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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환도산성, 평양성이 있는 요동은 어디?

요동은 고구려의 도읍이 있는 핵심강역으로 산서성 남부의 동쪽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9/04/30 [13:36]

안시성, 환도산성, 평양성이 있는 요동은 어디?

요동은 고구려의 도읍이 있는 핵심강역으로 산서성 남부의 동쪽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9/04/30 [13:36]
본 글은 아래 5부작의 제 (4부)입니다.
(1부) 식민사학계의 잘못된 이론과 민족사학자의 이론
(2부) 역사동호인들의 이상한 요동.요서 이론
(3부)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현 산서성 분하
(4부) 안시성, 환도산성, 평양성이 있는 요동은 어디?
(5부) 당태종이 빠진 요택으로 본 요수는 어디인가?

백이.숙제 무덤의 발견으로 요서군의 위치가 산서성 영제시 일대로 명확하게 밝혀짐으로서 그 동쪽에 있는 요동군의 위치도 밝혀질 수 있다. 위 한서지리지에서 언급된 대요수, 안시, 요양, 서안평 등이 있는 요동군은 임분시의 동부 평지인 임분분지(臨汾盆地) 일대로 볼 수 있다. 이 요동군 안에 고구려의 도읍들이 위치하고 있어 한족들은 고구려를 부를 때 요동이라 부른 것이다.

요서 10성의 위치는 어디인가? 

요서군의 위치가 확실히 밝혀짐으로서 태조대왕이 쌓은 요서 10성의 위치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대조대왕 3년(55년)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병(漢兵)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구체적인 지명이 생략되어 있다. 이 요성 10성의 지명에 대해서는 한단고기가 정확히 밝혀주고 있다. 

안시(安市)는 개평(開平) 동북 70리,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        
석성은 건안의 서쪽 30리,
건흥은 난하(灤河)의 서쪽,
요동(遼東)은 창려(昌黎)의 남쪽,
풍성은 안시의 서북 100리,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
요택(遼澤)은 황하 북안 왼쪽
* 요택은 현 하남성 제원시 근방의 현 지명 황하습지로 황하와 심수 사이의 습지이다. 

▲   <한단고기>에 언급된 요서 10성의 지명을 지도에 표시하면 위 지도와 같다. 
▲  모 역사싸이트가 중국 지도를 보고 비정한 태조대왕의 요서 10성은 북경과 천진 동쪽 난하 주변에 있다고 한다. 중국 지도만 보고 우리 역사의 지명을 비정하는 행위는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행위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그 기준이 되는 지명인 안시의 위치 근거는 바로 (1부)에서 언급한 <신당서 동이열전>과 <한서지리지>를 들 수 있다. 이 외 여러 근거가 있으나 나중에 안시성을 다룰 때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고, <신당서 동이열전>과 <한서지리지>를 다시 한 번 언급하기로 한다.

(신당서 동이열전) 대요수와 소요수가 있는데 대요수는 말갈의 서쪽 남산에서 시작되고 남으로 안시성으로 흐른다; 소요수는 요산 서쪽에서 시작되는데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량수는 요새 밖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흐르다 합쳐진다. (水有大辽、少辽:大辽出靺鞨西南山,南历安市城;少辽出辽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与之合)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커다란 배로 사람을 건네고 믿음직한 참호 역할을 하고 있다. (有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鸭头,号鸭渌水,历国内城西,与盐难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而平壤在鸭渌东南,以巨舻济人,因恃以为堑)

한서지리지 : 마자수는 서북에서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2개 군을 거쳐 길이는 2,100리이다. (漢書地理誌: 马訾水西北入盐难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天一百里)

여기서의 마자수는 압록수로 당나라에서는 당취수(唐就水) 또는 요동군의 대요수라고도 불린 것으로 보인다. 압록수는 현 산서성 분하로 길이는 730KM인데 이는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2,100리와 거의 일치한다. 고대 압록수의 흐름(서류)과 길이가 현 압록강과 비슷하다 보니 중국과 일제가 강 이름을 조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를 지도에 비정하고 보면 현 분하의 남북 흐름이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즉 산서성 남부를 동서로 갈라 중심에서 서쪽의 평지를 요서군, 동쪽의 평지를 요동군이라고 했다. 즉 서쪽인 영제시 일대의 평지를 요서군, 요서군의 동북쪽 임분분지와 현 운성시의 동부를 통털어 요동군이라 한 것이다. 

▲   고대 고구려의 요동군과 요서군의 위치는 위 지도와 같다.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환도산성은 어디인가? 

<한단고기 소도경전본훈>에 따르면, “번한의 옛 도읍은 개평부 동북 70리”라 기록되어 있어 번조선의 도읍이 안시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삼국사기>에 “안시성은 옛 안촌홀이며 환도성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도 “안시는 곧 환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산삼왕 13년(209년)에 환도산성으로 천도했으나 동천왕 20년(246년)에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으로 도성이 파괴되어 다시 국내성으로 옮겨서 96년간 머물다가 고국원왕 12년(34)에 환도산성을 수리하고 옮겼으나, 같은 해 10월 모용황의 침략으로 환도산성이 함락되고 파괴되어 더 이상 거주할 수 없게 되자 고국원왕은 평양 동황성으로 옮겨간다.

