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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사, 사료적으로 호국의 수도 북경은 어디에 있었는가?

소산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12/14 [17:43]

대조선사, 사료적으로 호국의 수도 북경은 어디에 있었는가?

소산 칼럼니스트 | 입력 : 2017/12/14 [17:43]

-조선왕조실록, 조선 2대황제 정종 때 평안도 평산도호부에 북경을 새로 건축했다고 기록

-연경을 수도로 삼았다는 호(. 실록과 사서에는 서구오랑캐들을 총칭해 호로 기록. 한국사는 이런 호를 대제국 청으로 기록. 그리고 조선은 속국)나라의 북경일대는 17~18세기에 '연속적 대지진, 대홍수로 폐허'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소산] 우리는 조상들이 항상 당쟁당파와 모함으로 비참(悲慘)하고 지지리 못난 조상때문에 가난(家難=가족이 뿔뿔히 흩어져 생사를 알 수 없을때. 국난을 연상시키면 이해가 갈 것임.  속담, '가난은 임금도 구제 못한다'. 진실은 빈한貧寒으로 써야 함)하게 못 살았고, 조선朝鮮이 망한 후, 일제에 의해 근대화(近代化)가 되면서 이만큼 살게 되었다고 교육을 받아 왔다. 이러한 것이 공교육公敎育이었고, 그 결과 헬-조선(Hell-朝鮮)이 만연되고 있다.

 

▲ 19세기 제작된 大清帝國城市印象銅板畫(대청제국성시인상동판. 1800년대 후기에 역사를 조작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나, 조선의 연경과 북경성의 위용은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조선의 연경燕京이자 북경성. 훗날 청의 수도가 되었다.  연경燕京인 북경성 서직문외(西直門外).     © 소산 칼럼

 

 

▲ 연경성의 동문인 조양문. 대조선의 상징인 패루가 양 옆으로 있고, 그 사이는 사신단 일행이 들어서고 있다.     © 소산 칼럼

 

 

 

태고 적부터 이어진 대조선의 진실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유사사학자요 사이비사학자인 식민반도사관론자들이 발악을 하고 있다. 그럼 사료적으로 연경의 북경은 어디에 있었고 어떻게 변화 되었는지 살피겠습니다.

 

왜 연경이라 했는가? 사서(史書)에 기록된 연경(燕京)이란 지역의 연혁(沿革), 고양씨(高陽氏) 전욱(顓頊. 옥황상제)의 유릉(幽陵)이며, 도당(陶唐)의 유도(幽都), ()에서는 유주(幽州), () 임금 때 유주와 병주(幷州), 나라는 소공(召公)을 봉()하고 연()이라고 하였다.

 

()나라는 연왕(燕王)을 봉했고, ()나라에서는 상곡(上谷(), ()나라는 범양(范陽), ()나라는 남경(南京) 석진부(析津府), ()은 연산부(燕山府), []나라는 연경(燕京성도(聖都중도(中都), []은 대도(大都중도(中都), 대조선은 북평부(北平府순천부(順天府연저(燕邸연경(燕京)이라고 하였다.

 

연경의 북경(北京), 이렇듯 유구(悠久)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현 중공의 얼굴이요 상징이 북경의 자금성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왜 그 웅장(雄壯)하고 찬란한 궁궐의 성곽(城郭)과 전각(殿閣)들을 폭파하고 불태워 없애 버렸을까?

 

 

▲ 1860년 연경인 북경을 침략한 영국군. 결국 북경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에 의해 폭파되고 불태워졌다.     © 소산 칼럼

 

 

▲ ▲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폭파되기 전 북경사진. 영국군이 대조선의 유적지를 폭파하고 불태우기 전의 최초의 사진이다. 영국 데일리메일 신문은 2013년 4월 23일 ‘중국의 첫 번째 사진’ 제목으로 1860년 촬영된 ‘제국 북경의 이미지는 운명의 여름의 궁전을 엿볼 수 있는 배경과 도시를 보여준다’로 보도기사를 장식했다.     © 소산 칼럼

 

조선은 임금의 계절용 별장인 북경·남경·동경·서경·중경(외국 사신용도. 중경 안에 태화관 등이 있음)·상경(한성의 별칭) 등 6경이 있었다. 궁궐은 법궁이자 정궁인 경복궁을 비롯해 경희궁·경운궁·운현궁·자궁(자미궁)·건청궁·곤녕궁·창경궁·창덕궁 등 9개의 궁성이 있었다.

