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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고구려가 강성대국이 된 이유를 알아야 할 때

"북한이 최첨단기술에 해당하는 인공위성과 핵무기를 개발하여.."

윤복현 시사칼럼 | 기사입력 2009/05/28 [11:07]

지금은 고구려가 강성대국이 된 이유를 알아야 할 때

"북한이 최첨단기술에 해당하는 인공위성과 핵무기를 개발하여.."

윤복현 시사칼럼 | 입력 : 2009/05/28 [11:07]
고구려의 힘은 올바른 역사인식에서 오는 자부심과 당당함의 정신력,그리고 최첨단 철제기술에서 오는 강력한 군사력과 천자국 고구려중심의 교류협력를 목적으로 12한국에 해당하는 고토 유라시아지역의 공존이라는 통합적인 다물정신구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비-"고추모는 천제지자"-고추모는 하늘의 아들(천자)
 
13명의 태수(제후)를 거느린 고구려 유주자사 '진'은 왕에 해당하는 직급이다. 이러한 자사가 10명만 되어도 고구려의 영토는 엄청난 것이다.고구려 왕을 대제나 태왕으로 기록하고 부른 배경이다. 고구려는 천자국이였던 것이다.
 
 
▲ 벽화 에 나오는 철갑기마   ©


 

 
 
개마무사라는 지금의 탱크부대와 같은 철갑기마부대가 고구려에 있었다.당시 최첨단기술에 해당하는 철제기술로 가벼운 무게에 뚫지 못하는 철갑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이 최첨단기술에 해당하는 인공위성과 핵무기를 개발하여 북한을 굴복시키려는 미국에 자주적으로 대응하는 것과 동일하다. 
 
▲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청동그릇('광개토태왕'이란 글자가 보인다..신라가 광개토태왕에게 제사를 지낸 제기)     © 플러스코리아
거란.토곡혼(티벳).후연 등 유라시아 유목민들을 완전히 통제관리하고 중국 동.북부 지역을  지배한 광개토태왕 당시 신라요청으로 출동한 고구려5만 철갑군대에게 가야는 고구려에게 망했고, 이후 신라.백제 모두 고구려에게 항복하고 굴복했다.

마음만 먹으면 완전히 복속시킬 수 있었지만, 광개토태왕은 단군조선의 통치방식을 택한 것이다. 고구려를 부모국으로 자신들을 제후국으로 인정하면 자치권을 준 것이다. 그래서 항복한 신라와 백제은 당시 고구려 제후국가들에 불과한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군대의 주둔을 허용하고 태자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고 고구려를 상국으로 삼고 광개토태왕에게 제사를 지냈다. 가야의 침략을 고구려가 물리쳐 준 댓가였다.
 
단군3조선은 진조선이라는 중앙통치국가가 군대통제권을 가지고 대단군이 진조선에서 번조선.마조선 2개 지역으로 나누어  2명의 단군을 임명하였고, 3조선 밑으로는 수 많은 제후국들이 있었던 것이다.대단군은 천제가 되고 두 단군은 천자가 되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천제국의 위상을 세웠다.

그러니까 고대에 하늘나라하면 별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광명의 나라(환국=천국=천상)에 해당하는  한국.배달국.단군조선을 의미하는 것이였으며, 기독경에서 천사로 표현되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에서 온누리에 파견한 흰옷입은 순찰자들이였던 것.

만리장성 북쪽이 천상이고 만리장성아래가 천하다. 동방은 고대부터 천상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동방족의 뿌리가 한반도인 것이다.그래서 동방족 슈메르인들이 말한 에덴동산은 슈메르인들의 마음의 본향 한반도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백두산에서 압록강.두만강.송화강.토문강 4강이 흐른다. 기독경이 말하는 에덴동산도 4강이 흐른다.
 

▲ 광개토태왕시절 고구려통치권이 미쳤던 최대 영역지도     © 플러스코리아

광개토태왕의 전략전술과 통치영역(내용보려면 클릭)
 
▲ 중원고구려비     © 플러스코리아

 
[중원고구려비 (中原高句麗碑)]
1. 지정번호 : 국보 205 호 (지정일 : 1981-03-18)
2.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3. 시대구분 : 고구려시대
4. 소재지 :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 280-11
5. 상세설명 :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비문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매금이라고 표현하고 있어 당시 신라를 고구려의 속국으로 삼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비문이기도 하다.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를 복속하고 대마도에 고구려연합정권을 세워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관리감독했다. 고구려의 한반도복속으로 인하여한반도서남해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옹관묘의 주인공들이며, 북방에서 들어온 기자.진조선 유민들의 3한(마.번.진한)의 나라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한반도 서남부 지역의 토착 마한인들(왜)은 일본열도로 이주했다.
 
망한 가야세력도 일본열도로 이주했고, 한성백성도 수도를 웅진(공주=곰나루)도 이전하게 되고 한반도 서남부지역까지 완전히 복속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한반도 서남부지역은 옹관묘가 사라지고 백제석실묘가 등장한다.

