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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78), 융희황제의 등극과 순행

융희 황제의 포부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5/29 [11:37]

대한정통사(78), 융희황제의 등극과 순행

융희 황제의 포부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5/29 [11:37]

 

▲ 순종황제 순행     © 안재세

 

단기 4240년(서1907) 11월 13일에 융희황제는 일제의 간교한 책동으로 경운궁(덕수궁)을 떠나 창덕궁으로 옮겨 정사를 살피게 되었다. 8월 27일에 경운궁의 돈덕전(敦德殿)에서 형식적인 즉위식을 마지 못해 마치고도 모든 일에 대하여 태황제(광무황제)의 의견을 받들고자 경운궁에 머물던 융희황제를 어떻게 해서든지 따로 떼어 놓으려고 갖은 술책을 강구하던 일제는, 마침내 눈의 가시같이만 여겨지던 광무황제와 융희황제를 반강제적으로 격리시켜 버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실제로 융희황제의 즉위 후 모든 정사에 대한 결정은 광무황제의 의견에 의하여 이루어지다시피 했으니, 반일파의 수령이나 마찬가지인 광무황제를 극도로 혐오하던 일제로서는 그처럼 부자지간을 격리시킴으로써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왜구들이 보기에는 융희황제가 저들 마음대로 조종될 수 있는 허수아비 정도로밖에는 비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천성이 대단히 총명할 뿐만 아니라, 광무황제나 마찬가지로 애국심이 강한 데다가 효성도 지극한 융희황제는, 어디까지나 부친이신 광무황제의 속마음을 간파하고 광무황제의 뜻에 따라 밝은 정치를 펼치려는 큰 뜻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11월 18일에 친히 종묘사직에 제사드리고 나서, 6개조의 국시(國是)를 맹서하여 고하고 다음날인 11월 19일에는 국민에게 조서를 발표했다.

 

  “‥천지가 만물을 덮고 실어주심이 사시의 변천이 아니면 그 생성의 공을 이루지 못하는 지라 삼왕(三王)의 예가 같지 아니하며, 오제(五帝)의 음악이 같지 않은 것이다. 만약에 변할 줄을 모른다면 인류가 멸할 것이다.

 

   열성조(列聖祖)께서 서로 계승하여 거듭되는 빛남이 여러번 흡족하여 문치(文治)를 숭상하시며, 고요함과 움직임에 스스로 지키어 오백년동안 백성이 태평을 즐긴 것은 동서양이 서로 통하지 아니하고 홀로 한편 구석을 보존하던 때이더니, 이제는 배가 연락부절하며 지척같은지라 교제의 잦음과 사물의 번잡함이 다시 지나간 때는 아니니, 옛 법만을 지키어 성명을 보존하면 국가를 보존할 수가 있을 것인가?

 

   하물며 쌓인 폐단은 고질이 되어서 문학은 다만 찌꺼기만을 주워 모으며, 법도는 다만 껍데기와 털만이 남아서, 백가지 견문이 있다하여도 하나의 실지가 없다면 이같이 하고도 능히 세계가운데 스스로 설 수 있을 것인가? 민생의 도탄과 국운이 진실로 신하가 임금을 돕지 못하는 것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한심하고 뼈에 사무치지 아니하랴. 짐이 이러한 때에 마침내 선위의 명을 받아 졸연히 임금의 자리에 임하니 시국이 어지러워 흠집이 눈에 가득한 지라, 크게 고치어 줄을 누르고 변통함이 있지 않고서는 절대로 우리 민생을 건지고 우리나라를 보존하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유신 두 자를 가지고 국시(國是)를 정하여 종묘사직에 경건히 고하며, 한마음으로 분발하여 치안을 도모하려 하니, 오직 너희 대소의 인민은 모두 짐의 뜻을 본받으며, 또한 너희 마음도 새롭게 하여 편견과 오해의 소견을 열어 젖히며, 오래 쌓인 고루한 습관을 털어 버리고 모두 때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크게 관념을 바꾸어 부지런히 힘써서, 오직 정덕(正德)과 이용(利用)과 후생(厚生)의 세가지 일을 힘쓴다면 백성은 부할 것이요, 나라는 강할 것이요, 국운도 새로울 것인데, 오히려 믿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며 옛 것에 연연하며 새로와짐을 싫어한다면 이것은 겨울에 무지개를 바라보려는 것이오, 여름에 얼음을 생각함이니 어떻게 함께 (자가당착에) 빠짐을 모면할 것인가? 여기에 크게 포고하나니 너희들은 공손히 들을 지어다. 응당 행할 조목은 좌측에 나열하노라.