▲ 신문은 “사진 작가 Felice Beato가 1860 년에 찍은 이 이미지는 중국 최초의 사진 중 하나로 여겨지고, 영국 군인들이 북경을 파괴하기 전에 옛 제국의 이화원의 사진만 찍힌다. 앵글로 - 이탈리아 카메라맨은 영국 군대에 자신을 넣고 여행을 문서화했다. 소더비는 다음 달 런던에서 20만 파운드에 Beato의 사진 18 점을 경매에 내놓을 예정이다”고 부제목을 달았다. 이하 기사 내용     © 소산 칼럼

 

 

▲ 150 년 이상 전에 촬영 된 희귀 사진은 중국에서 촬영 된 최초의 사진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베이징이 베이징을 하늘 조각기 이전에 베이징으로 알려졌을 때, 사진은 앵글로 이탈리아 사진 작가 펠리스 베아토 (Felice Beato)가 찍은 사진이었고, 도시의 최초 파노라마를 포함합니다. 이 컬렉션에는 1860 년 영국군에 의해 화재로 파괴되기 이전의 옛 제국의 여름 궁전에 대한 유일한 알려진 사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소산 칼럼

 

이 컬렉션에는 옛 Imperial Summer Palace가 태워지기 직전에 찍은 사진과 Great Llama Temple의 관문 인 사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150 년 이상 전에 촬영 된 희귀 사진은 중국에서 촬영 된 최초의 사진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베이징이 베이징을 하늘 조각기 이전에 베이징으로 알려졌을 때, 사진은 앵글로 이탈리아 사진 작가 펠리스 베아토 (Felice Beato)가 찍은 사진이었고, 도시의 최초 파노라마를 포함합니다. 이 컬렉션에는 1860 년 영국군에 의해 화재 파괴되기 이전의 옛 제국의 여름 궁전에 대한 유일한 알려진 사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소산 칼럼

 

 

Beato 씨는 1857 년 중국 군대와 합류하여 중국으로 여행하기 전 당시에 이 나라의 폭동 사태(태평천국의 난. 동학혁명)를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그는 전국의 풍경과 역사적인 건축물뿐만 아니라 군대(영국군,프랑스군)와 함께 일상을 사로 잡았습니다. 베이징을 방문한 최초의 사진작가라고 생각한 비토 (Beato)는 남 게이트에서 여섯 번을 촬영하여 자금성으로 향했습니다. 이 도시는 처음으로 도시의 파노라마가 되었습니다.

 

베토 (Beato)는 또한 중국 황제가 소유 한 사유지의 일부인 옛 제국의 이화원 (Imperial Summer Palace)을 촬영했으며, 불과 몇일 전에 영국군과 프랑스 군대에 의해 타격을 받았습니다. 컬렉션의 다른 사진으로는 Pehtang, North Taku Fort, Peking Imperial Winter Palace 근처 무덤이 있습니다. Beato의 역사적인 건물과 건축물에 대한 이미지는 존재하는 유일한 것 중 하나입니다.

 

▲ 이화원 입구     © 소산 칼럼

 

 

▲ 황후 무덤.     © 소산 칼럼

 

 

▲ Peh-Tang에 있는 남쪽 타쿠 요새를 보여주고 있으며, 영국군과 프랑스군에 의해 북경은 폭파되고 불태워 졌다.     © 소산 칼럼

 

 

▲ 북경을 폭파한 후 신도시로 건설되는 사진으로 추정.     © 소산 칼럼

 

 먼저 연경의 북경을 알려면 통주와 통주강을 알아야 하는데, 실록과 사료의 기록을 살피겠습니다.

 

인조 22년 갑신(1644,순치 1. 1636년 병자호란 발발 8년 후)

-세자가 금군 홍계립을 보내어 자신의 주변 상황을 수서로 치계하다

 

“~27일에는 영평부(永平府) 난하(灤河)의 하류인 난주(灤州)의 남쪽에서 묵었고, 28일에는 개평위(開平衛)의 성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도착하였고, 29일에는 옥전현(玉田縣) 앞에 도착하였으며, 30일에는 계주(薊州)의 남쪽으로 20리쯤 되는 지역에 도착하여 묵었습니다. 51일에는 통주강(通州江)의 얕은 여울을 건너 저녁에 통주의 서쪽으로 20리쯤 되는 지역에 이르러 묵었습니다. 하루 평균 행군이 12030리 정도가 됩니다....중략

 

선조 27년 갑오(159492일 정축. 1592년 임진왜란 발발 2년 후), 접대 도감이 유 총병의 차관 나사괴 등을 만나 논의한 내용을 아뢰다.

