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정통사(71)-미주와 연해주에 뿌려진 자주독립 비원(悲願)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1/09 [13:13]

대한정통사(71)-미주와 연해주에 뿌려진 자주독립 비원(悲願)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1/09 [13:13]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 안재세]  이 상설은 7월 25일경에 이 위종과 함께 헤이그를 떠나서 당대의 최강대국이던 영국을 방문하는 것을 시초로 구미각국에 대한 순방외교에 나섰다. 실상 이미 두차례에 걸쳐 영일동맹을 맺으면서 ‘굳건한 국제적 우의’를 다진 바 있는 영국의 실권자들이 무슨 뾰족한 대책이나 협조방안을 제시해 줄 리는 만무했지만, 일부 양심적인 영국국민들로부터는 그들과 대한국의 비극적인 처지에 대하여 크게 동정을 받았고, 학사원에서는 명예학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것보다는 영국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을 수 없었던 두 밀사는 다음 순서로 미국의 양심에 호소하기로 하여 곧 다음 행선지를 뉴욕으로 정했다.

 

▲ 1909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국민회 제1회 이사회 기념사진. 오른쪽뿌터 최정익회장, 이상설, 허재정, 정재관 총회장이고, 뒷줄 오른쪽 첫번째가 송종익이다     © 편집부

 

  대서양을 건너는 긴 항해 끝에 그 해 8월 1일 뉴욕에 도착한 밀사들은 곧바로 루즈벨트대통령을 만나기 위하여 워싱턴으로 향했다. 그러나 미국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정책에 오히려 협조적이었으므로 루즈벨트와의 공식적 면담은 이루어질 수 없었으나, 루즈벨트는 헤이그에서의 비극이 워싱턴에서 재연될 경우에 발생할 지도 모를 국제적인 비난을 우려했던지 비공식적인 면담만은 이루어졌다. 제국주의적 뒷거래의 명수인 루즈벨트 자신의 작품이기도 했던 태프트-가쓰라 밀약에 대해서 알 턱이 없던 밀사들은, 그 자리에서도 미국과의 수호조약 등을 들어서 미국의 협조가 절실함을 열렬히 주장했지만 다만 애매모호하고도 지극히 외교적인 답변만을 듣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1910년 미국에서 조직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 편집부

 

  9월 초로 예정되어 있던 이 준 열사의 정식 장례식을 치루기 위해서 다시 헤이그로 돌아 갔던 밀사들은,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곧 다시 헤이그를 떠나서 이번에는 프랑스로 향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세력이 남진하는 것을 영국,미국과 마찬가지로 원치 않고 있던 프랑스정치가들도 표면적인 동정심을 나타내 보여 주는 이외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어 주지를 못했다. 그들은 인도차이나에서의 식민지기득권 확보를 위해서 언제든지 일본과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자유,평등,박애를 내 걸고 뒷 전으로는 제국주의적 침략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프랑스 정치가들의 애매한 태도에 실망한 밀사들은 이번에는 독일로 향했다. 프랑스대혁명의 찬란한 구호는 약소국가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뼈속 깊이 되새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독일항제 빌헬름 2세     © 편집부

 

  독일도 뒤늦게 선진(?)열강들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서 제국주의적 확장을 꾀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영국·미국·프랑스 등의 열강이 일제에 대하여 극히 협조적인 데 비해서 당시의 독일은 그나마 일제와 적극적인 야합을 하고 있지는 않았던만큼 밀사들의 기대도 컸다. 독일황제 빌헬름 2세는 구미 각국의 지도자들로부터는 푸대접만을 받은 밀사들을 각별히 예우하였고, 황제 자신이 애용하던 권총 한 자루를 우호의 표시로 선사했다. 이미 산동반도 지역에서 동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던 독일로서는 국제정세의 변동이 야기될 경우 대한국에 대한 독일의 발언권을 우선적으로 보장받으려는 장기적 포석이었으리라.

 

  여하튼 밀사들은 그러한 빌헬름 2세의 예기치 못했던 환대에 적지않은 기대를 걸게 되었으며, 그것은 차후에 그대로 광무황제에게도 전파되어 독일에 대한 광무황제의 기대는 대단히 커지게 되었던 것이다. 밀사들은 그 후에도 쉴사이 없이 이태리를 순방하고 다시 러시아를 순방하였으며 영국에도 다시 들르는 등 종횡무진 외교적 노력을 다하였으나 큰 성과는 처음부터 기대하기 힘든 것이었고, 다음 해인 4241년(서1908) 2월에는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다시 건너 가서 약 1년여간 머물며 잠시도 쉴 사이 없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활동했다.

 

  특히 이미 루즈벨트와의 면담에서 미국정부의 협조를 얻을 수 없음을 간파하게 된 이 상설은, 한편으로는 미국인들에게 자주독립을 위한 호소를 계속하면서, 한편으로는 미국에 있는 대한국의 교포들을 결속시켜서 단일화된 독립운동단체를 구성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이 상설은 문자그대로의 ‘해외독립운동’ 터전을 미국에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4236년(서1903)초에 하와이 이민으로부터 시작되었던 미국내의 교포사회는 4238(서1905)까지는 이미 7천여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교포들은 신민회(新民會)와 친목회(親睦會) 등 20여개의 단체들을 결성하고 있었다. 밀사일행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교포들이 이미 을사늑약을 계기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산만하게 활동하고 있던 단체들은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이끌어 가고 있지 못했으며, 이 상설은 그러한 교포사회의 맹점을 곧 파악하고 단일화된 독립운동기구를 구성하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 하였다. 그는 이미 결성되어 있는 여러 단체들의 대표자들을 만나 그 대표들을 설득시키고 움직여서 그들 스스로 단일기구를 결성할 수 있도록 추진하였고, 그 결과 4241년(서1908) 7월 11일부터 5일간 콜로라도주의 덴버시에서 미국 건국이래 최대의 규모로 열리게 된 미국민주당 대회와 때를 맞추어 ‘애국동지대표자 대회’를 열게 되었다.