 

1. 상하일심으로 군신이 상부하여 개국 진취의 대계를 정하게 함.

2. 농상(農桑)을 힘쓰며, 상공(商工)을 장려하여 넉넉히 국부(國富)를 개발하여 입국의 기초를 공고하게 함.

3. 기강을 진숙(振肅:떨치고 엄숙하게 함)하며 적폐(積弊)를 바로 잡아 중흥의 위업을 이루게 하여, 개국의 굉모(宏謨)에 부응하도록 함.

4. 내정을 개선하여 신민의 행복을 추진하고 사법제도를 확정하여 억울함이 없도록 함.

5. 인재를 발탁하여 적소에 등용함.

6. 교육은 꽃을 줍고 실(實)을 취함에 힘써 국가가 긴요한 수용에 응할 길을 열게 함.”

 

   이와 같이 큰 포부를 선포한 융희황제는 특히 친일파매국노들이 들끓고 있어서 마음대로 정사를 펼치기 힘든 현실을 간접적으로 백성들에게 알리면서도, 광무황제의 혈통을 물려 받은 그 특유의 낙관적인 성향으로 백성들과 한 마음으로 난국을 타개해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것이다. 일제는 새로 등극한 젊은 융희황제의 뜻과 포부가 저들의 의도와는 딴 판으로 의외에도 크고 강렬함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새 황제가 국민의 신망을 더 이상 끌어 모으기 전에 병탄을 속히 감행함으로써 대한국의 황통을 끊어 버리고, 저들의 야욕을 하루빨리 성취하고자 더욱 성급하게 서둘러 대기 시작했다.

   

순행묵시록

 

   4242년(서1909) 1월 7일 한겨울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융희황제는 즉위 후 처음으로 민정시찰을 위해 전국 순행(巡行)길에 올랐다. 순행을 제안한 것이 이등의 사주를 받은 이완용이었다고는 하나, 원래 황제는 즉위 후 자신의 나라를 대충 둘러보는 것이 옛부터의 관례였고, 융희황제 자신도 치밀한 계산 끝에,

 

  “짐의 순행은 짐이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 태황제께 상의드리고 결정할 문제이니 차후에 답변하겠노라.”

 

하고 일단 광무황제와 여러가지로 의논한 끝에 순행을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융희황제는 순행에 앞서 다음과 같은 조칙문을 내렸다.

 

  “짐이 생각하건대 백성은 나라의 근본으로, 근본이 튼튼하지 않으면 나라는 편안할 수 없는 것이다. 되돌아 보건대 부덕(不德)으로 아버지이신 황제폐하의 밝은 명하심을 받들어 큰 자리에 오름으로, 숙야(夙夜:이른 밤)의 일념은 국세의 위태로움을 받들어 안정시키고 민생의 도탄을 구하는 데 있었는지라. 이에 시정 개선의 큰 결심으로 지난 원년에 종사(宗社:종묘사직)에 맹세코 고하여 두려워하면서 조심하여 감히 조금도 태만하지 않았으되, 오직 지방의 소요는 오히려 사회의 안녕을 거스르고 서민들의 어렵고 고달픔은 아직 멈추지 않으니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침에 마음이 아프도다.