 

유 총병(劉總兵)의 차관(差官) 나사괴(羅四魁서의(徐義) 등에게 역관(譯官)을 시켜서 재삼 도감에 초청하였는데도 끝내 오려고 하지 않으므로 어둘 무렵에 도감 낭청 이철(李鐵)로 하여금 그들의 하처(下處)에 나아가 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말하기를 우리가 며칠 전 영남(嶺南)에서 장상공(張相公) 대신(待臣)을 배종하고 통주강(通州江)까지 갔다가 돌아왔는데, 소문을 들으니 준봉(準封준공(準貢) 등의 일에 대해 조정의 의논이 아직 귀일되지 않았다고 한다. 과도관(科道官)은 모두 왜구들에 봉작(封爵)을 허락하는 것은 괜찮지만 조공을 허락하는 것은 불가하다. 만약 조공을 허락한다면 영파(寧波. 중공 절강성 동북부 해안에 위치한 무역거점 항구도시)의 길을 경유해야 하는데 그간의 사정을 모두 엿보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므로 흉모(兇謀. 끝없이 중상모략을 하여 착한이들과 의로운 사람들을 죽임)를 헤아릴 길이 없을 것이니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예부(禮部)의 나상서(羅尙書)의 뜻도 또한 그러하였다. 여러 과() 중에서 남경(南京) 과도관의 논의가 가장 준열(峻烈)하였다. 당초에 송야(宋爺.송응창이야(李爺. 이여송)가 모두 웅천(熊川제포(薺浦가덕(加德가리포(加里浦거제(巨濟) 등지를 왜적(倭賊)의 경지(境地)라고 하고 왜적이 이미 바다를 건너서 그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중략

 

주석: 임진년 반란인 임진왜란은 서구와 해적질하던 왜구들이 국가로 인정해 달라고 했지만 조선에선 봉작은 괜찮지만 국가로서 조공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었고, 그 연유는 서구와 왜구들이 끝없이 중상모략을 하여 착한 이들과 의로운 사람들을 죽인다고 기록했다는 점이다.

 

▲ 19세기에 제작된 大清帝國城市印象銅板畫(대청제국성시인상동판). 청(淸) 황궁의 오문(午門) 대열병(大閱兵) 동판화.     © 소산 칼럼

 

 

 

▲ 이 동판화의 원본은 영국 왕실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책으로도 출판되어 있으며, 중공의 몇몇 인터넷 사이트에도 올라와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 소산 칼럼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하권

 

-상 하 2. 상권은 서울부터 연경까지, 하권은 연경서 귀국시까지, 리의현(李宜顯)1720(숙종 46) 동지사 겸 정조성절진하(冬至使兼正朝聖節進賀)의 정사로 부사 이교악(李喬岳), 서장관 조영세(趙榮世)와 함께 청나라에 다녀와서 기록한 것으로 리의현의 문집 도곡집에 기록.

 

출발 후 서울로부터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23일이 걸렸다. 머문 날까지 모두 계산한 것이다. 아래도 같다. 압록강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 32일이 걸렸고, 북경에 42일 동안 머물렀다.

 

돌아올 때에는 북경에서 압록강까지 28일이 걸리고, 의주에서 서울까지 13일이 걸렸다. 왕복한 것이 도합 138일이요, 이역(異域)에 있었던 것이 101일이다. 이수(里數)로는 왕복을 모두 계산하여 대략 6000여 리가 되고 지은 시가 392수이다.

 

압록강을 건넌 후에 이틀을 노숙하고, 책문(柵門)에 들어간 뒤에야 비로소 참()에서 잤다. 그 참은 모두 30개인데 각 참마다 각각 찰원(察院) 하나씩을 설치하였으니 우리나라(대조선의 중국) 사신을 거처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원(柔遠) 등의 관명(館名)을 붙였던 것이다. 30참이란 봉황성(鳳凰城), 송참(松站), 통원보(通遠堡), 연산관(連山關), 첨수참(甛水站), 낭자산(狼子山), 요동(遼東), 십리보(十里堡), 심양(瀋陽), 변성(邊城), 주류하(周流河), 백기보(白旗堡), 이도정(二道井), 소흑산(小黑山), 광녕(廣寧), 십삼산(十三山), 소릉하(小凌河), 고교보(高橋堡), 영원위(寧遠衛), 동관역(東關驛), 양수하(兩水河), 산해관(山海關), 무령현(撫寧縣), 영평부(永平府), 사하역(沙河驛), 풍윤현(豐潤縣), 옥전현(玉田縣), 계주(薊州), 삼하현(三河縣), 통주(通州)이다....중략

