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수나라 대운하인 '통제거'는 어디인가?

황하 남쪽의 통제거는 하남성 낙양 부근에 있었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9/06/02 [23:57]

수나라 대운하인 '통제거'는 어디인가?

황하 남쪽의 통제거는 하남성 낙양 부근에 있었다.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9/06/02 [23:57]
본 글은 아래와 같이 (2부)로 나뉘어 연재됩니다.
(1부) 수나라 대운하인 통제거는 어디인가?
(2부) 요택에 있었다는 영제거는 어디인가?

 

이명박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한반도대운하’라는 선거공약을 내걸어 당선되었다. 지금은 국민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혀 시행되지 않고 있으나, 그래서 그런지 ‘대운하’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전혀 생소하지가 않다. 게다가 수양제가 만들었다는‘수나라 대운하’가 우리에게는 역사적 사실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 ‘수나라 대운하’가 실로 엄청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동아일보가 소개한 “중국정부에서 발표한 수나라 대운하"
2006년 7월 22일 동아일보에 소개된 ‘수나라 대운하’를 보면, 중국 정부는 이 대운하는 수나라가 6년간에 거쳐 북경에서 시작하여 천진-->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을 거쳐 항주에 이르는 1,764km에 달하는 길이라고 발표했다. 가히 역사조작의 명수 중국다운 과장이다.

그런데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당시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의 강역으로 수나라가 대운하를 건설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게다가 581년부터 618년까지 겨우 38년간 존재했던 짧은 역사의 수나라가 어떻게 이런 대운하를 건설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수나라는 통일이후 계속되는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이러한 대운하를 건설할 여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 장비로도 막힌 구간인 881km(북부)를 수리하는데 4년이나 걸린다고 보도되었는데, 약 1,400여년 전 수나라가 6년 만에 이러한 대운하를 건설했다는 것은 도저히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히 수나라가 그런 대운하를 건설했다고 보도하는 중국의 뻔뻔함에 놀랄 뿐이다.

필자가 위와 같이 반론을 펴자 독자들은 과연 수나라 대운하는 실제로 어디에 위치했는지, 그리고 실제 길이는 얼마나 되는지 대단히 궁금해 할 것이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수나라 때 운하는 두 종류가 건설되었다고 기록에 전한다. 하나는 황하 북쪽에 건설한 영제거(永濟渠)이고, 다른 하나는 황하 남쪽에 건설한 통제거(通濟渠)라는 운하이다. 그래서 중국은 동아일보가 발표한 지도에서 황하 북쪽의 막힌 구간을 영제거라 하며, 황하 남쪽의 뚫린 구간을 통제거라고 우기고 있다. 과연 그럴까?
 
 


 

 



▲   북경대 참고자료에 나와 있는 수나라 대운하인 영제거와 통제거. 역사적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다

우선 사서의 기록을 보면, 통제거는 대업(수양제) 원년인 606년에 황하 남쪽에 건설하였고, 영제거는 대업 4년인 610년에 건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선 이 시기는 612년에 수나라가 113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하기 직전이다. 당시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던 수나라가 과연 국력을 기울여 이러한 대운하를 건설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먼저 (1부)에서는 황하 남쪽에 건설했다는 통제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    중국 인터넷에서 찾은 통제거를 설명한 지도. 통제거가 황하와 회수 상류를 연결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나마 역사의 기록과 비슷하게 되어있다.  

 
황하 남쪽에 건설했다는 통제거는 어디인가?

통제거에 대한 수서 양제기(隋书炀帝纪)의 기록을 보면,
대업 원년 통제거를 개통한다. 황하 남쪽 회수 북쪽의 여러 군민 백여만명을 동원해 통제거를 개통한다. 서원에서부터 곡수와 낙수의 물을 끌어 황하에 다다르고, 판저에서 황하의 물을 끌어 회수에 이르게 한다. (大业元年开通济渠,“发河南淮北诸郡民前后百余万开通济渠。自西苑引谷洛水达于河,自板渚引河达于淮”)

우리는 이 기록으로는 통제거가 2단계로 나뉘어 건설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단계 통제거는 서원에서 황하까지이고, 2단계 통제거는 판저에서 회수까지 임을 알 수 있다. 1단계 통제거의 시작점인 서원은 낙양 서쪽의 수황제궁이 있는 곳이고, 곡수를 <중국지명대사전>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낙수는 서쪽인 섬서성에서 나와 낙양을 거쳐 이하(伊河)와 합쳐져 황하로 흘러가는 강이다.

