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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 國祖"

단군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만들었던 주역 이병도의 참회 어디까지

한류 | 기사입력 2008/10/25 [21:43]

이병도,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 國祖"

단군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만들었던 주역 이병도의 참회 어디까지

한류 | 입력 : 2008/10/25 [21:43]
[네티즌칼럼] 이병도 박사가 죽음을 삼년 앞둔 시점에서 평생 자신의 학설을 뒤집고 단군 조선의 실재를 인정한 기사로 1986년 10월 9일 조선일보에 실린 글이다. 당시 사학계의 거두였던 두계 이병도의 이 참회기사는 조선일보 특집기사로 1면에 실릴만큼 사회의 파장은 엄청났다. 식민사관과 친일파들에게 의해 숨겨졌던 한민족의 고대사가 해방 후 세상에 처음 드러났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단군신화' 운운하며 강단사학은 우물안개구리마냥 허우적거리고있다.
고조선의 실증적 존재가 있는데 그 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단군'이 보통명사라는건 사학계에 공인된 사실임에도, 2096년간의 단군조선의 첫 왕인 단군왕검의 탄생을 아직도 신화라 치부함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국조 단군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만들었던 주역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죽기 전인 1986년 조선일보에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 역사다'라고 인정했다.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국조"

-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 인용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때 끊겼다"

대체 천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천을 군장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개천절은 즉 「군장을 개설한다」는 것이 되므로 개국, 건국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개천은 즉 최고 시조인 단군의 즉위와 개국을 의미하는 개천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이 제1권의 「고조선(왕검조선)」조에 의하면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고 했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홍익인간」의 이념을 가히 실현할 만하므로 하늘이 그를 인간세계에 내려보내 다스리게 하니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정 신단수하에 내려와 이곳을 신시라 하고 그를 환웅천왕이라고 하게 되었는데, 그는 풍백(풍신) 우사(우신) 운사(운신)의 삼신을 거느리고 주곡 주명 주형 주선악등 무릇 인간삼백육십여사를 주관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일견 지상국가를 천상국가의 한 연장으로 관념한데서 생긴 신화와 같이 보이나 이 신화를 검토하면 환웅천왕의 존재는 실상 지상국가를 개창한 군장이라기 보다는 인간사회의 백사를 주관하는 수호신적 성격을 가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서낭당은 천왕당

이 수호신의 주처는 곧 신단수로 이것은 지금 민속중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서낭당이 그곳이니 선왕당(서낭당)은 즉 천왕당인 것이다. 이 서낭당의 나무가 곧 신단수 그것이고 그 밑의 돌무더기가 신단이다. 그리고 옛날에 이 신단을 중심으로 한 부락이 신시였던 것이다.

신단수는 실상 원시사회의 수목숭배(수목숭배)에서 시작되어 처음에는 수목자체가 신 그것이었는데, 그후 변천하여 신단수는 천신 천왕의 강하계단, 혹은 천왕의 주처 또는 그것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하고 옛날의 국호는 대개 도읍지의 이름과 일치하므로 단군의 도읍지라고하는 아사달(아사달)이 정작 국호였고 조선은 후에 이르러 「아사달」을 아역한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서울대 논문집(사회과학)제2집에 「아사달과 조선」이란 졸고를 통해서 자세히 발표하였다. 환웅천왕이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고기에 전하여 오지만 여기의 웅녀는 고기에는 웅이 여신으로 화한 것이라 하나 이는 웅(곰) 토템족의 여자로 해석하여야 옳다고 나는 연래 주장해 오고 있다.

즉 웅을 신성시하여 자기의 조상이 곰에서 나왔다 하여 종족의 칭호로 삼던 족속의 여자란 뜻이다. 그리고 보면 웅녀는 지상족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대하여 환웅은 천상족, 천신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은 즉 이 천신족과 지신족과의 결혼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10월3일(음력)을 개천절이라 하여 단군의 개국일로 기념하여 온 데는 역시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십월절은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 달이다.