 

▲ 한서역제국도(漢西域諸國圖)     © 소산 칼럼

 

 

주석: 부연일기(赴燕日記)/역람제처(歷覽諸處)/통주강(通州江) 기록엔, “통주강은 곧 백하(白河. 한수(漢水)의 지류)이다. 강이 통주의 동성(東城)을 싸고돌아 북으로 흘러 연도(燕都)와 통구(通溝)가 되고, 이어 서산(西山)에 이른다....”

 

▲ 한서역제국도(漢西域諸國圖)를 바탕으로 연산도를 보면 현재의 난하가 요하로 그려져 있다. 즉 원래 영평부는 지금 난하의 서쪽에 있었다. 그 근처를 조선은 현도군과 평주로 했고, 그 근처가 바로 대조선의 평안도 평산도호부이고 북경이 있었다.     © 소산 칼럼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1권 황해도(黃海道),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 원래 고구려의 대곡군(大谷郡)이다. 다지홀(多知忽)이라고도 하였다. 살펴보건대, () 나라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에 두 외부(外部)를 두었는데, 조선의 옛 지역인 평나(平那) 및 현도군(玄菟郡)으로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를 삼았다. 지금 부()의 동쪽 우봉현의 성거산(聖居山)이 바로 옛날의 평나산(平那山)이니, 고을 이름이 그래서 얻어진 것이다. 아마도 부()는 한 나라 때 도독부인 것 같다. 신라에서는 영풍군(永豐郡)으로 고쳤으며 고려조 초기에 평주(平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때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고 현종(顯宗) 때에 지주사(知州事)로 하였다. 원종(元宗) 때에 복흥군(復興郡)에 합병하였다가 충렬왕(忠烈王) 때에 다시 예전대로 하였다. 본조 태종 13년에 전례에 의하여 지금 이름(평산)으로 고치고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 통주강(通州江)은 일명 노하(潞河)라고 하고, 속칭 외하(外河)라고도 한다. 수원(水源)이 멀고 흐름이 빠른데 모래 웅덩이가 많다. 여름이나 가을만 되면 폭우가 내려 터지기가 가장 쉽고 또 조금만 가물어도 얕아져서 배 다니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얕은 여울 50여 곳을 파냈다. 이것이 곧 천하의 항로(航路)이다. 통주라는 이름도 이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한다....”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 조그만 개천으로서 하()라는 이름을 가진 것도 역시 곳곳에 있는데, 옛날에 이른바 북쪽 지방에 흐르는 물의 총칭이라 한 것이 사실이다. 백하와 요하가 가장 커서 거의 우리나라(조선의) 임진강과 같고, 그 나머지 10개 물은 저탄(猪灘. 황해도 평산(平山)의 저탄(猪灘))만 하였다....“

 

주석: 通州江(통주강)은 북쪽에서 흘러 강바닥이 막힌 곳이 많아서 수량부족으로 배가 다니기 어려웠고, 인조실록 22(1644) 5233번째기사를 보면 배 없이 건널 정도였는데, 庚子燕行雜識(경자연행잡지, 1720)의 통주강은 조선에서 대강으로 불리는 臨津江(임진강)처럼 커졌다. 이것은 통주강의 얕은 여울 50여 곳을 파냈다고 물이 생기지 않으므로 한수, 압록수 등 큰 강줄기가 합치도록 하여 거대한 통주강이 되었기에 임진강처럼 거대한 강이 되었다고 판단된다.

 

숙종 8, 5(16791128(기미) 2번째기사.

중략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국역은 중국이라 해놨음)의 사정은 사신(使臣)이 들은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마는, 지진으로 집이 무너지고 인민이 깔려 죽은 일은 그가 눈으로 직접 본 것입니다. 깔려서 죽은 사람이 57천에 이르며, 아직 조사해 내지 못한 사람도 얼마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

 

숙종 8, 5(16791129(경신) 3번째기사.

