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정통사(80), 안중근 의거 - 침략원흉 처단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7/20 [09:45]

대한정통사(80), 안중근 의거 - 침략원흉 처단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7/20 [09:45]

 



  대한국을 병탄하려고 온갖 만행을 일삼던 이등은 4242년(서1909) 10월에 만주를 시찰하게 되었다. 이등은 정미늑약 이후에도 대한국의 모든 자생력을 강탈하거나 짓밟아 버리고 악랄한 경제수탈을 자행하여 대한국인 중 그를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한 이등이 만주를 시찰하게 된 이유는 당시 러시아정부내의 최고유력자로 알려져 있던 코코브체프가 만주의 철도시설을 답사하려고 극동에 여행 중인 기회를 타서, 대한국을 합병하는 문제에 관하여 그와 함께 의논한 후 러시아 측의 양해를 구하려는 의도에서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얼빈에서 코코브체프와 약 20분간 요담을 마친 후 열차에서 내려 역구 내에 정렬한 러시아군대를 사열하고, 영접하러 나온 각국 영사들과 악수를 교환한 다음에 일본인 환영단과 인사를 나누려고 하는 순간에 대한국 독립군참모중장인 안중근의사에 의하여 총살당함으로써, 아비지옥의 온갖 악형으로도 회개하기에 턱없이 모자랄 흉악한 행적으로 점철된 추악한 일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안중근
  일찍이 이준 열사를 흠모하여 열사와 함께 나라를 위하여 한 목숨을 기꺼이 바치기로 맹서했던 안중근 의사는, 헤이그에서 이준 열사가 장렬한 최후를 마친 소식을 듣고서 열사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살신성인 정신에 더욱 흠모의 정이 깊어졌다. 그리하여 그 자신도 스스로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알고서 해삼위를 근거지로 하여 수차례에 걸쳐 두만강을 건너 왜군을 습격하는 등 무장투쟁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만고의 흉적인 이등이 만주로 갈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안 의사는 평소 존경해마지 않던 유인석 의병장을 찾아뵙고 이등을 처단할 뜻이 있음을 알렸고, 유인석 의병장은 안 의사를 격려하며 거사가 성공하기를 기원하였다. 모든 준비를 끝낸 안 의사는 우덕순․유동하 등 동지들과 함께 기필코 이등을 처단하기 위하여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하얼빈 역전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거사 후 외투안쪽에서 태극기를 꺼내어 흔들며,
 “까레이 우라!(대한국 만세)”
하고 수차례 목이 터져라 외쳤으니, 당시의 하얼빈에는 러시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등을 처형한 의거가 대한국인에 의한 것임을 그 자리에서 러시아인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거사를 감행한 안중근 의사는 곧 역을 경비하고 있던 러시아군에 의하여 체포당했으며, 얼마 후 일제 측의 요구에 의하여 요동반도의 여순에 있는 일제의 지하감옥에 갇혔다. 안 의사는 온갖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재판정에 나와서도 ‘동양평화론’을 주장하는 등 떳떳하게 일제의 횡포에 맞서 투쟁을 전개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변론에는 을미의병 당시의 홍주 의병장 출신으로서 그 후 변호사가 되어 독립운동에 헌신해 온 안병찬 한 사람만이 무료변론을 맡고 나섰다. 그런가 하면 4242년(서1909) 12월 12일에 영도사(永導寺)에서 열린 소위 ‘이등추도회’에는 한성부윤이었던 친일파 장헌식, 총리대신 이완용 등 이외에도, 경성의학교장인 지석영등도 참석하여 ‘추도문’을 낭독하는 망발을 연출했다. 한쪽에서는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의거를 일으키고 있는 중에도 일제에 아부하려는 자들은 오히려 더욱 설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일제대로 안중근 의사를 회유해서 저들의 대외적인 선전전략에 이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를 회유하는 데 실패한 일제는 불법적으로 안 의사를 교수형에 처함으로써 많은 국제적 비난을 또 한 번 자초하기도 했다. 안중근의사의 의거는 잠자고 있는 듯하던 배달민족의 용감성을 세계만방에 당당히 알리고 왜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세기적인 쾌거였으며, 그 후 대한국인들의 구국항일투쟁을 전개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시범적 역할을 하였다.


  안중근의사의 의거 이후 대한국 청년들의 의로운 피는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평안남도 출신인 23세의 이재명은 이등처형 후 약 한 달 후인 12월 2일에, 명동 천주교당에서 거행한 벨기에황제 추도식에 참석한 후 인력거를 타고 돌아가던 이완용을 군밤장수로 변장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습격해서 칼로 허리와 등을 찔러 중상을 입혔다. 이완용은 그로 인해서 총리대신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 박제순이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으나, 일제는 그러한 대한인들의 항거를 더욱 더 폭압으로 억누르고 병탄의 수순을 밟기에 여념이 없을 뿐이었으니, 일제에게 일말의 국제적 양심이나 인류적 양심이라도 구하려고 하는 모든 노력은 오직 헛된 도로에 그칠 뿐이었던 것이다.


  안 의사의 살신성인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여건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러시아가 동청철도(東淸鐵道:만주지방의 철도)를 팔아 치우려는 구상을 하고 있음을 간파한 일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운영권을 확보하려는 공작을 진행시켰는데,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세력이 너무 강해지고 있는 데 대해 우려한 미국 측에서는 4242년(서1909) 12월에 ‘만주철도 중립화안’을 관계되는 각국에 제안했다. 그러나 그 제안은 일제뿐 아니라 러시아에게도 내정간섭으로 인식되면서, 4243년(서1910) 1월 21일에는 오히려 러시아와 일제가 보조를 함께하여 그 제안을 거부하였고, 더 나아가서 새로운 노일협약의 체결을 약속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에 고무된 일제는 4243년(서1910) 2월에 소촌 외무대신을 통하여 각국에 가 있는 일제의 공관에 이미 4242년(서1909) 7월에 만들어 놓았던 ‘한국병합방침 및 시설 대강’을 일제히 발송했고, 각 공관들은 그에 따라서 병합을 정당화하려고 각국에 대한 외교적 접촉을 활발하게 전개한 결과, 4243년(서1910) 4월 11일에는 노일 양국 간에 새로운 노일협약의 추진과 더불어 일제의 대한국 합병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 이외에 영국 측에서도 일제의 대한국 병합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4243년(서1910) 5월 19일부터 8월 14일까지 주로 한반도에 있어서의 영국의 기존 이권을 보장받으려는 교섭을 일제와 계속 벌였다. 그 결과 영국은 일제가 새로 정한 높은 관세율이 아닌 대한국과 이미 체결했던 낮은 관세율을 향후 10년간 적용받는 것으로 타협을 본 후 대한국의 운명을 일제에 일임해 버리고 말았다. 즉, 영국의 입장은 한반도에서 자기네들의 이익만 보장받을 수 있다면 대한국이야 어찌 되건 전혀 관심 밖이었던 것이다(모든 열강이 마찬가지였겠지만). 4243년(서1910) 7월 13일에 노일협약도 성립된 마당에 당대 최강국인 영국과의 타협까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지자 일제에게 남은 것은 병탄일자를 정하는 것뿐이었다.

 

* 천주교도인 안 의사의 의거로 난관에 직면한 뮈텔 주교는 몹시 당황하여, 직접 서울프레스를 찾아가서 암살자가 천주교인일 수 없다고 항의했는가 하면, 천주교기관지인 경향신문의 논설을 통해서는 비록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고, 또한 생명을 바치기로 결심했으니 용맹하다 할지라도, 살인은 악인즉 악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강변함.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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