谷水 : 出河南陕县东境东崤山谷阳谷,东流经渑池,合渑水,又东合涧水为涧河,至洛阳西南入洛,按谷水为涧河上游,故涧河下游亦可称谷水,《水经注》云,涧水北流注谷,即指此,周灵王时,谷洛閸,毁王宫,即谓涧洛二河漫溢也,谷涧里三水久混,据周书涧东之文,其水应在王城之西,南流入洛,即《水经注》所谓死谷,涧水既合于谷,不知保时又东合于里,涧水既合于谷,不知保进又东合于里,禹贡锥指谓周景王雍谷入里,亦无确据,《水经注》自千金渠以东,乃里水经流,非涧谷故道也,今清会典图以陕县流入渑池者为谷水,涧水发源渑池东北白石山,至东南合流,其下通谓之涧水,下流至洛阳西南入洛,不通里水,又一变而与周书合矣。 

복잡하나 간단히 설명하자면 “곡수는 하남성 협현 동쪽 경계에서 나와, 민지(澠池)를 거쳐 민수와 합쳐지고, 간수와 합쳐져 간하(澗河)가 되어, 낙양 서남에서 낙수로 들어가는 강이다. 옛날에 간하 하류를 역시 곡수라 했다.” 협현은 지금의 낙녕현으로 낙양시의 서쪽에 있는 현으로 곡수는 낙수의 서쪽 지류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낙수는 동쪽으로 흘러 결국 황하로 들어가는 강인데 왜 굳이 통제거라는 운하를 만들어 황하와 연결하려 했을까? 곡수와 낙수의 물을 끌어 황하와 연결하려면 지정학적으로 통제거는 낙수 북쪽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지형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필자는 통제거는 낙양시 북쪽에 있는 맹진시를 관통하기 위한 인공하천으로 보는 것이다. 
 
▲   하남성 낙양 부근의 물길도. 곡수와 낙수의 물을 끌어 황하까지 연결하는 1차 통제거는 낙수 북쪽일 수 밖에 없다. 다른 방향으로는 물길상 설명이 안된다. 간하와 낙하가 낙양에서 합쳐져 흐르다 이하와 합쳐지기 전의 강을 곡낙수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2단계 통제거는 실제 만들어 졌을까?

2단계 통제거의 시작점인 판저(板渚)를 <중국지명대사전>에서 찾아보면, “판저는 하남 사수현 동북 20리에 있다. (板渚 : 在河南汜水县东北二十里,《水经注》“河水东迳板城北,有津,谓之板城渚口,”隋炀帝开通济渠,自板渚引河入汴)“고 나온다. 사수현은 지금의 하남성 정주시 서쪽 황하변에 있는 현이다. 

이 부근에 있는 판저라는 곳에서 황하의 물을 끌어 변수(汴水)와 연결하는 물길이 2단계 통제거인 것이다. 변수(汴水)를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아보면 “即汴河。发源于荥阳大周山洛口,经中牟北五里的官渡,从“利泽水门”和“大通水门”流入里城,横贯今之后河街、州桥街、袁宅街、胭脂河街一带,折而东南经“上善水门”流出外城。过陈留、杞县,与泗水、淮河汇集。(영양시 대주산에서 발원하여 중모현 북을 지나 밖으로 나가서는 기현, 사수를 거쳐 회하로 들어간다.)

필자는 이 변하를 지금의 가노하의 일부나 지류로 보고 있다. 워낙 작은 지류인지 지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우나,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영양시와 중모현 북을 지나는 강은 가노하(賈魯河) 밖에 없다. 가노하는 황하 부근에서 발원하여 하남성을 가로질러 가다 주구(周口)시에서 영하와 합쳐져 영하란 이름으로 회하 상류로 들어가는 강이다.

▲   1, 2차 통제거와 관련된 하남성 물줄기를 녹색으로 표시했다. 전체가 통제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가노하 전체라고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황하와 회하를 연결하는 가노하와 영하(潁河) 전체를 통제거로 보고 있으나 이는 어불성설이다. 분명한 것은 가노하와 영하는 인공 하천이 아니라 자연 하천이므로 통제거가 절대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2단계 통제거는 황하변 사수현과 가노하를 연결하는 짧은 물길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중국지명대사전>이 이와 같이 설명함에도 중국은 역사왜곡을 위해 교육용 지도 및 군사지도까지 왜곡하여 통제거가 하남에서 시작하여 회수까지 연결된다 하면서, 심지어는 자연하천까지 인공수로인 수나라 대운하에 포함시켜 엄청나게 부풀리기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해 망하는데, 수나라는 고구려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대운하라는 공사를 하느라고 민심이 이반하여 망했다는 논리를 내기 위함으로 보아야 한다.