 

  대회의 장소와 시기를 미국민주당 대회와 맞춘 이유는 비교적 배일성향(排日性向)인 민주당의 당수 및 당원, 그리고 대회에 참여한 정객들에게 일제의 대한국침략정책을 규탄하고 대한국의 독립수호를 호소함으로써 그들의 관심과 동정을 불러 일으키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대회의 발기인은 박 용만이었는데, 그는 밀사들의 헤이그에서의 활동과 구미순방을 순조롭게 도와주기 위해서 미국에서 헤이그로 윤 병구와 송 헌주를 파견했던 인물이었다. 대회를 준비하는 데는 이미 포츠머스회담때 밀사로 건너 온 후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 승만과 윤 병구와 이 관용 등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미국 각지에서 대한국인단체의 대표들및 많은 교포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으며, 이 상설 자신도 노령 시베리아 대표를 위임받은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대회는 단체들의 통합 및 독립운동의 방략에 대한 토의와 연제발표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연사로서는 박 용만과 이 승만 등 교포사회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두 명의 외국인들도 연사로 참석하였다. 대회에서는 주로 과격한 방법보다는 국민들의 지식개발과 실력양성을 통한 독립운동 방략이 제기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우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한국의 문화 및 자주적역사를 대외적으로 선전하며 대한국의 독립과 일제의 침략배격을 통해서 극동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외교적 선전과 함께, 각 지방의 교포들이 힘을 모아서 자주역량을 양성해서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었는데, 독립쟁취를 위해서 새로운 지식습득을 위한 국민교육과 더불어 민족군대를 양성해야 한다는 방략이었다.

 

  이 상설은 그 대회를 바탕으로 더 나아가서 해외한민족의 독립운동을 통합하는 총사령탑으로서의 국민회(國民會)를 결성시켜서 독립운동의 조직화를 꾀했다. 그 결과 4242년(서1909) 2월에는 마침내 국민회가 결성되었고, 이 상설 자신은 극동에서의 독립운동사업 추진임무를 띄고 국민회 총회장인 정 재관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났으며, 국민회는 교포들의 힘을 모아 독립운동자금을 이 상설에게 보내줌으로써 민족군대의 양성을 위한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큰 힘이 되었다.

 

   블라디보스톡에 돌아 온 이 상설은 곧 한민회장인 김 학만, 해조신문 주간인 정 순만, 을미사변이후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4241년(서1908)에 연해주로 망명해 온 영남지방의 대유학자 이 승희등과 함께, 노령에 망명하고 있던 민족운동자들을 결속하여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에 착수했다. 그들은 대한인들이 여기저기서 개간사업을 하면서도 자금과 노동력 부족에 애를 먹고 있던 흥개호 남쪽의 밀산부의 수천리에 달하는 황무지에 주목하여, 그 땅의 일부를 사들이면서 개척해 나아가기로 했다. 개척의 책임을 맡은 이 승희는 세심하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4242년(서1909) 가을에는 1백여가구의 이민단을 이끌고 봉밀산밑의 비옥한 땅에 ‘한흥동(韓興洞)’건설을 시작했다. 이 승희는 약 4년간에 걸쳐서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세우고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어 교육에 힘쓰는 한편, 민약(民約)을 제정해서 민족적 동질감 확보와 단결에 힘썼다.

 

  이처럼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이 활발히 추진되어 가자 미국의 국민회에서는 4243년(서1910) 3월에 태동실업주식회사(泰東實業株式會社)를 조직해서 자본금 5만달러에 1주당 50달러짜리 1천주를 모금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정 재관은 3천달러를 들여서 봉밀산지역에 약 2천4백 에이커에 달하는 미개간지를 구하여 200여호를 이민시켰으나 마적의 출몰이 잦아서 기지의 건설에 대단히 많은 곤란을 겪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산부는 점차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도 대한인들의 공동출자로 원동(遠東)임야주식회사를 설립해서 간도와 연해주등 곳곳의 대한인 유지들을 규합하여 주식을 배분하는 한편, 그 자금으로 밀산부의 한흥동 경영을 후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한흥동의 경영에 고무된 국내의 신민회(新民會)에서도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되었고, 안 창호, 신 채호, 조성환, 이 동휘등 여러 주요간부들이 각자 몰래 대한국을 떠나 4243년(서1910) 4월에는 청국의 청도에 모여서 ‘청도회의’를 열었다. 그 회의에서는 안 창호와 이 갑등의 애국계몽운동 출신자들이,

 

“우선 농지개척에 주력해서 교민의 생활안정을 얻고, 독립운동 투사를 양성함이 대한국의 미래운동에 도움이 된다.”

 

고 주장한 반면에 유 동열, 김 희선등의 무장투쟁 주도자들은,

 

“만주에서 속히 대한국 군인을 양성하여 일을 도모하자.”

 

고 주장하여 많은 논란이 거듭되었으나, 우선 밀산부의 미개간지 10만여 평을 매입해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자는 방략이 결의되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했던 신민회 간부들은 다시 헤어져 각자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힘을 합치게 되었는데, 안 창호는 자금염출이 쉽지 않을 것으로 파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자금조달에 힘을 모으기로 하였다. 마침내 본격적인 독립전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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