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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68) ; 머나먼 헤이그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7/11/01 [12:09]

대한정통사(68) ; 머나먼 헤이그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7/11/01 [12:09]

 헤이그밀사

 

 

1. 어수당(魚水堂)의 밀약(密約)

 

4240년(서1907) 3월 중순 어느날, 광무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궁녀 박상궁이 ‘비밀리에 알현하라’는 칙명을 이 준에게 전해 왔다. 박상궁은 황제 측근에 남아 있던 몇 안되는 충신들 중의 한 명이었다. 이 준은 3월 24일 밤 비밀리에 박상궁을 따라서, 창덕궁 동문인 건양문을 지나 황제가 기다리는 어수당에서, 처음으로 황제와 마주하여 단 두 사람만의 밀담을 주고 받았다. 황제는 이 준과 같은 조상(태조 이 성계의 형인 '완풍대군:完豊大君')의 피를 나눈 일가친척임을 강조하며, 이 준이 그간 해 온 애국적 활동을 높이 치하했다.

 

황제는 이 용익과 서 정순 등으로부터 이 준의 활동과 역량을 들어서 잘 알고 있다고 격려하며, 그동안 중한 직책을 내리지 않은 것은 이 준이 재야인사로서 바깥쪽에서 조정의 부패한 무리들을 성토해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는 더욱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어서 황제는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가 또 연기되지는 않을 것인지에 대하여 묻고, 다시 여러가지 궁금했던 일들에 대해 이 준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특히 먼저 떠난 이 상설과의 연락 관계 등을 상세히 물으며 대사의 준비여부를 확인하고자 했는데, 그에 대하여 이 준은 자신의 계획에 대하여 설명했다.

 

전 러시아공사 이 범진의 아들 이 위종이 통역을 맡게 될 것이라는 보고를 이미 받은 바 있는 황제는, 이 준의 의견에 따라서 ‘이 위종을 특파 밀사로 임명하는 친임장을 수여하실 뜻임’을 밝혔다. 그리고 헐버트를 특파밀사로 미국에 파견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숙의한 후에 파견하기로 결정지었다.

 

이 준도 또한 미국대통령과 러시아황제와 독일황제와 오스트리아황제에게 전할 황제의 친서를 받들고 가려 했으므로 그를 승인했고, ‘만국평화회의에도 친서를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와 같이 이 준의 신중한 의견에 대해서 황제는 모두 찬성하고, 이 준 자신이 친서의 내용을 작성해서 박상궁을 통하여 황제에게 가져올 수 있도록 일렀다.

 

황제는 밀사 활동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거사자금도 충분히 마련해 주고, 이 준의 계획이 매우 용이주도함을 확인하고는 매우 기뻐하며, 국제정세 등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견을 나눴다. 그리고는 이 준이 호주가임을 익히 들어서 잘 아는 황제는 친히 술을 권하며, ‘일찍이 효종께서 송 시열과 이 완 같은 훌륭한 보필을 얻어서 임금과 신하 사이에 믿고 지내시기를 한 식구처럼 하셨다’는 옛 일을 들어 애기하며, 충신들과 나라의 큰 일을 허심탄회하게 의논할 수 있음을 몹시 즐거워 했다.

 

이 준은 그처럼 어질면서도 뜻이 크신 황제께서 간악한 일제와 친일파매국노 도당들에 의하여 항상 감시와 암살의 위협하에 계시면서도, 자신의 편안함을 돌보지 않으시고 오로지 나라의 앞날 만을 걱정하시는 것을 다시 확인한 데 대한 감격과 일제의 횡포에 대한 통분이 겹쳐서 눈물이 쏟아질 듯 하였다. 이 준이 황제께 충성을 다해 밀행을 성사시킬 것을 다짐하니, 황제는 그의 뜻을 더욱 갸륵히 여겨 충신 정 몽주에 비교하며 칭찬했다. 그러자 이 준은,

 

“소신이 어찌 정 몽주선생을 따를 수 있겠사옵니까마는 일찍이 맹자를 배운 덕에 피장부아장부(彼丈夫我丈夫)라는 귀절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라고 아뢰었으니,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임 경업장군의 다음과 같은 싯귀절에서 따 온 것이었다.