사서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수나라가 운하를 만들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수나라가 운하를 만든 이유는 고구려와의 전쟁 때문이었다. 전쟁용 군수물자를 산서성 남부에 있는 고구려까지 육로로 수송하려면, 바다와도 같은 요수(황하)를 지나고 또 200리나 이어지는 습지대인 요택을 지나야 한다.

이러한 전쟁용 군수물자의 원활한 보급을 위해 수양제는 운하가 필요했던 것이다. 참고로 당태종은 수양제가 보급로를 고구려에게 빼앗겨 전쟁에 패했다는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낙양에서 고구려까지 보급로를 만드는 대신 아예 가축을 가지고 다녔다.

수나라의 전후 사정으로 볼 때 1차 통제거는 낙양 북쪽에 있는 맹진현을 관통하여 황하에 도달하기 위한 최단코스의 운하로 보아야 한다. 통제거 없이 그냥 배가 낙수를 통해 황하로 들어가려면 먼 거리를 돌아야 하고, 황하 북쪽에 있는 습지대인 요택(심수 하류 좌.우)을 피하기 위해서는 황하를 역류해서 올라가야 하는 작전상의 어려움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    검은 선으로 표시한 것이 1, 2차 통제거 예상 위치. 정확한 위치는 아니나 그 일대로 본다.
▲    2차 통제거는 판저에서 가노하와 연결하는 물길. 가노하는 회수까지 연결된다.
 
래서 필자는 고구려와의 전쟁과 별로 상관없는 운하인 판저에서 회수에 도달한다는 2차 통제거는 역사 왜곡을 위한 후대의 첨필이던가 아니면 실제로 만들었다면 백제와 신라로 가기 위한 운하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2차 통제거 역시 실제 있었다 하더라도 길이가 긴 대운하가 아니라 황하와 가노하의 발원지를 연결하는 짧은 물길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통제거는 현재 중국이 조작한 것과 같이 800여 키로에 달하는 긴 운하가 아니라 불과 몇 십km에 불과한 짧은 물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통제거는 산동성에 있는 황하 하류와 절강성의 회수 하류를 통하게 하는 대운하가 아니라, 하남성 낙양 북쪽에 있는 맹진현을 관통하는 자그마한 인공 하천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중국의 역사왜곡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으며, 재야의 엉터리 역사싸이트들은 중국에서 조작한 군사지도만 보고 통제거가 내몽고 황하변에 있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이 나라의 역사가 제대로 복원되려면 이러한 식민사학계와 엉터리 주장을 하는 역사동호인부터 없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는 날이 와야 진정한 역사 광복이 되어 민족정기가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
 
▲ 모 역사싸이트에 있는 중국군사지도 상의 영제거와 통제거. 이런 엉터리 자료를 믿으면 동북공정을 인정하는 것이다. 중국의 모든 지도는 역사왜곡을 위해 이미 지명조작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나마 <중국지명대사전>으로 추적하면 역사왜곡의 흔적이 보인다. 
▲  하남성 낙양 근처에 있던 통제거는 중국에 의해 동쪽으로 황하와 회하의 하류로 옮겨져 역사왜곡이 되었고, 엉터리 역사싸이트에 의해 내몽고쪽으로 왜곡이 된다. 우리 스스로 역사왜곡을 해서야 동북공정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변균양 09/06/03 [02:14] 수정 삭제  
  변수는 개봉 근처. 그래서 개봉이 변경임.
ASDFA 09/06/03 [19:13] 수정 삭제  
  하남성 직접 가보시면 통제거 유적하고 가노하하고 다른거 직접 눈으로 볼수 있는데 왜 이런 무식한 글을 쓰면서 무식을 광고하고 다니나!!
고구려 수도 09/06/04 [12:56] 수정 삭제  
  수양제가 운하판 건 고구려 공격을 위해 군수물자운반하려고 그런 거다. 산동지역에서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공격하기위함이다. 후한 광무제의 낙랑군이 존재했던 고구려 평양성(북한 평양)은 낙양에서 5천리라고 중국문헌(구당서.신당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에 기록된 당나라 당시의 고구려 수도위치

舊唐書卷一百九十九上

列傳第一百四十九

東夷

高麗高麗者岀自扶餘之别種也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在京師東五千一百里

구당서의 이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의 도읍지 평양성은 漢(후한)대의 낙랑군 치소였고, 당의 장안에서 5100리 거리에 있는 곳이다.