광개토태왕비문에는 당시 백제를 이잔.백잔으로 구분해서 2개 세력으로 구분하고 있다. 구태백제가 "이잔(伊殘)" 또는 "왜(倭)"로 적혀 있어서 당시 웅진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구태세력과 구태세력과 연합하고 있는 한반도서남해지역의 마한세력(왜)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강변의 최대규모의 전방후원분과 일본왕들의 전방후원분, 그리고 서남해지역의 초기 전방후원분은 모두 서남해지역 마한인들의 무덤양식으로 구태백제가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서남해지역의 마한인들은 해양세력으로 상당히 개방적이어서 무덤양식도 네모 세모 원 모양 전방후원분 등 다양하다. 당시 백제왕권은 구태세력이 완전히 장악하고 서남해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서남해지역의 마한인들의 선박제조술과 항해술의 도움으로 일본열도로도 진출하고 있었다.
 
▲     © 플러스코리아

 

▲ 일본최대 인덕왕릉     © 플러스코리아
일본최대 인덕왕릉
서남해지역의 마한인들(왜)의 일본이주로 서남해지역의 마한양식인 전방후원분은 일본열도의 무덤양식으로 자리잡았다.아래는 한강변에서 발굴된 세계최대 전방후원분 무덤양식이다. 온조백제를 통합한 구태백제는 서남해지역의 마한세력(왜)과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유대적 관계를 유지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자료라 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비문에도 왜는 백제의 고구려공격에 적극 지원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는 배경이다. 개로왕이 축조했다는 풍납토성도 사실은 마한양식의 토성을 개조확대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광개토태왕은 한강을 통하여 한성백제(백잔)를 무너뜨리고 해군을 통하여 서남해지역의 구태백제(이잔).마한세력(왜)을 완전히 궤멸시켰다. 광개토태왕비문에 승리후에 속리산에서 제천의식을 가졌다고 기록한 배경이다. 고구려는 신라.백제.가야를 완전히 복속시킨 후에 대마도에 고구려연합정권을 세워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감시통제한 것이다.
 
역사를 인식하면 한국과 일본은 왜 가깝고도 먼 관계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은 악순환만 지속되는 한반도침력을 중지하고 일제하 침략과 수탈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전제로 화해협력하는 시대를 열여야 한다고 본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사죄.피해배상없이 화해협력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를 초월하여 군국주의와 반민주 독재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개독적인 국수주의와 제국주의는 아시아와 인류평화의 적이다. 모두가 공존공생하는 홍익인간시대를 열어야 한다.
 



[천자국 고구려,북경.요서지역 지배]

1976년도 평안남도 덕흥리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인데 무덤의 주인공이 고구려에서 벼슬을 지낸 유주자사 진(幽州刺使 鎭)이라는 사람입니다
“유주자사”라는 직책은 “유주”라는 것이 북경인근을 말하는데 여기에 위치하면서 고구려에 속한 여러 지방을 총괄하여 다스리던 관리로서 '총독' 정도로 보면 될 것입니다.
하여간 중국 동해안 전체를 통치한 고구려 고위관리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분이 중국 북경인근에서 통치를 하다가고향인 평안도로 돌아와 고향땅에 묻혔다는 점을 알 수 잇습니다.

무덤 발견위치를 지도로 표시하면 아래 사진과 같습니다



 

1976년 발견되길 망정이지 일제시대때 발견되었으면 아마 어떻게 조작되었을지 모를일이지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물론 OO는 언급을 금기시하고 있습니다.
아래에서 추가로 소개하겠지만 북경유역에 땅을 파서 고구려 유물이 나오지 전까지는
이 유물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답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아래 사진은 유주를 나타내는 위치 지도입니다.




 
(질문)
그런데 이 무덤안에 뭐가 있다는 것인가요 ?

(답변)
자 지금부터 하나하나 알아보겠습니다

② 무덤안의 내용

우선 무덤안 전경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여기에 기가막힌 역사적 실증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무덤안 전경)
 


중앙에 있는분이 유주자사를 지낸 “진”으로  무덤의 주인공이고, 유주자사 “진”은
331년 태어나 408년 죽을때까지 고구려 4대왕을 모신 고구려의 신하였습니다.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331년 ~ 408년 사이에는 중국동해안이 모조리 고구려 땅이었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면 무슨 무리가 따를까요? 기간중 일부를 점유하였던 하여간 중국의 동해안 옥토를 모조리 지배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좌측에 서있는 분들이 유주자사 “진” 통제하에 있던 고구려 지방지도자인 13개 태수들입니다

 (질문)
그렇다면 13명의 태수는 어디에 위치한 사람인가요 ?

(답변)
자 놀라지 말고 다음 설명을 잘 이해하길 바랍니다

13개 태수의 위치

무덤벽면에 있는 사신들을 보면 우측에 어디에서온 태수라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 “연군(燕郡) 태수”
(2) “범양(范陽) 내사”
(3) “어양(漁陽) 태수”


(4) “상곡(上谷) 태수”
(5) “광양(廣陽) 태수”
(6) “대군(代郡) 내사”


(7) “북평(北平) 태수”
(8) “요서(遼西) 태수”
(9) “창려(昌黎) 태수”


(10) “요동(遼東) 태수”
(11) “현도(玄도) 태수”
(12) “낙랑(樂浪) 태수”
(13) “............(판독 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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