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대한정통사(74), 광무황제 강제퇴위에 분노한 대한국 민중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3/23 [09:17]

대한정통사(74), 광무황제 강제퇴위에 분노한 대한국 민중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3/23 [09:17]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 안재세] 광무황제의 양위가 7월 18일 밤에 알려지고, 그것이 일제와 매국노들에 의하여 어거지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된 유림선비들과 시민들은 황제가 계신 경운궁(덕수궁)의 대안문(大安門;훗날의 대한문)앞에 모여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대성통곡을 하며, “황제폐하! 절대로 양위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하고 절규하였다.

 

▲ 광무황제의 양위가 결정된 후 대안문 앞     © 안재세

 

이에 시민들을 해산시키려고 경찰병력이 출동했으나 시민들은 굽히지 않고 버티었으며, 매국노 이완용의 무리들을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성토에 모두가 환호하였다. 그날 밤에 자강회·동우회 등 애국단체들의 회원들이 중심이 된 시위대 2천여명이 종로를 휩쓸었고, 이들은 무장경찰에 의해서 일단 해산되었지만 흥분한 군중은 여기저기에 가득 차 있었다.

 

▲ 대안문 앞은 광무황제의 강제퇴위 맞선 군중들이 운집해 있다. 건물은 대륙풍이며, 이 땅 서울은 경운궁 대안문이 아닌 덕수궁과 대한문이었다.     © 편집부

 

 



그리고 마침내 다음 날인 7월 19일 아침에 공식적으로 양위가 발표되자, 군중은 대안문 앞에 다시 몰려들었고, 군중을 강제해산시키려던 일제의 무장경찰대와 충돌하여 일제경찰 2명에게 중상을 입혔고 군중 중에서도 몇 명이 살해당했다. 또한 군중과 합세한 시위대병사 1백여명은 오후에 종로파출소를 습격해서 일제경찰 3명을 사살하고 5명에 총상을 입혔으며 파출소도 파괴해버렸다. 이에 동우회원등은 결사대를 조직하고 강 태현·송 영근을 우두머리로 삼고 선언하기를,

 

“현 내각(의 친일파들)은 바로 우리 국가를 멸망하고 우리 민족을 살해한 극렬분자이며 몹쓸 놈들이니 불가불 토벌해야 한다. 또 임동(林董:하야시)이 장차 우리 황제를 모시고 일본에 건너간다고 하는 소문이 들리니, 무릇 우리 신민은 감히 죽음을 애석해 해야 하겠는가!”

 

하고 외쳤다. 이에 더욱 분노한 군중은 매국노 이완용의 집을 방화하였으므로 이완용은 일본인거주지에 있는 경성구락부에 숨었으며, 법부대신 조중응도 일본인집회소인 일본인구락부에 피신했고, 다른 매국노들도 모두 일제병력이 지키는 관저에 숨어 버렸다. 격분한 군중은 밤에 일진회의 기관지를 발행하는 국민신문사도 습격하고 곳곳에서 왜인들을 습격하여 저들 흉칙한 무리들을 이 땅에서 쫓아내고자 했다.

 

이에 일제와 매국도당들은 군부대신인 이병무를 시켜 ‘군중폭동을 진압하는 권한을 통감에게 의뢰한다’는 거짓 조칙을 또 하나 만들어서는 황제의 옥새를 몰래 찍은 후 군대를 동원해서 시위대와 군중을 탄압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대한국의 군부와 화약고등을 모두 선제점령하여 폭동이 증폭되려는 것을 미연에 막아버리고 말았다. 그처럼 철저한 선제조치를 취하고도 안심할 수가 없었던 교활한 이등은 본국에 연락해서 병력의 증파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전국 곳곳에는 기관총 등으로 완전무장한 일제의 병력이 삼엄하게 깔렸고, 일제의 헌병대도 증강되어 대한국은 완전히 일제에 의한 비상계엄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또한 그에 대항하여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의병항쟁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박 영효·어 담·이 갑·임 재덕 등은 양위식이 거행될 때 매국역적들을 한꺼번에 도륙하여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했으나, 친일파 밀정들에 의하여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완용은 박 영효 등을 ‘치안방해’라는 명목으로 체포해서 제주도에 유배시켜 버렸고, 다른 사람들도 다 감옥에 가둬 버렸다. 일찍이 갑신란 당시 일본의 호의와 협조를 굳게 믿어 마지 않았던 박 영효는, 오랜 망명생활 중에서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일본의 정체도 샅샅이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더 이상 일본인들을 신뢰하지 않고, 갖은 비난을 받는 가운데서도 그 나름대로는 꿋꿋이 자신의 소신을 지켜 조국에 보답하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뒤늦은 충성심을 알게 된 광무황제는 그를 궁내부대신으로 불러 들였고, 후일에는 대한국황실을 일제와 동화시키려고 일본왕녀와의 결혼을 강요하는 일제의 맹렬한 반대를 물리쳐 가며 박 영효의 손녀를 자신의 손자며느리로 삼기까지 했던 것이다.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당한 후인 8월 9일에는 일제의 조종을 받는 검찰에 의하여 전격적으로 헤이그밀사 세 명에 대한 궐석재판이 열렸다. 그 자리에서 정사(正使)였던 이 상설은 교수형에, 부사(副使)였던 이 준 열사와 이 위종은 종신형에 처해졌으니, 이 준 열사는 이역만리의 고혼조차 고국에 돌아 올 수 없었고, 이 상설과 이 위종 또한 그 후 해외독립운동에 있어서 큰 견인차 역할을 하면서도 끝내 고국땅을 밟지 못하고 이역하늘 아래에서 광복활동에 전념하며 여생을 바쳤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미식 여행지 고흥, ‘녹동항 포차’에서 추억을 쌓아요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