식민사학계는 이러한 환도성을 집안(국내성) 근처에 있는 산성자산성으로 보고 있으나 이는 위의 기록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환도는 안시와 거의 붙어 있어야 맞는데, 안시는 요하 강변에 있다고 하면서 어떻게 환도성이 집안시의 산성자산성이란 말인가? 사서의 기록과도 맞지 않는다는 것은 이러한 지명비정이 조작된 허구라는 것을 증명한다 하겠다. 

결론을 말하자면 중국과 일제는 역사의 지명조작을 위해 관구검기공비를 옮겨 놓는다. 원래 산서성 남부에 있어야 할 관구검기공비와 환도산성이 지명 조작되어 길림성 집안으로 옮겨오게 되는 것인데, 그걸 이 나라 식민사학계가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라 하겠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중국은 현 압록강변 집안시에 환도산성과 국내성이 있다고 조작하고 있다. 

▲   중국은 관구검기공비가 집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집안 지역을 국내성과 환도성으로 비정했으나 이는 역사조작이다. 집안박물관에서 관구검과  모용황의 침입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그림.
▲  산서성 남부에 있어야 할 환도산성이 중국의 지명조작으로 집안시에 서 있다.

요서 10성이 예전에 요수로 불렸던 난하 서쪽이라고 주장학는 재야사학과 모 역사싸이트는 고구려의 환도산성(丸都山城)이 진황도시 청룡현에 있는 도산(都山)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지도 상으로 보니 요수(난하) 근처에 있는 비슷한 지명이라는 이유로 보이는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하겠다.
 
진황도시 청룡현 도산에 가 보면 그곳은 고구려의 도읍이 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교통이 불편하고 도읍이 되기에는 협소한 곳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도산까지 오르는 길도 굉장히 좁다. 과연 대제국 고구려가 그런 곳에 도읍을 정했겠는가? 앞으론 가 보고 그런 주장을 하기 바란다. 
 
그렇다면 환도산성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진짜 환도산성은 산서성 화염산 남단 안시성과 같은 산 속에 있는 현 지명 관왕묘(關王廟)이다. 안시성이 있는 화염산 남단의 산은 말 모양을 하고 있다. 안시성은 말머리처럼 생긴 산(馬首山)에 있으며, 환도산성은 말꼬리(馬尾山)처럼 생긴 산 속 정상에 있다. 즉 화염산 남단에 있는 산의 좌측에 안시성이 있으며 우측 안쪽 정상에 환도산성이 있다. 
 
필자는 환도산성이 있던 이 말꼬리산(중국발음 마이산)이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마니산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고구려의 평양성은 단군조선의 왕검성인데, 고구려의 평양성은 임분시로 확실시되며 그 근처에 마이산이 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좀 더 연구를 해봐야겠지만 필자의 생각이 거의 맞으리라 본다.

이 환도산성의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는 산 속으로 들어가 아주 가파른 산을 꼬불꼬불 올라야 한다. 산 속 길을 따라가면 도처에 천연적인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곳이 나타난다. 그래서 외곽 좌측에 있는 안시성을 점령하지 않고는 산 속에 있는 환도산성을 공격할 수 없는 지리적 형태로 되어있다.

그러나 일단 산 정상에 올라가면 그 근처에 있는 산들의 정상이 모두 평탄한 평지로 연결이 되어 있으면서, 산 위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밭이 도처에 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식량 공급을 받지 않아도 자체 농지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그래서 안시성이 당태종에게 그토록 장기간 포위된 상태에서도 고구려의 10만 병력이 버틴 것은 이곳에서 식량을 자급자족했기 때문이다. 

환도산성에서 평양성으로 추정되는 임분시는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래서 당태종의 요동정벌 때 안시성전투에서 이도종이 말하길 “고구려가 나라를 기울여서 왕사를 막으니 평양의 수비가 반드시 약할 것입니다. 원컨대 신에게 병졸 오천명을 주시어 그 근본을 뒤엎으면 수십만의 무리와 싸우지 않고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라는 기록이 성립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전 병력이 모두 안시성에 주력하고 있을 때 수도인 평양성을 습격하자는 이도종의 작전 건의인데, 이러한 작전은 안시성과 평양성이 가깝지 않고는 성립될 수가 없다. 이러한 이도종의 습격작전은 식민사학계의 이론인 요녕성 요하변에 있는 안시성과 집안에 있는 환도산성과 대동강 평양성 사이에서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거리적인 문제가 있다.  