 

‘삼척용검만권서 황천생아의하여 산동재상산서장 피장부혜아장부 (三尺龍劒萬券書 皇天生我意何如 山東宰相山西將 彼丈夫兮我丈夫)

: 삼척의 용검과 만권서를 배웠으니, 황천이 나를 낳으신 뜻이 어떠한고, 산동의 재상이나 산서의 장수가 무엇인가, 저들이 장부면 나도 장부이다’

 

그러한 이 준의 뜻을 모를 리 없는 박학다식한 황제는 장부다운 기개를 토로하는 이 준이 더욱 미더워져서 국가대사에 관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이윽고 밀정들의 감시망을 피해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닥치자 황제는 아쉬워하며 밀행을 무사히 성공하도록 거듭 격려했다. 마침내 이 준이 어전을 물러나오면서 마지막으로 ‘내부의 적인 간신배들과 매국노들을 조속히 숙청하시고 기강을 하루빨리 바로 잡으시도록’ 간언을 올리자 황제는,

 

“오늘 짐은 참으로 금석(金石)같은 말을 경으로부터 많이 들었소. 옛날 하우씨(夏禹氏)는 창언(昌言)을 듣고서 절을 했다고 하니, 오늘 밤에는 짐이 경에게 절을 해야 할 것 같소.”

 

하고 다시 한 번 기뻐하며,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건강한 몸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고 재차 신신당부했다.

 

이 준은 어전을 물러나와 박상궁이 인도하는 비밀통로를 통해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반드시 이 어지신 황제를 목숨을 바쳐서라도 잘 보필하여 태평성세를 이룩하리라고 굳게 다짐하였다. 이 준은 이 때 이미 만일 만국평화회의에서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게 되면 살아서 돌아오지는 않으리라는 굳은 결심을 했으며, 돌아 올 기약도 없는 이역만리 헤이그로 떠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진행해 갔다.

 

2. 머나먼 헤이그

 

4월 20일, 헤이그로 떠나가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이 준에게 마침내 애타게 기다리던 황제의 밀조(密詔)가 전달되었다. 이중삼중으로 감시당하고 있던 궁중으로부터 시종 이 종호와 박상궁이 비밀리에 빠져 나와서 안국동에 있는 이 준의 자택으로 전달해주었던 것이다. 밀조를 받은 이 준은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일체 금하고는, 예복을 엄숙히 차려입은 후 청결한 상위에 붉은 보를 깔고 황제폐하가 계신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을 올리고서 조심스럽게 밀조를 받들었으니, 밀조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짐이 경을 굳게 믿고 만리 해외에 보내는 것은 우리나라의 사직을 평안하게 하고 우리 국민들을 구제하고자 함이니, 고통에 빠진 우리나라의 실정을 세계만방에 알려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바, 경은 이 점을 깊이 양해하여 성취하기 바라노라.”

 

밀조와 함께 광무황제의 수결(手決) 및 황제어새가 찍힌 친임장과, 미국·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네델란드 등에 보내는 친서들과,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공고사(控告詞)와 만국평화회의에 보내시는 친서 등을 전해 받은 이 준은, 지체없이 대한매일신보사장 배설(벳셀)과 미국인 교사 헐버트를 찾아가서 내탕금의 일부를 공작비로 지급하고 미국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를 헐버트에게 전하여 일의 성공을 기약하였다.

