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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7만년-152]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105

제25대 솔나(率那)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1/15 [05:01]

[홍익인간 7만년-152]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105

제25대 솔나(率那)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1/15 [05:01]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천산태백] 서기전1130년 신미년(辛未年)에 번한(番韓) 임나(任那)가 솔나 천왕의 조서(詔書)로써 천단(天壇)을 동쪽 교외에 설치하고 삼신(三神)께 제사를 지냈다. 무리들이 둥글게 모여 북을 치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제25대 솔나(率那) 천왕(天王)의 역사

 

정성으로 천단을 쌓고 삼신께 축수하세(精誠乙奴 天壇築爲古 三神主其 祝壽爲世)!

황운을 축수함이며 만만세로다(皇運乙 祝壽爲未於 萬萬歲魯多)!

만인을 돌아봄이며 풍년을 즐거워하도다(萬民乙 睹羅保美御 豊年乙 叱居越爲度多)!

 

위 천단(天壇)은 삼신(三神) 제천단(祭天壇)으로서, 번한(番韓) 임나(任那)가 솔나 천왕의 명(命)을 받아 번한의 수도인 백아강의 동쪽 교외에 설치한 것이다.

 

둥글게 모여 북을 치며 노래하는 형태는 이미 서기전3897년 이전의 한국(桓國)시대부터 있어온 태백환무가(太白環舞歌)와 일맥상통한데, 이러한 노래가 있었던 것을 보면 태평시대였던 것이 된다.

 

위 노래의 가사가 한자(漢字)와 이두식 한자로 기록되고 있는데, 만약 말투가 위와 같았다라면 서기전1130년경의 단군조선의 언어는 지금의 한국어 언어형식과 다름없는 것이 되는데, 구전(口傳)되던 노래가 기록되었던 것을 다시 조선시대 이맥(李陌) 선생이 번한세가(番韓世家)를 편찬할 때 서기1520년경의 말투로 기록하였을 여지는 있겠다. 

 

[은(殷)나라 멸망과 주(周)나라 건국]

 

은(殷)나라 왕 주(紂)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많이 하여 서기전1122년 기묘년(己卯年)에 주(周)나라 무왕(武王) 희발(姬發)에게 망하였다.

 

은나라는 서기전1766년에 단군조선의 군사적 후원을 받아, 단군조선 선인(仙人) 유위자(有爲子)의 제자(弟子)였던 이윤(伊尹)을 재상으로 삼은 성탕(成湯)이 박(亳)을 수도로 하여 건국하였으며, 단군조선의 지방 제후국에 해당하는 천자국(天子國)으로 출발하였으나, 하(夏)나라의 제도(制度)를 답습함으로써 독자적 왕국으로 점점 이탈을 하게 되었는데, 다만, 단군조선 삼한(三韓)에 대하여는 조공(朝貢)의 예를 행하였다.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는 포악한 정치를 하며 달기(妲己)라는 여자에 빠져 하(夏)나라 마지막 걸왕(桀王)처럼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 지냈는데,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인 기자(箕子)와 비간(比干)과 서형(庶兄) 미자(微子)가 자주 간(諫)하였으나 들은 체도 하지 않아, 미자(微子)는 주왕(紂王)을 떠나 버렸다.

 

또, 비간은 주왕(紂王)이 가슴을 칼로 도려내어 무참하게 살해당하였으며, 기자는 미친 사람 행세를 하고 숨어 살았으나 결국 주왕에게 붙들고 말았다. 이에 은나라 태사(太師)는 예약(禮樂)과 제사(祭祀)만이라도 보존하려고 악기(樂器)와 제기(祭器)를 가지고 주(周)나라로 달아났다.

 

이후 주(周)나라 제후인 창(昌)과 구후(九侯)와 악후(鄂侯)가 주왕(紂王)의 삼공(三公)이 되었는데, 주왕이 간(諫)하던 구후를 죽이고 또 악후도 죽여서 시체를 마른 고기로 만들었던 것이며, 이에 주후(周侯) 창(昌)은 주왕(紂王)의 무도함을 탄식하였고, 주왕(紂王)은 이를 듣고 창(昌)을 감옥에 가두었던 것인데, 창(昌)의 신하 산의생(散宜生)이 미녀와 진기한 보배를 구하여 주왕(紂王)에게 바치자 이에 창(昌)을 놓아 주었던 것이다.