▲  환도산성으로 가는 길에 있는 방어진지
▲  멀리 보이는 산 꼭대기에 성터가 있다. 새로 쌓은 성이나 성터는 옛날 고구려의 환도산성임에 틀림없다.
▲  현 지명 관왕묘에는 현재 관우의 사당이 없다. 고구려 때 추모대제를 모신 주몽사가 있었다. 진왕(秦王)은 당태종 이세민을 말함이다. 환도성은 산 속 정상에 안시성은 산 바깥쪽의 좌측에 있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하기 때문에 이도종이 당태종에게 건의한 작전이 성립되는 것이다. 안시성을 점령하지 않고 평양성이 있는 임분시로 진군하면 분지에 갇히는 형국이 된다. 수양제는 여기를 점령하지 않고 평양성으로 쳐들어갔기 때문에 살수대첩에서 전멸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당태종은 안시를 점령하려다 눈알이 빠져 패해 도망간 것이다.
▲  환도산성 근처의 산 정상은 모두 평평하고, 사진으로 보듯이 산 정상이 모두 도로로 연결이 되어 있다. 그렇게 때문에 적은 병력으로 대군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었고, 천연적인 난공불락의 요새가 된 것이다. 멀리 산 밑에 평지가 보인다. 수양제와 당태종은 이 산 밑에 진을 쳤다.

그 유명한 요동성은 어디인가? 

그리고 수양제와 당태종이 하남성 낙양의 북(北)에서 요수(遼水)와 요택(遼澤)을 지나 고구려와 처음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 바로 평지에 있는 요동성이다. 요동성은 당태종/수양제가 요수와 요택을 지나면 고구려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이다. 이 요동성의 대략적인 위치는 산서성 운성시의 동부와 진성시 사이에 있는 왕옥산 주변으로 추정된다.

<한단고기>에서는 태조대왕의 요서 10성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이 요동성의 위치를 창려에 있다고 했다. 조작된 중국 지도로만 역사 지명을 비정하는 재야사학과 모 역사싸이트는 이 창려를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로 비정하고 있으나, 원래 창려는 하북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산서성 최남부에 있었다.

갈석산과 창려와 난하와 노룡이라는 지명은 항상 같이 따라다녀야 한다. 대갈석산이 있는 우북평은 산서성 최남단 중조산의 남쪽으로 볼 수 있다. 난하는 지금의 속수로 비정되고, 노룡은 이미 백이.숙제의 묘와 고죽성(포주고성)의 발견으로 그 일대가 노령임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창려도 그 근처가 아니겠는가? 

<한서무제기주 漢書武帝紀注》에는 “文穎曰,碣石在遼西壘縣”라는 기록이 있어 갈석산이 요서군의 루현 지역에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아래는 한서지리지에서 우북평군을 설명하는 문구이다. 요서군과 우북평군은 산서성 최남단 중조산에 붙어있는 지역이다. 

(右北平郡) 秦置。莽曰北顺。属幽州。户六万六千六百八十九,口三十二万七百八十。县十六:平刚,无终,故无终子国。浭水西至雍奴入海,过郡二,行六百五十里。石成,延陵,莽曰铺武。俊靡,氵垒水南至无终东入庚。莽曰俊麻。薋,都尉治。莽曰裒睦。徐无,莽曰北顺亭。字,榆水出东。土根,白狼,莽曰伏狄。夕阳,有铁官。莽曰夕阴。昌城,莽曰淑武。骊成,大揭石山在县西南。(대갈석산이 현 서남에 있다) 莽曰揭石。广成,莽曰平虏。聚阳,莽曰笃睦。平明。莽曰平阳。

중국과 일제가 우리역사를 말살한 이유는? 

필자는 6개월 전 산서성 남부를 역사탐방하고 왔다. 가서 보니 고구려의 역사적 지명이 모두 그곳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역사탐방 중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역사가 여기(산서성 남부)까지 있었기 때문에, 일제가 20만권의 사서를 불사르면서 우리 역사를 말살하려 했고 중국도 거기에 동조해 지명 조작을 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역사의 현장인 산서성 남부를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일부 역사싸이트에서 얻은 잘못된 지명으로 함부로 우리 역사 지명을 논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역사를 만주와 한반도에 국한하려는 식민사학계와 북경 근처가 고구려의 도읍이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는 역사네티즌들은 반드시 산서성 남부에 가봐야 한다. 그래야 필자의 이론과 논리가 맞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   사진 속 기사의 원인은 고구려와 단군조선의 강역이 산서성까지로 실로 어마어마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민사학계의 반도사관 이론이야 이미 일제에 의해 조작된 역사라는 것을 많은 국민들이 알고 있다. 그러다보니 하북성 북부가 고구려의 핵심 강역이라고 말하는 모 역사 싸이트가 네티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네티즌들은 그곳에 게시된 지명비정이 다 맞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반도사관으로 얼룩진 우리 역사를 하북성 북부로 끌고 나왔다고 해서 대수가 아니다. 지명에 따른 역사적 사실의 톱니바퀴를 제대로 맞추어야 진정한 민족사학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네티즌들이 중국어를 읽지 못하고 중국 인터넷에서 지명을 자유자재로 검색하지 못하다 보니 중국에서 이미 지명조작한 지도만 보고 우리 역사지명을 비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역사를 죽이는 대단히 위험한 행동으로, 오히려 중국의 동북공정을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조상의 혼과 민족정신이 담긴 우리 역사를 중국이 역사왜곡을 한 뒤에 만들어진 지도로만 비정하여 역사의 혼을 훼손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램이다. 그래야만 우리 역사의 진실을 올바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 역사는 외적에 의해 말살되었고, 재야사학과 역사싸이트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곧 (5부)가 연재됩니다.