 

   하물며 이번에 추위를 당하여 백성의 곤궁함이 더욱 심함은 눈으로 직접 본 듯하니 어찌 일각인들 참고 견디어 비단옷과 보배(玉)에 혼자 편안하리오. 이에 근심하여 분발하고 확실하게 스스로 결단하여 이번 신년(新年)으로 먼저 유사(有司:조정)의 여러 신하들을 이끌고 몸소 국내를 돌아 지방의 형편을 두루 살피고 적자(赤子:백성)의 고통을 물어보려고 할 새(여기까지는 융희황제가 진심으로 내린 칙어이며, 이하는 이등박문의 강요 또는 농간에 의한 것임), 짐의 태자태사이며 공작인 이등박문은 짐의 나라를 정성을 다해 짐의 몸을 보필하여 이끌고, 지난 여름 한참 더운 때에 나의 동궁(태자)의 학식을 넓히기 위하여 그 노령의 병든 몸을 아끼지 않고 일본국 각지에 따라다니며 순행한 노고는 짐이 늘 깊이 감사하는 바이라. 지금 짐의 이 행차에 특별히 따를 것을 명하여 짐의 지방급무를 애써 도와 근본을 튼튼히 하고 나라를 편안케 하여 어려운 국면을 속히 구제하려고 애쓰니, 너희들 크고 작은 신민들은 모두 반드시 이를 알도록 하라.”

 

   광무황제와 융희황제가 이등을 혐오하며 이를 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대한국인들은, 황제의 칙어에까지 농간을 부리는 이등의 무도함을 보고 더욱 분노하게 되었으나, 병약하고 정신이 혼미한 것으로 알려졌던 융희황제가 장기간의 여행에 나설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며, 마음깊이 나라와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일말의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전라도를 위시한 남부지방에서의 의병봉기가 한창 열을 뿜고 있던 싯점에서 그러한 융희황제의 순행은 이등의 의도와는 달리 대한국인, 특히 의병들을 더욱 고무시킬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며, 대단히 허약한 심신때문에 궁성바깥쪽으로는 한 발자욱도 꼼짝 못 하실 정도로 건강이 위태로운 것처럼 여겨졌던 황제의 심신상태가 소문과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대한국인들은 안심하며 한숨을 돌리는 한편, 하루속히 왜구들을 몰아내고 조속히 자주독립을 이룰 수 있기를 다짐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점이야말로 광무황제와 융희황제가 뜻했던 바였다.

 

   그러나 이등은 이등대로 융희황제를 모시고 전국을 순행함으로써 대한국에 대한 일제의 보호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한편, 고조되어 있는 대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을 무마해 보려고 애썼다. 이등은 융희황제를 순행에 동원함으로써 황제가 통감부를 지지하고 있다는 선전을 하고 싶었던 것이며, 심지어는 나중에 융희황제를 일본에 모셔갈 때(?)를 대비해서 황제의 건강을 시험해 보려는 잔꾀도 작용하고 있었다. 즉, 광무황제의 양위때 일왕 명치의 대리자격으로 일왕자 대정(大正:다이쇼)이 대한국에 왔던 데 대하여 답례를 한다는 명분으로 융희황제를 일본으로 모심으로써, 일본 국내에서의 자기 위신을 높이는 한편 대한국을 병탄하는 데 보다 더 유리한 국면을 이끌어 보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융희황제와 이등이 동상이몽하는 가운데 순행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대한국인들은 이등의 잔꾀를 간파하고 있었으므로 황제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꾸미려던 이등의 의도는 먹혀 들어가지 않았으며, 대한국인들은 오히려 황제께서 일제에 의해서 감금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인상을 받고 자주독립의지를 더욱 굳혔을 뿐이었다.

