○ 5년{단기2728년/AD395}을미, 2월, <천강>태후가 온탕에서 아들 <담총談聦>을 낳았다. 상은 <비리卑離{弱水以東의 西扶餘?}>가 점차 왕의 가르침을 어기기에, 친히 <파산叵山>・<부산冨山{현 산서 및 섬서성 북방으로 북막의 남방에 해당}>・<부산負山>을 정벌하고 <염수鹽水{甘肅祁連山? 或合黎山附近鹽池? 或蒲昌海?}>까지 이르면서, 그들의 부락 700여 곳을 깨뜨렸고, 소・말・양・돼지를 노획한 것이 만으로 셈이 되었다. 두 후{平昜과 吐山} 역시 기마하여 상을 따랐다. 상이 <토吐>후는 임신 중이라 말렸어도 듣지 않았고, 돌아와서 딸을 낳았더니, {이 세 산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삼산三山>으로 하였다. 8월, <진무眞武>가 또 빈틈을 노려 쳐들어오니, 상이 기병 7천을 몰아서 <패수浿水{或沮水?}>위쪽{북?}에서 8천여 급을 노획하였다.{☞<삼국사기>에는 4년 기사로 되어있음} <말갈末曷>이 <신라羅>의 <실직悉直>을 침입하였다.
    11월, <아신莘>이 <패수浿水>에서의 수치를 설욕하려고 7천병으로 <한수漢水; 長江支流漢水? 黃河?}>를 건너서 <청목령靑木岺>에 이르렀다가, 큰 눈을 만나서 많은 이가 얼어 죽었더니, 군사를 돌려 <한성漢城{漢山城? 長江中流 漢陽府漢山城?}>으로 돌아가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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