김 성겸 09/05/01 [14:55] 수정 삭제  
  건필하세요...!

얼마전까지, 저도 자전에 속고 삼국사기에 속았습니다.

"移居于, 改爲, 本之都也."
"탕남{탕산 또는 탕하/탕수의 남쪽}"의 "우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환도"로 이름을 바꾸었다. 본시 "{옛 졸본국에 서남?접한 환나국}"의 도읍지였다.

西都는 옛 북부여 侯國 黃龍 東都 터에,
東都는 옛 북부여 侯國 卒本과 順奴의 중간 정도지점.
고국원/고국천은 옛 북부여 侯國 順奴지경으로 잠시 沸流국에게 속하기도.
고구리 초기 도성{동도}의 위치는 후세 通州 薊縣지경이라는 기록도...
고구리 平壤城 위치는 동천왕의 평양성과 장수왕의 평양대성이
같은 곳인지 아닌지도 궁금하며,
저로서는 칠로도산맥 이서지역 또는 산서성 혹은 하북성의 어디인 것으로 보나 아직 오리무중이고,
동천왕과 관구검 사이의 전사를 꿰뚫어야 할 듯한데 竹嶺에서 막혀있음...

"河北"이라는 기록만 나오면,
무조건 현금의 "河北城"으로 생각하는 것은 금기사항!
무조건 黃河 북쪽을 쳐다보는 것도 금기사항!
"서안평"은 옛 "안평국" 땅의 서부 또는 서방인 듯.
옛 "안평국"의 위치는 현금 산서성 남부의 "안읍"지경 또는 "안택"지경이었던 듯!

"{좌水우尙}"의 자전상 독음은 "탕"과 "창"
"唐"의 자전상 독음은 "탕"

"唐河/唐水" 또는 "唐山" 남쪽 "牛山城"으로 거처를 옮겨 密都로 삼고
이름을 丸都城으로 바꾸었다는 말...

北都는 尉那岩城 또는 國內城으로
고구리의 西進기지{서역지역의 선비/흉노지역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읍지}
장수왕의 평양대성은 남진{현금 산동 및 하남성 방향} 또는 남서진{현금 관중방향}을 위한 도성이었던 듯!

오늘은 여기까지만 공부한 것을 옮깁니다....
자료 09/05/13 [20:36] 수정 삭제  
  고구려 선조들의 나라는 단군조선 제후국인 고리국-지금의 내몽골지역으로 지도에는 '구려'여기를 클릭하면 자세히 볼 수 있다
고구려 09/05/13 [20:59] 수정 삭제  
  http://kr.blog.yahoo.com/sppopsj/1361691 