이 기록대로 역산해보자...



[淸朝續文獻通考 卷319 輿地15]

北京에서 섬서성 西安府 長安縣까지 서남으로 2535里



[赴燕日記/ 路程記]

서울에서 평양까지 550리

평양에서 鴨綠江까지 505리

서울에서 북경(北京)까지 3069리



따라서, 평양서 북경까지 2519리



고로, 西安서 평양까지 = 2535 +2519 = 5054里



唐代 10리 = 5598m = 明대의 10里

淸代 10리 = 5760m

조선시대 10리 = 5.6km 정도

정확한 거리다...........고구려 수도를 하북성에 규정하는 건 헛수고


위 지도는 뻥튀기 역사매니아들이 작성한 지도다. 지도를 작성한 자신들이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한반도가 남북 3천리라는 건 상식인데, 당나라 수도 서안에서 영.빈까지 어케 한반도 남북거리의 2배인 6천리라고 뻥을 치나? 표준구도로 봐도 서안에서 북경까지도 3천리가 될까 말까다사방둘레 23km의 북한 평양성(장안성)은 전형적인 고구려의 성으로 당시 세계최대의 성이였다. 그리고 을밀선인이 세웠다는 을밀대도 있다. 그리고 고구려초기 대무신왕 당시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 배후를 공격하기위해 배를 타고 평양부근의 최씨 낙랑국 지역을 치고 후한의 낙랑군을 설치한 지역이다. 평양부근지역에서는 한나라 조정에 보내는 인구조사 공문목간이 출토되고 관리급의 무덤들 비문에 후한이라는 글자가 발견된 유적유물들과 후한 광무제가 배를 타고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삼국사기]기록내용이 일치하기 때문이다.그래서 [구.신당서]에서 고구려 평양성이 옛 한나라 낙랑군 땅이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한무제의 전한과 관련된 소위, 한4군 위치는 요서지역이다. 한4군이라기 보다는 북부여(=골본부여) 고두막군대와 번조선지역의 동이족의 연합군대가 내부분열로 패망직전의 위만조선(=번조선)으로 한나라가 공격해 오자, 한나라와 전쟁하여 승리한 후에 설치한 조선4군이 한4군의 실체지만(전쟁관련한 1차 사료인 사마천의 <사기>에도 승전기록은 없으며, 4군 지명도 나오지 않으며, 한무제가 패한 수군과 육군의 수장들을 참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대도 우리 스스로 한4군 운운하는 것은 한민족의 정신을 말살하기위한 차원에서 나온 일제 식민사관의 세뇌교육때문이다). 당시 당나라 서안에서 낙양까지가 지리서[군국지]에서 950리로 기록하고 있다.그리고 일부 뻥튀기 역사매니아들이 설정한 5천1백리는 서안에서 북한 평양까지의 거리여야 수학적으로도 맞다. 자신들이 위 지도를 보고도 그런 주장을 하면 코메디다.
조재범 09/06/04 [22:20] 수정 삭제  
  아예 우리 땅을 중국한테 떼줘라. 궁극적으로 니 말은 평양에 낙랑군을 비정하고 싶다는 말 아니냐? 장안에서 낙양까지가 950리라메? 그럼 낙양에서 평양까지가 장안에서 낙양까지 거리의 6배도 안 된단 말이냐? 그리고 리수라는 건 시대마다 달랐거든. 그 때 리수는 지금의 리수보다 짧았기 때문에 가능한거야. 이 멍청한 개자식아.
개인적생각 09/06/09 [16:26] 수정 삭제  
  고구려의 중심 수도는 아마도 시마르칸트와 타시켄트 유역일 것으로 추정.
개인적생각 09/06/09 [16:26] 수정 삭제  
  고구려의 중심 수도는 아마도 시마르칸트와 타시켄트 유역일 것으로 추정.
남원윤 09/06/12 [12:03] 수정 삭제  
  전 coo2.net에서 동영상 강의를 한번보고 진실된 우리나라의 역사를 알게되었습니다.
이렇게 알게된 우리역사를 인터넷 뒤지면서 정보를 얻고 얻고 하다보니
성훈님 글까지 오게되었습니다.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성훈님 글이 정말 우리나라 역사에 근접하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응원보내겠습니다. 아자~아자~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미식 여행지 고흥, ‘녹동항 포차’에서 추억을 쌓아요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