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정통사(76)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4/29 [11:29]

대한정통사(76)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4/29 [11:29]

 

▲ 1897년 대한제국 황실 무관학교.     © 편집부

 

 

▲ 무관학교 교관들과 생도들. 이들의 복장은 1897년에 제정한 대한제국군 육군제식복장. 대한제국 황립 무관학교. [大韓帝國 武官學校]     © 편집부

 

 

▲ 대한제국 장군들     © 편집부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안재세]  국제사기극을 벌이기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춘 일제는 대한국을 집어 삼키기 위한 마지막 정비작업으로 대한국의 군대를 해산하는 작업에 들어 갔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에 호락호락 넘어 갈 정도로 어리숙한 대한국군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일제는 군대의 저항을 최소화하려고 황제의 조칙을 또다시 위조하려 하였다. 교활하고 거드름피기 좋아하던 이등 자신도 이 문제만은 대단히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그는 7월 24일에 정미늑약을 강제한 후 7월 28일에는 자신의 심중을 일제총리대신 서원사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으로 표현한 바 있다.

 

  “이번에 조선군대는 황궁경호를 위하여 1개 대대를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해산한다. 그리고 협약체결때 대한국정부로 하여금 이를 승낙하도록 하여 각서중의 한 조건으로 해 둔다. 또 앞으로 징병법을 반포하여 유력한 군대를 조직하는 것을 요건으로 한다...군대해산시 발생할 지도 모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비해서 일단 알린다. 단 군대해산 전에 누설될 위험이 있으므로 본 건은 일체 비밀에 부치도록 한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에 충실하게 이등은 태황제나 융희황제에게조차 알리지도 않고 제 멋대로 황제의 조칙을 꾸며대었다.

 

 그러면서도 간교한 이등은 이번에도 어디까지나 대한국측에서 원하여 군대를 해산하는 것처럼 꾸미려고 이완용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건의를 통감에게 올리는 형식을 취했다.

 

  “..병제(兵制)개혁에 관하여 왼쪽에 열거하는 조칙을 반포할 필요가 있으니 각의(閣議)의 승낙을 구합니다..”

 

  그리고 나서 조칙 자체는 이등이 직접 일본어로 초안을 잡았으며, 그것은 그대로 대한국어로 번역되어서 공포되게끔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제의 증원부대가 대한국에 도착한 7월 31일에는 드디어 이등이 매국노 이완용을 시켜 미리 융희황제의 이름으로 위조한 칙어를 밤 10시 40분을 기하여 공식발표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대한국인이라면 그 누구도 이해가 되지 않을 망발적인 것이었다.

 

  “짐은 이 국사다난한 때에 처하여 불필요한 경비를 절약하여 후생사업에 전용함이 오늘날의 급무라고 생각한다. 생각컨대 우리 군대는 용병으로 조직되어 있으므로 상하가 일치하여 국가를 완전방위하는 데는 부족하다. 짐은 지금부터 군제의 쇄신을 도모하고 사관의 양성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앞으로 징병법을 공포하여 공고한 병력을 갖추고자 한다. 짐은 관계기관에 명하여 황실방위에 필요한 군대만 남겨두고 그밖의 것은 일시 해산시킨다. 짐은 여러 장병들의 오랫동안의 노고를 생각하여 특별히 그 계급에 따라 은급을 나누어 주려 한다. 여러 장교, 하사관, 병사들은 짐의 이 뜻을 명심하고 각자 그 맡은 바 의무에 착오가 없도록 당부한다.”

 

   일제의 침략야욕이 누구의 눈에도 뻔했으므로 만일의 경우 있을 지도 모를 일제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대를 강화해도 모자랄 지경인데, 황제가 망령이 들지 않은 다음에야 그러한 조칙을 내릴 리는 만무하였으며, 따라서 그것이 일제와 매국노들에 의하여 날조된 조칙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했던 것이다. 이러한 완전한 공문서위조 범죄행위를 통하여 군대해산의 조칙이라는 것이 발표되자 전 대한인들의 분노는 무섭게 끓어 올랐고, 특히 국권수호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자긍심을 지니고 있던 애국심 강한 군인들과 의병들은 그 즉시 치열한 독립전쟁에 돌입했다. 국운을 건 건곤일척의 끝없는 독립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 대한제국 해군     © 편집부

 