고구려 : 天帝大日高大光輝於世界之中하늘님의 태양이 높게 크게 빛나는 세계의 중심*고 : 높을 고. 태양(解=해)이 높이 크게 비침.*구려 : 가운데 나라. 거우리-가우리 [가운데 땅] -구려 : 서기전2333년 단군왕검의 둘째 아들 부소가 봉해진 나라-고리국, 고구려 : 해모수는 고리국 출신이므로 해모수의 북부여를 고구려라고도 부르고, 북부여시대 제후국으로 고구려후(고리군왕이라고도 함)를 두었음. 해모수의 둘재 아들 고진이 고구려후임. -고구려 : 고주몽이 서기전37년에 정식으로 국호를 고구려라 칭함. 고주몽은 고진의 손자인 옥저후 고모수(불리지)의 아들로서 해모수의 현손자임.1. 동명성제 시대 : 서기전37년~서기전19년*서기전58년 졸본에서 북부여 승계*졸본은 상춘(장춘)의 동남쪽으로 동부여를 지나 동남쪽에 위치한다. 즉 장춘의 동쪽은 길림이고, 길림의 동남쪽에 졸본이 위치하게 된다.  동부여는 고두막한 북부여의 동쪽에 위치한다.*고두막한은 원래 졸본 출신으로서 서기전108년에 의병을 일으켜 동명이라 칭하였고 서기전86년에 상춘(장춘)에 있던 북부여 수도를 차지하고 해부루를 동부여 제후로 삼았다.*고두막한이 서기전59년에 붕어하자 아들 고무서단군이 졸본에 장사지내고 졸본을 수도로 삼았으며, 이때 동부여에서 탈출한 고주몽을 사위로 삼은 것이다.*동부여는 길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 되고 졸본은 돈화 또는 돈화와 백두산의 중간 지역에 있는 땅이 된다.-서기전37년 졸본에서 고구려를 건국함.-서기전28년 비류(沸流)의 송양(松壤) 정복하고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라 함.*비류는 옥저, 졸본 등과 함께 원래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음. *연호를 다물(多勿)이라 함. 송양을 다물후(多勿侯)로 봉함.-서기전27년 북옥저 멸망-서기전26년 수도를 눌현(상춘)으로 옮김.*유리왕 때 서기1년(또는 3년)에 국내성(집안)으로 수도를 옮김.2. 대무신열제 시대 : 서기18년~서기44년-서기37년 최씨 낙랑국 멸망 : 한반도의 평양에 있던 낙랑국(서기전195년~서기37년). 최리 왕 시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자명고 무대 *낙랑(홀)의 세력가는 최씨인데, 서기전195년 최숭이 발해만 서쪽의 패수(난하)지역 낙랑(홀)에서 보물을 배에 싣고 한반도의 평양으로 이동하여 나라를 세워 낙랑국이 됨.*즉 원래의 낙랑(소위 한사군의 낙랑군 자리)은 요동지역으로서 원래의 패수지역인 산해관과 갈석산의 서쪽지역으로 요하(탕산과 북경 사이에 흐르는 강)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다.*지금의 요동반도 서쪽에 있는 요하는 서기980년경 거란 시대에 부른 강이며, 원래는 서압록이라 하였고, 그 상류는 구려하에 해당하고, 이 구려하 지역은 강이 갈래가 많아 조선시대 박지원의 열하 지역이 된다. 구려하는 단군조선의 구려국에 있으며, 지금의 요하문명권의 중심지인 적봉시가 소재한다.*한반도의 대동강을 패강(패수)이라 한 것은 아무리 빨라도 서기195년경 최숭이 이동해 온 후에 붙여진 이름이 될 것이다.3. 모본제 시대 : 서기48년~서기53년-요동 회복 *요동은 요하(탕산의 바로 서쪽과 북경의 동쪽으로 좀 떨어진 곳 사이에 흐르는 강)의 동쪽으로 난하를 포함하며 지금의 요하 즉 요동반도 서쪽지역을 가리킨다. 지금의 요동은 지금의 요하의 동쪽인 요동반도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쉽게 말하면 요동지역은 북경의 동쪽과 탕산의 동쪽으로 요동반도 서쪽 사이의 땅을 가리킨다.*북경의 서쪽과 천진지역은 요서지역이 된다.4.  태조 시대 (서기53~서기146)-옥저와 동예 복속 *옥저는 백두산과 압록강(동압록)의 이북에 위치한 나라이다.*고주몽의 아버지 고모수(불리지)는 해모수의 증손자로서 북부여 시대의 제후인 옥저후이다. 서기전79년 고주몽을 낳고 얼마 안되어 사망하였고 유화부인이 혼자 길렀다. -서기55년 요서 10성 축조 : 안시, 석성, 건안, 건흥, 요동, 풍성, 한성, 옥전보, 택성, 요택(요하하류 진펄)*안시성은 개평(開平)의 동북 70리에 있다 함. 옛 탕지보 자리임. *탕지보는 단군조선의 번한 수도 중의 하나임. *개평은 지금의 당산(唐山,탕산)의 북에 있음.*석성(石城)은 건안성의 서쪽 50리에 있음.*건안은 안시성의 남쪽 70리에 있음.*건흥은 난하의 서쪽에 있음.*요동성은 창려 남쪽에 있음. *창려는 갈석산 지역임. 험독(險瀆)의 자리임.*풍성은 안시성의 서북 100리에 있음.*한성(韓城)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있음.*옥전보는 한성의 서남 60리에 있음. 옛 요동국 자리임.*택성(擇城)은 요동성의 서남 50리에 있음.*요택은 황하북류의 좌안에 있음. 이세민이 서기645년에 침입하여 오다 진흙에 빠진 곳임. *발해만의 침몰 등으로 강의 흐름이 바뀌었다고 봄. 요택은 요하하류의 진흙 벌지역을 가리키며, 난하의 서쪽이고 황하북류 하류의 동쪽이며 요하하류 지역에 해당된다.*요서는 요하의 서쪽으로서 난하(패수)지역의 낙랑(군)의 서쪽 강 건너 지역이 됨. 즉 지금의 북경 서쪽과 천진 지역을 가리킨다.