 

밀행에 쓰일 내탕금은 제실회계심사국장인 박 용화가 비밀리에 마련했으나,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여 모든 준비를 비밀리에 진행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이었으므로 그 사실은 오직 광무황제와 박 용화 두 사람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 준 자신도 일체의 송별연 같은 것을 생략하고 비밀리에 출국하고자 하였으나, 돌아올 기약도 없는 길을 떠나 가는 이 준을 위하여 일찍이 국권회복운동에 생사고락을 함께 하기로 맹약했던 동지들 몇 명만 이 종호의 집에 비밀리에 모여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그 자리에는 황제 측근의 시종이자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인 이 종호는 물론이고 안 창호·이 갑·이 도재·서 정순·박상궁·배설·헐버트 등이 참석했다. 동지들과 오랜만에 많은 대화를 나눈 이 준은 자신의 심정을 몇 줄의 싯귀로 표현하였다.

 

“사해영무일 일가하환우 평생오배사 독립자유구 (四海寧無日 一家何患憂 平生吾輩事 獨立自由求)”

 

‘사해가 평안할 날이 없으니 한 집안을 어찌 근심하리, 평생 우리들의 일은 독립과 자유를 구할 뿐’이라는 뜻

 

동지들과의 마지막 회합을 마친 후 이 준은 정동예배당에서 일을 보고 있던 애국청년 김 구를 찾아가 만나서 국가대사를 함께 의논한 후 돌아왔다.

 

거사를 위한 모든 준비를 끝낸 이 준은 4월 22일 아침에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집을 나서서 부산행 기차를 탔다. 부산에서 며칠간 머물며 출항을 기다린 후 블라디보스톡 행 기선을 탄 그는 도착하자마자 한 여관에 여장을 풀고 용정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 상설에게 지급전보를 쳤다. 연락을 받은 이 상설은 대단히 반가와하면서 즉시 떠날 준비를 마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두 밀사는 향후의 거사에 대하여 만반의 대책을 논의한 후 동지들이 마련해 준 송별연에 참석하였다. 송별연에서 이 준은 옛 전국시대의 협객 형가의 싯귀절을 읊으며 감회에 잠겼다.

 

“秋風蕭蕭兮여 易水寒이로다 壯士一去兮여 不復還이로다

(추풍수수혜 이수한 장사일거혜 불복환)

 

[가을바람이 쓸쓸함이여 이수의 물도 차도다, 장사가 한 번 감이여 다시 돌아오지 않도다]

형가의 싯귀절을 읊조리던 그는 곧 이어 자신이 즉흥적으로 싯귀절을 지어 읊었다.

 

“풍설동상아사후 수장미주곡청산 (風雪凍霜我死後 誰將美酒哭靑山)”

 

- 눈바람과 찬서리속에 내가 죽은 후에, 그 누가 향기로운 술을 들고 (나의 무덤에 찾아와) 청산에서 울어 주리 -

 

마치 자신의 앞 날을 예언하듯한 비장한 싯귀를 읊조리던 이 준이 격정에 휩싸여 주먹으로 옆에 있던 등의자를 내려치자, 의자의 가운데가 부서져버리고 말았다. 송별연 후 두 밀사는 이만여리 멀리 떨어진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두 밀사는 러시아주재공사였던 이 범진을 찾아서 감회를 나누고, 이 범진의 아들 이 위종을 밀사로 친히 임명하신 황제의 친임장을 전달하였다.

 

그들은 우선 러시아황제를 만나기로 하여 전임 주한 러시아공사였던 웨베르를 만나서 광무황제의 친서를 러시아황제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절차를 밟을 수 있게 해 주선해 주기를 부탁하였고, 세 밀사와 이 범진은 웨베르의 주선으로 며칠 후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광무황제의 친서를 본 니콜라이 2세는 밀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러시아가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하였고, 이미 헤이그에 파견한 러시아대표 넬리도프(A.Nelidov)백작에게도 대한국의 밀사들을 잘 소개해서 상호 긴밀하게 협조하도록 지시하겠다는 약속까지 해 주었다. 밀사들은 니콜라이 2세의 친절과 호의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 물러나왔으며, 며칠 후에는 러시아황제의 친서를 전달받고 헤이그로 향하였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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