   노일전쟁 당시 대한국군의 병력규모는 서울에 각각 3천여명씩의 시위연대와 친위연대가 있었고, 광무황제께서 가장 신임하고 계시던 평안도 출신의 최강부대인 ‘징상평양대(徵上平壤隊)’와 210명의 기병대대, 310명의 포병대대, 100명의 군악대, 170명의 공병중대, 450명의 헌병대가 있었다. 그리고 지방의 각 진위대에는 모두 9,000여명의 병력이 있었는데, 진위 제1연대는 총 1,200명으로 본부와 제1대대가 강화도에 750명, 월미도에 50명이 있었고, 제2대대는 개성에 200명, 양주와 해주에 각각 100명씩 주둔하고 있었으며, 진위 제2연대는 총 1,500명으로 제1대대는 수원에 200명, 안성과 북한산에 각각 50명씩이 있었고, 제2대대는 청주에 400명, 공주에 200명이 있었고, 제3대대는 전주에 400명, 광주와 남원에 각각 100명씩 주둔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각 주요 지방마다 1개 연대씩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노일전쟁이후 일제는 이미 계획적으로 대한국군의 감축에 착수하여 대부분의 연대급 병력들을 대대급으로 축소하고 기타 다른 병력도 대폭 축소하고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며, 이제 그나마 남아 있던 군대마저도 완전히 해산시킴으로써 무장해제당한 대한국을 손쉽게 무력장악하려고 광분하였던 것이다. 허위조칙이 발표된 다음 날인 8월 1일 오전 10시에 해산식을 갖기로 한 서울의 훈련원에는 일제의 농간에 반신반의하면서도 몇몇 부대들이 도착했으나 많은 장병들이 탈영하거나 불참하였으며, 시위 1연대의 제1대대와 시위 2연대의 제1대대는 일제의 흉계를 눈치채고 곧 독립전쟁에 돌입했다.

 

   남대문과 서소문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시위대 제1연대 1대대의 대대장 박 승환은, 대한국의 운명이 장병들의 살신성인적인 애국충정에 달렸음을 경고하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기고, “대한국만세”를 절규하며 자신의 단총으로 자결함으로써 독립전쟁의 신호탄을 올렸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군불능수국 신불능진충 만사무석).”

 

이러한 비장한 대대장의 자결에 뒤이어 수 명의 부하들도 자결하였으며, 이를 지켜 보던 장병들은 분노와 통한이 뒤섞인 고함을 지르며 무기고로 달려 가서 무기고 문을 부수고 총과 총탄으로 무장한 후, 무장해제를 감시하러 파견되었던 일제교관 율원(栗原:구리하라)과 그 일행에게 총탄을 퍼부으면서 일제히 항일전선에 떨쳐 일어났다. 장병들의 궐기는 곧 인접한 제2연대 1대대로 파급되었고, 사태의 진전에 놀란 일제가 대한국군의 궐기를 저지하려고 기관총을 앞세우고 대한국군 병영을 공격함으로써 본격적인 시가전이 벌어졌다. 일제는 남대문위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병영쪽을 향해 총탄을 퍼부었으나 완강한 대한국군의 수비는 좀처럼 파괴할 수 없었고, 무리한 돌격전을 감행하려던 일제침략군은 많은 사상자만을 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세시간이 넘는 공방전을 벌이던 대한국군은 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지 못한 데다가 탄환까지 떨어져서 침략군에게 돌파당하였으나, 마지막 한 명까지도 침략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는 감투정신(敢鬪精神)을 발휘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리고 마침내 병영이 침략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남아 있던 장병들은 곧 시가지로 흩어져서 혹은 총탄이 떨어지고 부상을 당하여 민가에 숨기도 하고 혹은 계속해서 일제침략군(왜군)을 습격하는 등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일제는 대한국군의 습격에 맞대응하는 한편 심한 상처를 입고 숨어 있던 장병들을 수색하여 화풀이라도 하듯이 극도로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서울 시위대의 영웅적인 봉기는 그 날 역부족으로 진압당하고 말았으나 봉기의 소식은 곧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곧이어 8월 3일부터는 각 지방의 진위대들과 의병들도 봉기하여 전국은 일대 전쟁터로 화해 갔다. 침략군의 집중공격에 의하여 병영을 잃게 된 장병들은 그대로 의병의 대열에 합류하였고, 그에 따라서 뜻밖의 많은 무장병력을 한꺼번에 확보하게 된 의병의 진용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막강한 전력을 보유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의병들의 사기는 더욱 드높아 졌다. 그리하여 이등이 날조한 허위조칙을 구실삼아서 대한국을 ‘털도 안 벗기고’ 집어 삼키려던 음흉한 일제의 계략은 대한국군 장병들과 의병들의 국운을 건 총궐기에 의하여 한낱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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