*건흥성이 난하의 서쪽에 있다 하므로 요서10성은 모두 난하와 요하와 황하북류의 하류 지역에 있는 것이 된다.*상곡(上谷)은 대동부(大同府)(따퉁)임-서기57년 백암성, 통도성 축조*통도성은 단군조선 초기에 요중(遼中) 12성의 하나로 이미 축조되었던 적이 있는 성임. 고려진(高麗鎭)이라 하는데, 북경의 안정문(安定門) 밖 60리에 있음. 즉 통도성은 북경 근처 바로 동쪽에 있는 것이 된다***번한의 요중 12성 : 험독, 영지, 탕지, 통도, 거용, 한성, 개평, 대방, 백제, 장령, 갈산, 여성-창려지역의 험독과 갈산(갈석산)은 고구려의 요동성 부근이며, 탕지보는 고구려의 안시성이고, 한성은 동일한 것이어서, 번한 요중 12성과 고구려의 요서 10성이 겹치거나 근처에 있는 것이 되며, 특히 통도성은 단군조선과 고구려가 동일한 것이 된다.-서기105년~서기121년 : 현도군, 낙랑군 공격하는 등 요동 회복 *현도와 낙랑은 요동의 일부지역에 해당함. 낙랑은 패수(난하)지역에 있고, 현도는 낙랑의 동북으로 진번과 대방의 서쪽에 있는 땅임.*진번은 진한과 번한의 사이에 있는 나라가 되며, 단군왕검의 셋째 아들인 부우가 봉해진 나라임.*대방은 대수지역의 땅으로서 대수는 요동반도 서쪽에 붙어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며, 서압록(지금의 요하) 바로 밑에 있는 강이고, 서쪽의 패수와 이 대수 사이의 땅이 패대지역으로서 요동의 중심지가 된다.*낙랑과 대방사이에 임둔이 소재하고 임둔의 북쪽에 진번과 대방의 서쪽에 현도가 소재한 것이 된다.5. 신대제 시대 : 서기165년~서기179년-서기168년 : 요동정벌6. 산상제 시대 : 서기197년~서기227년-서기197년 : 현도, 낙랑 멸망, 요동태수 공손탁 토벌하여 요동 평정*현도와 낙랑을 정벌하여 멸망시켰으나 다시 전쟁으로 뺏고 뺏기는 상황임.*현도는 진번의 서쪽에 해당하는 땅이며, 낙랑의 동북에 위치한다.*낙랑은 난하(패수)를 중심으로 서쪽의 탕산과 북경의 동쪽에 위치하는 땅이다. -서기209년 제2환도성(통구)으로 천도 *제2환도성은 국내성의 산위에 있음7. 동천제 시대 : 서기227년~서기248년-서기242년 서안평 공격*원래의 서안평은 난하 상류의 북쪽인 옛 구려하(지금의 서요하 상류) 지역에 있던 땅으로 거란의 서경 임황부임. 요하문명권의 적봉시 근처에 있는 땅임. 서안평은 요하(패수의 서쪽 강)의 상류 쪽의 동쪽에 있어 요동지역 중 서북쪽에 해당함.-서기246년 위나라 관구검에게 제2환도성 함락당함.-서기247년 평양 천도8. 미천제 시대 : 서기300년~서기331년-서기313년 : 대방, 낙랑군 축출, 현도정벌, 8,000명 평양 이송*대방은 진번의 남쪽에 있어 지금의 요동반도 서쪽에 붙은 대수지역의 땅이 되고, 이 대수는 지금의 요하 남쪽 바로 밑에 있는 강이며 발해만 쪽으로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다.*낙랑군은 갈석산, 산해관을 중심으로 북경의 동쪽, 탕산의 동쪽에서 난하를 중심으로 하는 땅이다.*대방은 요동반도의 서쪽에 걸치는 지역으로서 대수지역이며, 낙랑은 패수지역으로서 발해만 서쪽에 해당하는 난하 지역에 있고, 현도는 낙랑과 대방사이에 있음. -서안평 점령9. 고국원제 시대 : 서기331년~서기371년-서기342년 전연(前燕)의 선비 모용씨의 칩입으로 제3환도성(집안) 함락-백제 근초고왕에게 한강에서 전사10. 광개토경호태열제 시대 : 서기391년~서기412년-후연 격파, 요동 확보*요동지역은 지금의 북경 동쪽, 탕산의 동쪽으로 요동반도 서쪽 지역이 됨.*즉 최대한으로 북경까지 확보하였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읍루 정벌-한강 이북 점령-서기392년 백제 10성 점령-서기395년 백제를 패수에서 격파 *패수는 난하를 가리키며 이때 백제는 요서군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임. 난하 서쪽에 있는 강 건너 지역이 요서임.-서기400년 왜 격퇴, 삼가라 복속-거란, 백제, 신라, 가락, 임나, 이왜 복속  -서기408년 북연과 수호11. 장수홍제호태열제 시대 : 서기412년~서기491년-동진, 송, 북위와 통교-북연, 실위, 거란 복속-신라, 백제 조공-서기427년 평양 천도-서기475년 위례성 함락, 개로왕 전사시킴-서기480년 신라 정벌, 죽령이북 점령-말갈 정벌-서기414년 아버지 광개토호태왕릉을 옮기고 광개토경호태열제 비 건립12. 문자호태열제 시대 : 서기491년~서기519년-서기493년 연나부 낙씨의 동부여 복속*연나부 낙씨는 동부여 대소왕의 사촌동생을 봉한 나라로 고구려의 서쪽지역에 안치하였으며, 이때 동부여가 완전 멸망한 것이 됨.  -서기501년 백제 동성왕 폐위 시킴-서기501년 제, 노, 오, 월 복속 *제, 노, 오, 월의 땅은 중국내륙의 동쪽에 걸치는 땅으로서 단군조선 시대의 번한 관할에 속하며 청구와 남이(藍夷), 회이, 서이, 엄이, 래이, 개이, 양이, 우이 등 내륙의 8이와 적이(赤夷.남만)의 나라가 된다.-서기503년 백제의 요서와 진평 병합,  백제군 폐지*요서는 난하(패수) 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요동 요서 지역에 백제군이 있었으며, 원래 단군조선 시대 번한 땅의 요중(요동 요서)에 백제성(百濟城)이 있었다.13. 