즉 십월절은 4계절의 하나로서 계절과 농업과는 큰 관계를 가졌으므로 고대 농업사회에서는 계절이란 것을 상당히 중시하였다. 그래서 계절마다 부락공동체의 종교적 대제전이 행해져 신인공락(신인공락)의 놀이를 하였던 것이다. 이를 계절제(Season festival)라고 하는 것인데 계절제중에서도 더 중요시하는 것이 락종(하종)시의 계절제와 추수기의 계절제였다.

이 두 계절제는 어느 계절제보다 더 중요시하고 따라서 그 의식도 성대하였다. 전자는 즉 신에게 년사의 풍등을 기원하는 것, 후자는 수확에 대한 감사제 혹은 천신제로서 서양에서는 이것을 「Thanks giving」이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행하고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낙종기의 제전을 오월에, 추수기의 그것은 10월에 행하여 군중이 한데 모여 천신에게 제사하고 가무와 음주로 주야를 쉬지 않고 즐겁게 놀았는데(군민이 동락하였는데) 이 제사를 수리라고 했던 것 같다. 후세에 5월단오를 수릿날이라 하며, 수리취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 여러 가지의 놀이를 하며 십월을 상달이라 하여 초생에 집집이 신에게 고사하고, 선조무덤에 시제를 지내는 풍속이 있지만 이야말로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오월제 십월제의 유풍이라 할 것이다.

「상달」은 「수리달」

「수리」란 말은 상,고,산,신 등을 의미하는 고어로 그 어원은 「솟」「소슬」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보면 10월을 상달이라고 하는 것도 즉 「수리달」의 역으로 볼 수밖에 없다. 부여의 영고제, 고구려의 동맹제, 동예의 무천제가 다 이러한 추수감사제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연등대회, 팔관대회도 춘동이기의 국가적 대제전이었지만 그중에도 가장 성대하던 것이 중동팔관이었다. 그런데 최근세 갑오경장이후로 민족의식 민족정신이 앙양됨에 따라 이 10월절의 고속을 갱생시켜 이로써 단군입국의 개천절을 삼은 것은 오랜 전통에 기인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옛날 민속에 흔히 음력10월초생 특히 3일에 「고사」를 지내왔다는데 왜 3일을 택했느냐 하면 3이란 수는 세계적으로 널리 애용되는 수인 까닭이다. 3은 정족의 수인만큼 안정감을 가진 것이니 1이나 2는 실상 불안정감의 수이다.

일제의 멍에를 벗고 해방이 되자 그 해로부터 개천절을 우리의 전 민족적 국경일로 삼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행하여 오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양력 10월3일로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에 말한 것들은 졸저 「두계잡필」에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런데 현정회이사 이희수씨가 1977년 10월 「현정지」에 「사서상에서 본 국조단군」이라는 제목하에서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지금은 없어진 「고기」와 「구삼국사기」와 현존 위서와는 다른 또 하나의 위서의 단군기사에서 인용하였다고 그 출처를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사대의 입장에서 기술한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도 삼국이전의 사기를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하면서도 여러 곳에서 고조선과 단군에 관하여 언급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단군에 관한 기재를 제외하였지만 동서권십칠 고구려본기오 동천왕이십일년춘이월조에 「왕이환도성경란불가복도축평양성이민급묘사평양자본선인왕검지택야혹운왕지도왕검」이라고 하였다(혹운이하의 왕지는 왕노릇을 하였다는 동사로 읽어야 하고 「도왕검성의 도도 동사로 읽어야 할 것을 잘못 「왕지도왕검」이라고 연서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때의 평양은 지금의 평량(평토량)이 아니라 고구려의 황성(황성, 즉 환도성)의 대안인 동황성(금강계)인 것이다. 지금의 평량에는 아직도 이때 낙랑군이 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인왕검지택」이라고 한 평량은 후일의 평량(지금의 평량)의 지칭이므로 전후자를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당시 평양은 다른 곳

김부식과 같은 사가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고성기자지택이라고 하지 않고 선인왕검지택야라고 한 것은 김부식의 머리속에 지금의 평량이 선인왕검의 도읍지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외사서들이 한결같이 지금의 평량을 왕검성이라고 하는데 이의가 없었던 것 같다.