 

중략... “통주(通州계주(등은 완전한 집이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통주는 물화(物貨)가 집결되고 인물이 매우 많은 곳인데도 지금은 성첩(城堞)이나 성문(城門)이 하나도 완전한 곳이 없고 좌우의 줄행랑도 모두 무너져서, 허물어진 성벽은 보기에도 참담하였습니다. 북경(北京)은 통주에 비해 조금 성하기는 하나 성문과 성가퀴 및 성 안팎의 인가(人家)가 많이 붕괴되어 있고, 궁전의 대문 한 곳 및 층루, 그리고 봉선전(奉先殿)도 무너졌으며, 옥하관(玉河館) 담장과 여러 아문(衙門)도 무너진 데가 많았습니다....”

 

숙종 13, 8(1682124(임신) 1번째기사.

사은정사(謝恩正使) 창성군(昌城君) 이필(李佖副使) 윤계(尹堦書狀官) 이삼석(李三錫)이 청국(淸國)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그곳의 소식을 물으니, 윤계가 말하기를,

 

그 나라에는 변이(變異)가 많은데, 지진(地震)이 특별히 심하여 성곽(城郭궁실(宮室)이 무너지기까지 하였고, 다섯 용()이 바다 가운데에서 싸웠습니다.”

 

주석: 1682년 풍운(風雲)의 조화를 다스리는 신적 존재인 용()이 한마리도 아니고 다섯마리가 싸웠다는 것은 바닷가에서 막을 수 없는 대재앙이 일어나고 있다는 표현이다

 

영조 28, 6(1730 경술 113(무진) 2번째기사.

 

중략...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이번 그곳의 지진(地震)은 옛날에 없었던 것으로, 성안의 인가(人家)가 무너진 것이 거의 4만에 이르렀다 합니다. 우리 나라는 저들 나라와 분야(分野)가 같기 때문에 재이(災異)도 매양 서로 비슷하게 되니, 이 점이 염려스럽습니다.”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청국의) 왕으로서 지진을 피하여 배를 띄워 막을 치고 거처한다 하니, 거조(擧措)가 해괴하다 하겠다. 방금 그곳의 재이(災異)를 말하고 있으나, 어제 김유경(金有慶)의 상소를 보니, 이것도 또한 재이이다...”

 

영조 8, 6(1730 경술 /1117(임오) 2번째기사.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 바깥도 또한 그러했다 하더냐?”하니, 정우량이 말하기를, “성 바깥도 또한 그러했으며, 원명(圓明창춘(敞春) 등의 궁궐도 수없이 무너지고 또 관동(關東)에는 큰 비가 내려 수천 리가 잠겼다 합니다.”

 

영조 29, 7(1731 신해 / 청 옹정(雍正) 9) 41(계사) 3번째기사.

 

“20일 정오에 갑자기 큰 풍우(風雨)가 닥치는 듯 앉아 있는 의자가 흔들리므로 급히 나와 면했습니다. 그날 지진으로 사망한 자가 2만여 명이라 하였고, 상명(常明)의 말을 듣건대 호황(胡皇)은 배를 타고 장막에 거처하여 붕압(崩壓)을 피했으며, 또 태화전(太和殿)은 밝게 서 있었지만 역시 모두 무너졌습니다....”

 

▲ 연경 북경성의 태화전 그림     © 소산 칼럼

 

 

▲ 현재 북경 자금성의 태화전 사진     © 소산 칼럼

 

 주석: 1731년 연경의 北京(북경) 紫禁城(자금성) 太和殿(태화전)은 모두 무너졌다. 그러나 지금은 북경에 자금성과 태화전을 지어놓고 역사조작의 표시로 관광상품화 해 인류를 세뇌시키고 있다. 지명과 건축물을 거짓으로 지어 조작시켰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불과 100여년 전의 역사도 식민반도사인 한국사, 역사교과서 등으로 세뇌시켜 까맣게 모르고 있다. 실록과 사서대로 역사를 알리지도 가르치지도 않는 한국사. 그러니 헬 조선이 난무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현재 북경과 자금성은 1920년대 평산에서 지명이동시켜 시멘트로 지어 놓은 허구의 건축물이라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생생한 사실의 기록(記錄)과 역사사료(歷史史料)들을 통하여, 일만년의 유구(悠久)한 역사를 자랑하며, 대륙에서의 위대(偉大)하고 웅대(雄大)한 대조선사(大朝鮮史)가 현 반도(半島)로 이동 이식되어, 조작 · 왜곡 · 축소, 변조(變造)되는 과정의 일면(一面)이 확연(確然)히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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