평강상호태열제 시대 : 서기559년~서기590년-서기576년 온달장군이 갈석산(碣石山), 배찰산(拜察山)의 적을 토벌하고 추적하여 북주(北周) 대파, 유림진(楡林鎭: 산서성 경계지역) 이동 평정*갈석산은 난하(패수)의 동쪽에 있는 산이며, 그 부근은 단군조선 시대 번한의 수도가 있던 땅이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고, 낙랑(홀) 지역에 해당한다.*온달장군이 다시 요동에 침입한 적을 토벌하고 북주를 대파하여 산서성에 있는 유림진의 동쪽을 평정하였다는 말임.14. 영양무원호태열제 시대 : 서기590년~서기618년-서기598년 요서 공격, 수문제 30만 침입*요서지역은 지금의 북경의 서쪽과 탕산의 서쪽 천진을 포함하는 지역이 됨.-서기598년 서부대인 연태조(淵太祚)가 등주 정벌 *연태조는 연개소문의 아버지*등주는 산동지역에 있던 땅임-서기603년 연개소문이 조의선인에 선발됨(9세) *서기595년에 출생한 것이 됨. 김춘추는 서기603년 출생, 김유신장군은 서기595년으로 연개소문과 동년배가 됨.-서기612년 수양제 1차 침입 100만대군,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살수는 한반도에 있던 강이 아니고 요동반도의 해성 남쪽에 있는 강으로서 남쪽으로 흐르며, 남해안이 지금의 황해이다. 지금의 압록강 서쪽과 지금의 요하 동쪽에 있고 요동반도 남쪽 끝으로 흐르는 강이다.-서기613년 수양제의 2차 침입 실패-서기614년 수양제의 3차 침입 실패-서기618년 수나라 멸망함15. 영류제 시대 : 서기618년~서기642년-천리장성 축조 : 부여현~남해부(부여성~비사성) : 요동반도의 서쪽 지역에 걸치는 곳임.*부여는 원래 하얼빈 서쪽의 부여가 그 시초이고, 상춘은 북부여에 속하고, 장당경은 중부여에 속함. 부여현은 상춘과 장당경(개원, 심양)의 서쪽에 해당하는 땅이 됨.*단군조선의 부여는 단군왕검의 네째 아들 부여가 봉해진 나라로, 부여의 수도는 상춘의 북쪽이며 하얼빈의 서쪽 지역이다.-서기642년 연개소문이 영류제를 폐하고 보장제 옹립16. 보장제 시대 : 서기642년~서기668년-서기644년 안시성 전투-서기645년 당나라가 1차 침입하자, 반격하여 산서, 강좌, 하북, 산동을 고구려에 복속 하기로 약정*산서성은 태원지역 등 서쪽을 가리키고, 하북은 북경을 포함하는 지역이고, 산동은 지금의 산동반도를 포함하는 지역이 된다.*강좌는 강의 왼쪽이라는 말인데, 강은 양자강을 가리킨다고 보면, 강좌는 양자강 하류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만약 강좌를 산서와 하북의 중간 지역이라면, 태원의 동쪽에 있는 황하의 동쪽을 가리키게 된다. 그리하여 태원을 포함하는 산서성과, 황하하류를 포함하는 강좌 하북 지역과, 산동지역을 보장제 때 고구려에 복속하기로 당나라 이세민과 약정을 하였다는 말임.*실제로 연개소문이 당 이세민을 쫓아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추격하여 굴복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음. 그리하여 장안의 동쪽에 해당하는 땅 모두(산서, 강좌, 하북, 산동이 됨)를 고구려의 땅으로 복속시키기로 이세민에게서 약정을 받은 것임. -서기648년 당의 2차 침입 실패-서기649년 당의 3차 침입 실패-서기657년 연개소문 사망 *서기595년~서기657년 63세가 됨. 또는 서기665년경에 사망하였다 하는데 71세가 됨.-서기668년 1년 항전 끝에 평양 함락됨.=========================*이상으로, 고구려의 요동, 요서 정복활동으로 보건대, 요동 땅 중에서 동쪽에 해당하는 요동반도의 서쪽에 해당하는 진번, 대방, 현도, 임둔 은 물론, 요동의 시작 지점인 지금의 북경 동쪽과 탕산의 동쪽의 낙랑을 공격하여 정복하고, 심지어 장안까지 추격하여 태원 등 동쪽의 땅을 고구려에 복속하기로 당 이세민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내는 등, 요동과 요서의 격전지는 바로 발해만의 북쪽에 걸치는 지역으로서 북경, 갈석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된다.*지금의 요동반도는 서기980년경 요(거란) 시대에 붙여진 강 이름이며, 이 이전의 요동과 요서는 지금의 북경의 바로 동쪽과 탕산의 서쪽 사이를 흐르는 강인 요하를 기준으로 나눈 지역이고, 이 요하의 동쪽에 있는 강이 바로 난하로서 원래의 패수이며 원래의 낙랑이 있는 곳이다.  ============================ *험독, 탕지보, 번한성 보완(아래 도표)
고구려 09/05/13 [21:03] 수정 삭제  
  만약 고구려의 수도가 지금의 평양에 없었더라면, 지금의 중국은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라고 우기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이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서기427년부터 서기668년까지 고구려의 수도는 지금의 평양이 되었다. 그리고 한때 서기247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적도 있는데 이는 서기전246년에 위나라 관구검에게 제2환도성을 함락당한 때이다.