 

   융희황제의 순행을 봉행하는 인원으로는 대한국 측에서는 내각각료 전원과 궁내부 직원, 그리고 30여명에 달하는 여관(女官) 등이었고, 이등과 대한국주차군 사령관 대구보(大久保:오쿠보) 및 통감부직원 몇 명이 동행했다. 순행열차는 우선 대구로 향했다. 융희황제는 첫날밤을 대구관찰부에서 지내고, 다음날 달성공원에서 열린 환영회장에 참석하여, 황제폐하의 용안을 뵙고자 인산인해를 이룬 대구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환영회장에서 대구의 유지들을 접견하고 봉영단(奉迎團)의 여흥도 관람한 후 숙소로 돌아 왔다.

 

황제가 신중하게 순행하는 것과는 달리, 대부분이 친일파매국노들인 송병준을 위시한 각료들 중에는 주색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자들도 있었다. 송병준은 심지어 일행이 부산에 도착한 1월 9일에는 술에 만취되어 일본옷을 입고 황제의 숙소에까지 나타나서 여관(女官)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등 정신이 파탄지경에 빠진 매국노의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1월 10일에 이등은 융희황제를 모시고 그 때 부산앞바다에 파견되어 있던 일제연합함대를 방문하였는데, 이등은 예포를 101발을 쏘게 하고 30분간 전투연습을 시범보인 후 융희황제께,

 

  “폐하, 이 함대는 대한국황제폐하의 경호 내지 편의를 위해서 (일왕이) 일부러 파견한 것이옵니다. 폐하께서 희망하신다면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다고 일본 궁내대신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라고 둘러대며 말하면서 융희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기도 했다.

 

   융희황제는 이등의 거짓속셈을 뻔히 알았으나 속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은 채 함대방문에 대하여 만족의 뜻을 표하고, 한 수 더 떠서 일본함대방문기념일이라는 명목으로 3천원 정도의 하사금도 내렸다. 이등은 그러한 융희황제의 고단수에 놀라는 한편, 소문듣기와는 딴판인 황제의 심모원려하는 사려깊은 태도에 대하여 정신이 번쩍 들어서 ‘별 볼 일없는 줄 알았던 융희황제가 저처럼 영특하니 하루빨리 대한국을 합병해 버리는 게 상수겠다’고 더욱 못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즉, 그는 가는 곳마다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융희황제의 인기가 치솟는 것을 보고 합병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었다.

 

   융희황제는 계속해서 마산을 거쳐 1월 13일에는 대전에 도착했는데, 불과 2시간의 짧은 체류시간동안에 그동안 숱한 의병투쟁이 벌어졌던 충청도지방의 관리들과 유림들의 자손들을 알현한 후, 궁내부대신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칙어를 내렸다.

 

  “세계의 진운(進運)에 따라서 우리나라의 정치도 개혁할 필요가 있으므로 정부가 크게 노력하고 있는 중이노라. 오늘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국민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므로, 짐의 정치를 돕고 낡은 관습을 타파하고 악정을 쇄신하는 데 협력해 주기 바라노라.”

 

   뜻하지 못했던 융희황제의 훌륭한 칙어를 듣고, 자주독립국 건설을 위하여 진실한 인재들을 등용하고자 하는 융희황제의 큰 포부를 알게 된 지사들은 오직 감읍할 뿐이었다.

 

   대전을 떠나 서울로 돌아온 후 잠시 피로를 푼 황제는, 1월 27일부터는 서북지방으로 순행했다. 약 1주일간의 예정으로 개성을 거쳐 평양과 신의주 등을 돌아 본 황제는 2월 3일에 서울로 돌아 왔는데, 그동안 이등은 명철한 융희황제를 기죽여 놓기 위해서 갖은 건방을 다 떨었으나 융희황제는 별로 대응하지도 않았다. 즉, 이등을 무시해 버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귀경 후에는 오히려 이등을 위로하는 칙어까지도 내렸으니, 이등같은 소인배가 감히 시비걸며 넘볼 수 있는 작은 그릇이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천하의 교활한 간적인 이등이 왜왕의 문책을 받고 대한국 통감자리에서 사임당했을 때도, 황제는 속마음이야 어쨌건 왜왕에게 ‘이등의 유임을 부탁한다’는 내용의 친서까지 보냈던 것이다. 그 깊은 속 뜻을 왜왕 명치나 이등따위의 국제깡패같은 천박한 무리가 어찌 헤아릴 수가 있었을 것인가?