김부식이 고기를 인용한 부분을 보면 ①사기지리지고구려조에서 고기운주몽자부여도난지래본칙흘승골성 ②사기 지일 제사조에서 「고기운온조왕이십년춘이월설단사천지」 ③사기 열전 김유신상에서 김춘추가 강화하려고 고구려에 갔던 기록 가운데 주석을 달기를 「차여본언진평왕 십이년소서일사이소이이개고기소전고양존지」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고기에는 단군기사가 기재되어 있을 뿐아니라 그 기록이 고구려에 김춘추가 갔던 서기64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김부식이 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이일년서이월조에서 「평량은 본래 선인왕검의 댁」이라고 한 것은 역시 고기이거나 단군기를 인용한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리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육촌도 조선의 유민이 산간에 와서 자리잡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 권제일신라본기제일에 보면 「시조성 박씨‥즉위거서간시년십삼국호서나벌선시 조선유민분거 산곡지간위육촌」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일연이 인용한 고기의 단군기재를 근거있다고 볼 수 있으며 거듭 언급하지만 김부식이 평량이 선인(단군)왕검의 댁이라고 명기한 데서 고기가 단군기사를 실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연이 마치 근거도 없는 고기를 들먹여서 단군기사를 지어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우리 민족이 여러차례의 국난을 겪으면서도 단군묘에 제사하며 국가의 대행사인 축제때에는 노래(세년가)에 의하여 단군의 사적을 전해 내려온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세종실록권40 세종10년 무신6월조에 유관의 상서를 보면 문화현 구월산 동령허리에 신당이 있는데 어느 때에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북벽에 환웅천왕, 동벽에 환인천왕, 서벽에 단군천왕을 모셨는데 문화현 사람들은 이를 삼성이라고 일컬으며 산아래 부락을 성당리라고 한다고 하였다. 유관은 그 상서중에서 「구월산은 현의 주산이던 단군조선 때에는 아사달산이라고 하였으며, 신라에 와서 궐산이라고 고쳤다. 그때에 문화현을 궐구현이라고 처음에 이름하였다. 고려때에 유주감무로 하고 후에 또 문화현으로 고쳤다. 산 이름의 궐자를 느리게 소리내어 구월산이라고 부른다.

두 수의 시에 나타나

문화의 동쪽에 장장이라고 하는 지명이 있다. 부로들이 전하기를 단군의 도읍지라고 한다‥」하였으며 「구월산하에는 환웅을 남면으로 모시고 동서향으로 환인과 단군을 모신 삼성당이 지금도 존재하며 단군이 입도하였다는 자취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세종18년 병진 12월정해조 류사눌(류관의 조카)의 상서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이세년가고지단군초도평(토양)후도백악무정팔년을미입아사달산위신기가왈형국일천사십팔지금묘재아사달칙등무소처호우황고려건묘어구월산하기당우위판유존여세년가합」.

이로써 보면 고기 단군기 외에 가사형식으로 된 단군기사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세년가는 사실들과 부합되니 단군기재에 근거가 있다고 하였다. 유사눌은 한성부사를 지냈는데 또 상서하기를 「신이 단군세년가를 보니 단군은 조선의 시조입니다. 그 출생이 일반사람과 다르고 몰함에 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어쨋든 조선세종대까지 단군세년가가 남아있었고 식자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기해 둘 만한 사실인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류관의 상서에 따르면 삼성당은 황해도 구월산 동령에 있다. 류관은 젊었을 때부터 거기에 내려가서 부로들로부터 단군사적이 오래되었음을 알았다고 했다. 삼성당에 환웅천왕을 상좌에 모셔서 남면하게 하고 동벽에는 환인천왕을 모셔서 서향하게 하고 서벽에는 단군천왕을 모셔서 동향하게 하였다고 한다. 삼성당의 경내외에는 새짐승들이 서식하지 않으며 산짐승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또 가뭄이 심할 때 빌면 비가 내린다고 했다.