장수왕이 고구려의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은 후손이 되는 지금의 한국인들에게 고구려의 역사를 지키는 데 든든한 방패막을 한 것이 된다.

만약 고구려의 수도가 평양에 있지 않고 압록강 이북에만 있었다면, 지금의 중국은 아마도 한국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마음대로 자기네 역사로 무단편입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어디까지나 역사이므로, 조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의 중국으로 하여금 더이상 역사를 조작할 수 없도록 고구려의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어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로 정립되도록 못을 박아 놓은 업적을 이룬 것이 된다.

고구려는 북부여를 계승한 것을 천명하였고, 북부여는 단군조선을 계승하였으며, 특히 고주몽성제는 다물이라 하여 단군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고자 연호를 정하고 단군조선 진한의 땅을 회복하였다.

고구려의 역사를 지킴으로써 우리는 단군조선의 역사를 지킬 수 있고, 나아가 배달나라, 한국의 역사를 지킬 수 있다.

신라도 물론 단군조선의 유습을 이은 나라이며, 신라시조 박혁거세는 단군의 단, 박달을 차용하여 성을 박으로 하였다. 박혁거세는 북부여의 거서간을 자칭하였고, 나중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몰리자 왕국을 자칭하게 되어 나라를 스스로 지키고자 하였다.

고구려가 망한 후 고구려의 장군 대중상은 후고구려라 칭하여 아들에게 물려주니 아들 대조영은 결국 고구려를 계승하여 대진국을 세웠다. 대진국은 남경(南京)을 한반도 땅에 두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와 남쪽의 신라, 백제, 그리고 대진국과, 남쪽의 신라는 남북국 시대를 이룬 것이다.

단군조선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고구려가 당연히 우리 역사임을 알고 있으나, 단군조선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구려의 역사를 우리역사인지 중국의 역사인지 헷갈리게 시대가 변해가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에 둠으로써, 고구려 역사를 한국의 역사에 남도록 못을 박은 것이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탓할 것만은 아닌 것이다.

==================[고구려 수도이전

*서기전58년~서기전26년 : 졸본 시대
*서기전26년~서기1년 : 상춘 시대(늘봄, 눌견, 눌현)
*서기1년~서기209년 : 국내성(집안), 제1환도성 시대
*서기209년~서기246년 : 제2환도성 시대 *제2환도성은 국내성 산위에 있음.
*서기247년~ : 평양 시대
*서기 ~서기427년 : 제3환도성 시대
*서기427년~서기668년 : 평양 시대
==============================
남원윤 09/05/15 [13:00] 수정 삭제  
  우리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서 애 쓰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습니다.
언제나 응원할께요~ 아자~
asdfa 09/05/15 [19:02] 수정 삭제  
  계속하시기 바람.전 세계인구에게 병신인증 받을수 있도록 노력하시기 바람.
ASDFA 09/05/15 [19:05] 수정 삭제  
  며칠 전에 백제가 저위치에 붙어 있드만은 지금은 고구려가 되여 버리고 몇일지나면 신라가 되겄지.
축하 합니다.매일 부동한 꿈으로 자위를 할수 있어서.
대칸 09/05/20 [17:48] 수정 삭제  
  잘 보이지 않습니다/ 지도가 특히...
박상희 09/05/31 [01:49] 수정 삭제  
  기존 배운 역사에 변화 하는게 힘들건 알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분들이 의심스럽군요. 한국인인지...
윗글 보면 못느끼나요? 노력하신것을? 당신들이 저런 노력을 보이려면 죽어도 못할겁니다. 왜냐? 한국인이 다가지고 있는 근성과 자부심 노력이죠. 핏속에 쪽빠리 피가 흐르지는 않는지 족보 있으시면 뒤져보세요.ㅇ ㅣ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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