 

   융희황제는 막연히 여행삼아 순행길에 나섰다거나 또는 이등박문의 강권에 못이겨서 억지로 순행한 게 아니었다. 순행은 예로부터 황제가 즉위한 후 자신의 관경(管境)을 구석구석 돌아 보며 나라의 형편을 직접 살핌으로써 다스리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고, 또한 신민(臣民)들로부터 신임도 얻는 공식적인 정통성계승의 절차로서의 역할을 했다. 거기에 덧붙여서, 융희황제는 광무태황제의 뜻을 받들어 전국민들의 민족공동체의식을 다지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뜻에서 한겨울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순행을 단행했던 것이다. 

 

  그 증거로 융희황제는 가는 곳마다 그 지방의 충신·열사·의인·효행 등을 기리고, 대외항쟁의 역사적 의의가 있는 유적지나 사당들을 거의 빠짐없이 칭송하고 영령들을 높이 받들도록 했으니, 순행여정 중 그 위업과 덕을 높였던 유적과 인물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남행) 융건릉 - 박 태보 - 김 창집 - 이 이명 - 조 태채 - 이 건명 - 사육신 - 이 순신 - 송 시열 - 조 헌 - 송 준길 - 김 장생 - 김 집 - 김 굉필 - 정 여창 - 이 언적 - 이 황 - 신라왕들의 사당 - 수로왕 - 김 유신 - 양녕대군 - 효령대군

 

(서행) 윤 관 - 이 이(임진강) - 성 혼 - 강 감찬 - 박 세채 - 정주의 충민사,표절사 - 임 경업 - 이 완 - 최 몽량 - 황 일호 - 최 호일 - 차 례량·차 충량 - 안 극성 - 차 원수 - 차 맹윤 - 장 후건(차 례랑 - 장 후건까지는 ‘추증’함) - 의주 취승당(조선 선조의 유적 ; 연회를 베품) - 기자릉 - 동명왕릉 - 숭령전 - 단군릉(강동) - 숭인전 - 을지문덕 - 선우 협 - 박 문일·박 문오 - 김 경서 - 정 봉수  등

 

   평양의 숭인전에 순행했을 때는,

  "어진 성인의 여덟가지 가르치심은 인류의 문화를 열어 놓아 만대(萬代)토록 그 덕을 입게 되었다. 숭인전에 평남관찰사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게 할 것이다.”

하며 단군과 기자의 덕을 높이 기림으로써, 단군의 한 자손으로서 거족적으로 대동단결하여 자주독립을 쟁취하자는 묵시적 조칙을 내리기도 했다. 특히 임진왜란에 큰 공을 세웠던 충신·의병·열사들을 흠모하는 정성을 보임으로써 의병항쟁을 무언중에 고무했던 것이다.

 

   그처럼 순행하는 곳마다 대외항쟁의 구국영웅들을 높이니, 그 뜻이 과연 어디에 있었겠는가? 침략의 원흉이자 온갖 국제사기극의 주범인 이등과 그 일당들에게 둘러싸인 채 의연하게도 무언중에 침략자들을 규탄하며, 의병봉기와 독립운동을 촉구한 융희황제의 외로운 투쟁을 목격한 모든 열혈의 애국지사들은, 음흉한 이등이 목적했던 바와는 달리 더욱 토왜(討倭)의 의지를 굳히고 구국전선에 뛰어 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순행의 여파에 놀란 간악한 이등은 자신이 앞장서서 추진했던 순행을 곧 중지시키고, 왜구들을 더욱 많이 불러들임으로써 토왜투쟁을 방해하고, 대한국합병의 수순을 서둘러 진행하고자 하는 악랄한 음모에 박차를 가했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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