문헌비고 권64 찰고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성사는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을 모셨으며 춘추로 제사를 드린다 하고, 역시 문헌비고에 의하면 조선조 성종13년에 황해도 관찰사 이예지의 말에 좇아서 구월산에 삼성묘를 세우고 평낭(토량)의 단군묘의 예에 따라서 매년 향축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권42 문화현사묘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성사는 환인 환웅 단군의 사이다. 춘추로 제사를 지내며 가물 때 빌면 효험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51 평낭조」에 보면 두 수의 시를 통하여 「개국한 지가 멀고 먼 단군은 조선시조이다. 단군의 역사는 언제 비롯되었는가. 요와 함께 개국하였다고 들었으니 거금 사천년이며 단군묘를 남겼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주체사상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조선 양조를 통하여 1천년간에 단군에 대한 국가적 태도는 묘를 세우고 제사를 받드는 등 자못 융성하였다. 이것은 단군을 국조로 섬겼음을 알 수 있다.

 
세종때 새 사당 지어

문헌비고 권13 여지고1 역대국계1에서는 단군조선국을 첫머리에 싣고 유사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백악은 지금의 문화현이며 구월산의 본명은 궐산인데 단군의 궁궐터가 있기 때문이다. 궐산은 소리를 느리게 내어 궐산이 구월산으로 와전되었으며 구월산의 장당경은 또 장장평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세종때의 사은주부 정척(정척)의 상서에 의하면 「평낭의 기자사당에 가보니 기자의 위패는 북쪽에 있어서 남향하였고 단군의 위패는 동쪽에 있어 서향하였다. 신의 생각으로는 단군은 당요와 같이 입국하였고 기자는 무왕의 명으로 조선에 봉하여졌으니 제왕역년수로 보더라도 제요에서 무왕까지는 1230여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기자가 북향하여 남면하고 기자보다 앞서서 입국한 단군을 동쪽에 배향하는 것은 입국전세의 선후에 위배됩니다. 신이 본조의 제사의식을 고찰해보니 단군제의 진설도에 이르기를 「신위는 당의 중앙에 모셔서 남면토록 되어있으며 신이 기자사에서 본 서향의 좌는 진설도와 맞지 않다. 만일 단군을 기자와 나란히 남향하게 하더라도 단군을 상좌에 기자를 다음에 앉히는 것이 입국의 선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기자사당인데 단군을 주신으로 하는 것도 편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생각으로는 따로 단군사당을 지어서 단군을 남향하게 하고 제사를 받들면 사의에도 맞을 것 같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찰조에 명하여 정척의 장서대로 시행토록 하였다. 이상에서 보면 단군은 역대왕조에서는 국조로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었으니 기자보다는 상위로 여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단군의 제향이 끊어진 것은 일제 때부터였다고 본다.

 
단군조선 연구 숙제

삼국유사의 단군기재는 타서 등에서 뒷받침되는 바가 없지 않으므로 믿을 만한 것이며 일연의 창작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일연이 인용한 고기도 김부식의 인용고기와 일치되는 바가 많으므로 고기는 당시에 분명히 있었으며 김부식도 선인왕검과 그 도읍지를 평양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기에는 단군사기가 분명히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단군의 세년가가 전하여져서 많은 식자들이 알고 있었으며 여러 곳에 단군의 사묘제천단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또 향단군진설도가 세전되어 왔고 그것은 단군제의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역대왕조에서는 조의에 의하여 건묘 봉제사했던 것이다. 만일 단군이 하나의 전설 신화거리에 불과하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아무튼 단군과 단군조선에 관한 기재는 숙제로 남길지언정 신화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삼국사기에서 단군기재를 제외한 것은 김부식의 사대적 태도보다는 ①삼국사기의 명분상 삼국이외에는 부여등도 모두 제외하였으며 ②신라중심의 삼국사로 하였고, 신라보다 상대의 역사는 피하려고 한 데다 ③단군을 부인하려는 생각보다는 신라사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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