 

주왕(紂王)은 창(昌)을 서백(西伯)으로 임명하였으며, 이에 창(昌)은 고향인 주(周)나라로 돌아와 덕을 닦았고, 많은 제후들이 서백 창에게 귀복하였던 것이며, 창이 죽고 아들 발(發)이 대를 이어 서백(西伯)이 되어 제후를 이끌고 주왕(紂王)을 쳤는데, 이때 주왕(紂王)은 보석으로 수놓은 옷을 입은 채 불속에 뛰어들어 자살함으로써 은나라는 제30대 644년간 존속하다 망하였던 것이다.

 

처음 주나라는 은나라의 조그만 제후국에 지나지 않았으나, 창(昌)이 서백(西伯)에 임명되어 덕을 닦자 제후들이 모여들었고, 산동지역의 동해(東海) 출신인 강태공(姜太公)의 보좌로 천하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대를 이은 발(發)이 서백이 되어 상중(喪中)에도 은나라 정벌을 시도하였다.

 

이때 고죽국 출신의 백이와 숙제가 충효에 관하여 간하였는데, 좌우의 신하들이 백이숙제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강태공이 의사(義士)라 하며 호위하는 사람을 붙여 물러가게 하였다. 이리하여 주(周)나라 시조 무왕(武王)이 된 발(發)이 은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천하(天下)의 왕(王), 천자(天子)가 되었던 것이다.

 

주무왕(周武王)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는 차원에서 은나라 왕족을 몰살시키지 아니하였으며, 천하를 주(周)나라에 귀속하게 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는데, 은왕족 기자(箕子)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가르침을 청하였고 이에 기자는 주무왕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자는 더 이상 주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거절하고 태원 북쪽이자 태항산맥 서쪽 지역으로서 서화(西華)라고 불리게 되는 단군조선 영역으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이후 기자국(箕子國)은 단군조선의 기후국(箕侯國)으로서 수유(須臾)라고도 불리는데, 천자국(天子國)인 주(周)나라의 북쪽, 천군국(天君國)인 구려국(句麗國)의 서남쪽, 천군국(天君國)인 고죽국(孤竹國)의 서쪽에 위치한 나라가 되는 것이며, 서기전650년경 이후에는 주류(主流)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번한(番韓) 지역에서 읍차(邑借)로 활동하다가 서기전323년에 읍차 기후(箕詡)가 번조선왕(番朝鮮王)이 되었으며, 방계(傍系)는 남하(南下)하여 연(燕)나라와 조(趙)나라 사이에 선우중산국(鮮于中山國)을 세우고 서기전296년경에 조나라 무령왕(武寧王)에게 망하게 된다.

 

한편, 주무왕은 은나라 주왕(紂王)의 서형(庶兄)인 미자(微子)를 송(宋)나라에 봉하였으며, 또 주왕(紂王)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은나라 후계자로서 녹보(祿父)로 봉하였는데, 무왕(武王) 다음의 성왕(成王) 시대에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무경을 받들어 모반(謀叛)을 일으켰는 바, 이를 삼감(三監)의 난(亂)이라고 한다. 즉 주나라 초기에는 은나라의 잔재세력(殘在勢力)도 남아 있어 정세(政勢)가 혼란하였던 것이 된다.

 

주무왕(周武王)은,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서기전2436-서기전2366)의 아들인 후직(后稷)으로 불리는 기(棄)의 후손이 되는데, 서기전1134년에 서백(西伯)이 되어 서기전1122년까지 12년간 다스렸으며, 서기전1122년에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서기전1116년에 사망하여 주(周)나라 왕으로 7년 재위하여, 합 19년이 된다.

 

주(周)나라 또한 천자국(天子國)으로서 형식적으로는 물론 실질적으로도 상국(上國)으로서 천왕국(天王國)인 단군조선의 천하(天下)인 지방(地方)의 제후국(諸侯國)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서기전1122년경 숙신(肅愼)이 주(周)나라에 석궁(石弓) 등 조공(朝貢)을 바쳤다는 고대중국측의 기록은, 단군조선의 제후국(諸侯國)인 숙신국(肅愼國) 또는 전기 단군조선의 수도였던 아사달이 숙신국(肅愼國)의 영역에 속한 까닭으로 단군조선을 숙신으로 대칭(代稱)한 것이라면 단군조선 조정(朝廷)에서, 사신(使臣)을 보내어 주무왕의 즉위를 축하(祝賀)하며 천자(天子)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을 왜곡한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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